지금이 정말 행복한 시간
지금이 정말 행복한 시간
회사를 그만 둘 때 가족회의를 했다.
가족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내가 왜 그만 두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이야기 했다.
이미 개인적으로 다 이야기를 했던 내용이지만 그래도 가족이 전부 모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이야기 했다. 아내나 두 아들 그리고 두 며느리까지 그동안 고생했다고, 감사하다고 하면서 이제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즐기며 살라고 한다. 참 고맙다.
대부분의 백수의 삶이 힘든 이유 중의 하나가 위로가 없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40여년을 넘게 봉사해 왔지만 그간의 노고는 온데간데없고, 당장의 수입이 없는 현실만이 다가온다. 어느새 뒷방늙은이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회사를 그만두고 9개월 동안은 실업급여를 받았는데 엊그제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았다.
이제 만65세가 지나서 다시 취직을 한다고 해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생에 마지막 실업급여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야 말로 정말 수입이 하나도 없는 백수다.
코로나 팬더믹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IMF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회사를 그만 뒀다고 할 핑계가 생겼다. 그래서 취직을 할 수 없었다고..
그러고 보니 세상 살아오면서 변곡점마다 힘들지 않았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70년대 국가 경제가 급 성장하던 시절에 사회에 나와서 취직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다가 군대 제대하고 나니까 갑자기 오일 쇼크가 와서 취직이 어려웠고, 사업을 시작하고는 해외로 해외로 사업체가 빠져나가 어려웠고, 급기야 IMF까지....
사업을 그만 두고 취직한 후 16년, 정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역시 코로나 팬더믹이 기다리고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항상 무한 경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래도 난 요즈음 세상에서 편하다. 글을 잘 못쓰니까 어디서 원고 청탁 같은 것도 들어오지 않으니까 원고 독촉도 없고, 회사에 퇴직을 했으니까 설계나 기계제작, 설치에 대한 납기를 독촉하는 사람도 없고, 회의 독촉도 없고, 출근을 따로 하지 않으니까 출근시간에 쫓기는 일도 없으니까.
하루종일 일과가 모두 내가 맘대로 작성하고 실천하는 계획표대로 생활한다.
하루의 시작을 블로그의 댓글이나 방문자 수 확인으로 시작하고, 오전에는 집중이 잘 되므로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하고, 점심을 먹고는 간단한 운동을 한다. 운동이라 봐야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일이지만 그것도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있는 나로서는 꼭 필요한 최소한의 운동이다.
동네 한바퀴 하면서 커피점에 들러 천5백원하는 아메리카노 한 잔 하는 재미에 푹빠져 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얼죽아’가 유행이지만 난 ‘더죽따아’다. 더워죽어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라고 나 혼자 이름을 지어봤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양천도서관에 가서 네다섯권의 책을 빌려와서 주로 저녁에 늦게까지 책을 본다.
또 가끔은 친구들과 점심약속해서 막걸리도 한 잔 하고, 당구도 한 게임하며, 저녁에 만나는 친구들하고는 제철 생선회에 소주 한 잔 걸치기도 한다.
아직은 더 일하고 싶고, 또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지만
마음 급하게 먹지 않으려고 한다.
지금 하고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수입이 없어서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던가?
현실을 더 정확히 분석하고 준비하여 앞으로의 30년을 후회없이 보낼 수 있도록 준비도 해야겠지만 그것도 천천히 생각해 보고 싶다.
이젠 자식 장가 다 보내고, 저들 밥벌이 잘하고 알콩달콩 잘 살고 있으니,
우리부부 노년을 행복하게 살 계획만 하면 되는 이 시간.
숨 쉴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에 비하면 지금이 정말 행복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