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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믿기 좋아하는 그루터기의 사고(事故) 일기

그루 터기 2021. 8. 13. 10:46

남을 믿기 좋아하는 그루터기의 사고(事故) 일기

 

  옛날에 주식을 하다가 돈을 날린 일이 있었다. IMF 이후 주식이 하루가 다르게 상승장을 타고 있을 때였다. 주위의 많은 친구들이 주식 투자를 했다. “너도 한 번 조금씩 취미삼아 한 번 해봐친구의 말을 믿고 주식을 시작했다. 친구의 말만 믿은 게 아니라 사업을 하는 경영인으로 경기의 흐름을 알아야 할 것 같고, 주식을 하면 경기 흐름에 대한 공부가 많이 될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취미삼아 주식을 했다. 그 때 한 창 잘나가던 코스탁에 상장된 IT분야로 시작을 했다. 어떤 날은 수십 만원이 올라 기분좋게 한 잔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수십만원이 내려 속이 터질 때도 있었다. 그 땐 보통 말하는 상승장이었기 때문에 주식의 기본도 모르고 주식을 시작했어도 웬만한 주식은 다 올랐었다. 곧 기대에 휩싸였고, 쪼들리던 살림에 돈을 박박 긁어서 주식에 넣었다. 어떻게 되었냐구요? 주식의 결과는 이미 시나리오에 적혀 있었다. 그 시나리오를 나만 보지 못했던 것 뿐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주식에서 대박 났으면 내가 이렇게 살고 있지 않았을 거다. 친구들에게 자주 하는 소리로 최고급 그랜져를(그 시절에 최고급 승용차 였다.) 넣었는데 지방 출장 갔다 두 달만에 돌아왔더니 티코 앞바퀴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네 ㅠㅠ였다. 그 때 당시 그렌져 1대 값이면 할부 스텔라를 타고 다니던 나에게는 정말 비싼 수업료였다. 그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지금까지 다시는 주식 투자를 하지 않는다. 전국민 공모주 까지도....

 

 

  한 번은 지점장을 하는 친구의 소개로 펀드도 하다가 반 토막 난 일도 있다. 주식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주위에 펀드로 재미를 본 친구들이 많았었다. 어렵게 모아둔 거금을 펀드에 투자하게 되었다. 지나고 나서 안 일이지만 주식이나 펀드는 소문이 날 때쯤이면 이미 늦은 거였다. 중국 펀드가 한 창 인기가 많을 때였다. 친구의 권유로 잘 나간다는 중국 펀드에 묻지마 투자를 하게 되었다. 은행의 전문가 들이 하는 주식투자이므로 내가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처음에 기대대로 펀드에 수익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가는 수익에 신나하면서 역시 전문가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번에도 꽤 오랜 시간 사업한다는 이유로 잊고 있다가 확인해 보니 원금을 까먹기 시작했다. 언젠가 반등의 기회가 오겠지 하면서 기다렸지만 펀드도 주식처럼 나의 꿈을 무참하게 밟아 버렸다.

 

 

  결정적인 실패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발생했다. 펀드의 손실로 투자에 대해 거의 잊고 있을 때쯤 친한 친구로 부터 부동산 투자에 대한 제의가 왔었다. 사업 소질이 있어 부동산 관련 학원을 몇 개씩 운영해서 빌딩도 사고, 대통령 전용차 수준의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친구였다. 가끔씩 놀러가면 회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고급 일식집이나 참치집서 술도 한 잔씩 사주고, 몇 년 동안 동창 모임에 나오면 큰 금액의 장학금을 선듯 내 놓는 멋진 친구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 도시락을 나누어 먹고 토요일이면 친구집에 놀러가 어머님이 해 주시는 칼국수도 자주 얻어먹었던 친구였다, 결혼식 뒷풀이 날에 친구 집에서 자고 올 정도로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하나였다.

 

  그 땐 그 친구가 소개한 부동산 투자가 그냥 좋은 택지를 사는 것으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요즈음 말하는 기획 부동산이었다. 그 당시 핫한 지역이던 양평 서정면에 야산을 구입하여 택지로 지목을 변경하고, 분양하는 방식이었다.(서정면 안쪽으로 들어가면 거의 전부 그런 식으로 전원주택이 생겼다) 노후에 살 집을 지을 땅으로 최고라고, 아니면 중간에 팔아도 2~3배는 눈감고도 받을 수 있다는 친구 말에도 몇 차례 거절을 했었다. 친구의 이야기에 약간의 의심도 있었지만 투기를 잘 하지 않는 나의 성격탓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에 장기 출장 중인 현장으로 계속 전화가 와서 너무 좋은 곳이라 제일 친한 나한테 양보하는 것이라고 몇 번씩 권하는 바람에 손해난 펀드를 해약해서 송금을 하게 되었다. 정말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어떤 곳인지도, 어떤 조건인지도 물어보지 않고, 그냥 친구만 보고 송금을 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 정도 지나고 지방 장기 출장 공사도 끝난 이후 동창 모임에서였다. 가까이 지내던 또 다른 친구가 조심스럽게 혹시 친구하고 돈 거래 같은 거 했었느냐고 물어 물어왔다. 네가 그 친구와 제일 친하니까 나에게 틀림없이 전화가 왔을 거라는 예기였다. 나쁜 예감은 빗겨가질 않았다. 이야길 들어보니 나와 같은 방법으로 돈을 보낸 친구가 꽤 여러 명이었다. 나보다 더 많은 돈을 그것도 퇴직금 전부를 보낸 친구도 있었다.

 

  며칠 후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찾아갔다. 반갑게 맞아 준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뭇거리는 나에게 뭣 때문에 왔는지 다 알고 있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행정이 조금 늦어서 그렇지 금방 택지가 분할되면 등기를 해 주겠다고 한다. 나는 아들이 대학에 막 들어가서 자취를 해야하는데 방을 얻어주려면 그 돈이 필요하니 투자에서 빼 달라고 했다. 알았다고 하면서 지금은 현금이 없으니 서현역 앞에 있는 아파트를 급매로 내 놓고 팔리면 너 돈부터 돌려주겠다고 했다. 그 아파트 이야기는 그 전에도 몇 번 들었던 아파트였기 때문에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저녁을 먹고 2차로 친구가 임대를 준 호프집으로 갔다. 그동안 몇 번 갔던 집으로 임대준 상가라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하는 이야기가 이 상가도 내놓았는데 먼저 팔리면 내 돈부터 해결해 준다고 한다.

 

  물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 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 친구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의 부인은 이미 모든 걸 포기하고 있었다. 도리어 보태주고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망가지고 가버린 친구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의 무모한 해외 노래방 기기 사업의 허황된 꿈의 실패로 거짓에 거짓을 낳고 또 거짓으로 돌려막다보니 결국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엔 사채을 갚지 못해 거의 매일 살해 협박으로 죽음의 공포 속에 살았다고 했다.

 

  그 친구가 저 세상으로 떠 난지 10년이 지났다. 난 아직도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 핸드폰을 몇 번 바꾸고, 전화번호를 몇 번 정리했지만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차지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졌을 전화번호지만 그 때 그 번호 그대로 남아있다.

 

난 전화번호를 못 지우는게 아니라 친구를 가슴에서 지울 용기가 없는 것 같다.

 

  고교시절 친구가 살던 단독주택 우물가에서 주렁주렁 열였던 정말 달고 달던 청포도, 그 청포도가 생각난다. 친구가 빌려줬던 '플라톤 전집'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국가론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작은키에 얌전하여 불렀던 색시라는 별명을 크게 한 번 불러보고 싶다.

 

소주가 생각나는 밤이다.

 

 

 

 

 

 

고교시절 문학소년이었던 그에겐 책이 많았었다. 

두꺼운 한권의 책 속에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국가론'이 같이 있었던 책이었다. 

그리 길지않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나에게 삼단논법의 무서움을 아르켜 준 책이었다. 

흰색표지에 두꺼운 양장의 그 책을 다시 한 번 만져보고 싶다. 

고교시절 두꺼운 철학책을 옆구리에 끼고 폼잡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출처: 네이버 책 정보)

 

(출처: 네이버 책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