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가 인생을 가르쳐 준다》, (주)넥서스, 2021
나태주, 시가 인생을 가르쳐 준다. (주)넥서스, 2021
지금처럼 짧은 시간 한 번 훅하고 읽고 지나가기에는 좋은 글들이 너무 많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빨리 보고 다른 책으로 바꿔야 합니다.)
이런 책을 소장해두고 천천히 생각 날 때 마다 한 번씩 꺼내 읽으면 좋겠다.
‘시는 시인의 삶에서 나옵니다. 그 사람의 하루하루 인생에서 나옵니다.’ ‘시에서 인생을 배웁니다.’라는 책머리에 들어가는 글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아직 나는 가슴으로는 이해가 잘 안됩니다. 아직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해서 일거라 생각해 봅니다.
책 속에 좋은 시들이 많은데
그중 특히 마음에 와 닫은 조지훈님의 시를 옮깁니다. 어쩜 퇴직한 이후 찾아온 통풍과 함께하는 지금의 내 처지를 적은 것 같기도 하구요. 저도 통풍을 그리 미워하지 않거든요.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든 친구 일뿐이니까요. 모든 게 내가 한 짓이잖아요. 좋든 실든.
병(病)에게 조 지 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 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리 다시 인생을 애기해 보세그려.
작가 나태주님의 묘비명으로 쓴 짧은 글도 옮깁니다.
묘비명 나 태 주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나의 묘지에는 어떤 글이 적혀 있게 될까?
아직은 고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