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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뭐라도 되겠지』, 마음산책, 2011

그루 터기 2021. 11. 7. 07:01

김중혁, 『뭐라도 되겠지』, 마음산책, 2011

 

인생은 예순부터라면 청춘은 마흔부터이다.

삼겹살과 조개구이는 싫다. 왜 손님에게 요리를 시켜요. 다 알아서 썰어주는 회가 좋다.

 

기억력 좋은 사람이 부럽다. 20년도 더 지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사소한 대화나 세세한 풍경까지 정확하게 기억해 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기억력이 형편없는 탓에 이정도로 좋은 성격을 유지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려주는 기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쏟아야 알 수 있는 일.

 

학교는 잔인한 곳이다 대부분의 학교가 그렇다. 우리는 모두 겪어봐서 안다. 그곳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룰이 있고,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선생님이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가 있다. 모든 학생이 동등하게 입학하지만 졸업할 때는 계급이 생긴다. 학교는 계급을 매기기 위해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지나서 둘러보면 주위에는 다 고만고만한 친구들이 옆에 있다. 많은 동기생들 중에 계급이 비슷한 친구들만 주위에 있다.

 

모든 보일러는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사람들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지. 이 한 몸 바쳐 사람들을 따뜻하게 할 수만 있다면...

이기적인 부모가 될 수 있다면.

 

낭독에 발견이라는 단어를 붙이다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발견이라는 것은 숨겨진 세상의 보물을 발견하거나, 하다 못해 비상금이라도 찾아냇을 때에야 쓸수 있는 단어가 아닌가? 낭독이라니. 도대체 낭독에서 발견할 게 뭐가 있다고 라고 생각했는데 뜻하지 않게 내가 낭독을 발견하고 말았다.

 

 

결국 삶이란 선택하고 실패하고, 또 다른 걸 선택하고 다시 실패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실패를 빨리 인정하고 원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유연성이다. 실패가 별게 아니란 걸 깨닫고 훌훌 털어버릴 수 있으려면 실패에 익숙해야 한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다 더 큰 실패를 맛볼 수도 있다.

 

나는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걸 막기 위해 모든 학교에 똑같은 급훈을 적어두었으면 좋겟다. 급훈 자리에 ‘예술’이라고 적어두면 좋겠다. 그래서 모든 학생드이 매일 ‘예술’이라는 글자를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물로 나 같은 학생은 거기에 글자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 그것도 괜찮고, 급훈에 까라 살아가는 학생이라면‘좋아, 오늘도 공부를 예술로 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테니 그것도 괜찮고, 급훈이란 학생들의 자유의지를 파괴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에겐 ’예술‘이라는 단어가 선문답 같은 것이 될 테니 그것도 괜찮다. ’예술‘이란 단어에는 무엇을 하라는 강요도 없고,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지도 없으니 말이다. 똑 같이 예술을 바라보아도 학생들은 각자 자신만의 예술을 생각할 것이다.

 

“김동현 선수는 운동선수가 되지 않았으면 뭐가 되었을 거 같아요?”감동현 선수가 대답했다.

“집에, 아마 짐이 되었을 거예요”

진행자나 게스트는 크게 웃지 않았는데 나는 보다가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웃기지만 슬프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집 한구석에 아무 말 없이 짐짝처럼 구겨져 있는 커다란 덩치의 슬픈 김동현 선수 얼굴이 떠올라 미친 듯이 웃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포기하고 있었다. 시간을 포기하고, 돈을 포기하고, 또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한 다음,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인생은 어떤 것을 포기하는 가의 문제다. 선택은 겉으로 드러나지만 포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기로 선택하고 결국 돈을 많이 벌게 된 사람이 어떤 걸 보기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