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북드라망. 2020

그루 터기 2021. 11. 11. 07:22

고미숙,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북드라망. 2020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질문이다. 삶에 대한 질문, 사람에 대한 궁금증, 사물에 대한 호기심,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항심과 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항심이 시간을 통과하는 힘이라면, 하심은 어디서건 무엇이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다.

 

우주는 거대한 도서관이다. 하늘은 책이다. 무량겁의 텍스트가 거기 있다. 읽고 읽어도 늘 새롭다. 매일 아침 하늘을 새로운 세상을 연다. 올해 봄은 지난 봄의 반복이 아니다. 전혀 다른 봄이다.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그러하다. 땅은 견고해서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축은 쉼 없이 이동하고 있다.

 

이 어둡고 깜깜한 세상에서 적어도 스스로를 달빛 삼아 지낸다면 그나마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겠는가.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첫째로,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진리를 배워서 성인이 펼쳐 놓은 깊고도 미묘한 비밀을 들여다 본다.

둘째로 널리 인용하고 밝게 분별항 천년의 긴 세월 동안 해결하지 않은 문제를 시원스레 해결한다.

셋째로 호방하고 힘찬 문장 솜씨로 지혜롭고 빼어나 글은 써내어 작가들의 동산에서 거닐고 조호의 오묘한 비밀을 캐낸다.

이것이야 말로 우주 사이의 세 가지 통쾌한 일이다.

 

고전의 지혜야말로 일용할 양식이에요. 그 양식이 있을 때 길 위에 나설 수 있는 거구요. 길은 사건의 현장이죠. 늘 온갖 사건들이 생겨나고 소멸합니다. 이 사건들 속에서 어떤 삶을 만들어 낼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키는 바로 사유의 내공에 달려 있습니다.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라 질문이다. 삶에 대한 질문, 사람에 대한 궁금증, 사물에 대한 호기심,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 앎의 도약이 주는 환희 등. 이것은 모든 이에게 가능하다. 그 질문과 호기심과 앎의 욕구는 언어의회로, 문자의 체계를 따라 움직인다. 문제는 질문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사랑과 애착, 사랑과 소유욕을 구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앎의 의지가 작용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앎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그것은 소유욕이자 집착이다.

소유욕이 앞서면 알고 싶지 않다. 그저 가지고 싶을 뿐이다. 알고 싶다면,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알고 싶다면, 그 앎이 자신을 설레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앎과 소유는 정반대의 백터를 지녔다. 전자는 교감이고, 후자는 쾌락이다. 에로스는 로고스를 열망한다는 이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해할 수 없는데 사랑한다면 그건 맹목이고 폭력이다. 그로 인해 초래되는 쾌락만을 음미하고 싶은 것이다. (나 자신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

 

결국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다. 그럼 어디서 시작하지? 간단하다. 지금도 좋고 나중에도 좋은 일을 찾아야 한다. 이 말은 또 이렇게 변주될 수 있다.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은 일. 청년기에도 좋고, 중년에도 좋고, 노년에도 좋은 일.

 

20세기는 이분법이 지배한 시대다.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등등 아울러 인생은 노동, 화폐, 가족이라는 트라이앵글만 잘 지키면 된다고 여긴 시대다. 그러다 문득 디지털 문명의 도래와 함께 21세기라는 아주 낯설고 기이한 연대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길이 사라졌다! 이분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노동은 점차 사라져 가는 중이고 화폐와 가족이라는 척도는 더할 나위없이 공허해지고 있다. 결국 21세기에는 청년에서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에게 낯설고 기이한 연대기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절규한다. 마치 사막에 서있는 기분이야~. 특히 청년과 중,노년이 다 같은 처지라는 사실은 몹시 흥미진진하다. 나이, 서열, 연륜 등의 코드가 지웠다는, 다시 말해서 세대를 갈라놓은 온갖 장벽들이 무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진정 벗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누가 읽어도 똑 같은 내용이야 그런 걸 뭐라고 해요? 교과서라고 해요, 그래서 교고서는 다 지겨워하는 거예요. (중략) 똑 같은 책을 읽어도, 언어는 핍도다 더 신체적이라고 했죠. 어떤 언어든 내 신체를 통과하면서 뉘앙스, 문법 구조, 배치 등등이 바뀌어 버린다니까요.

그래서 스스로 사유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