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김홍중, 『은둔기계』, 문학동네, 2020

그루 터기 2021. 11. 28. 10:34

김홍중, 은둔기계, 문학동네, 2020

 

2021년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된 책이다. 수필집이라고 해서 덥석 집어 들었는데 첫 페이지부터 머리가 복잡하다. 제가 책을 고를 때 주의 깊게 보는 항목 중의 하나에 출판사가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문학동네나 샘터 같은 출판사는 선호순위가 상위다. 처음 책을 마주했을 때 표지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무엇을 그린 그림일까? 은든보다는 혼돈에 가가운 그림.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니 역시 어렵다. 책을 읽어가면서 810대로 분류하지 않고, 330번대로 분류한 이유를 알만 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라는 작가소개에서 전문 수필작가가 아닌 분의 자서전 성격의 책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분이 사회학을 전공하지 않고 문학을 전공하셨더라면 어떤 일이 잃어날까? 참 바보같은 생각도 해본다.

 

솔직히 이해되는 부분보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을 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만큼 재미는 없었다. 중간에 덮고 싶은 생각이 날 정도로. 중간 중간 이해가 되는 보석같은 글들이 많아 끝까지 갈수 있는 힘이 된 것 같다. 나는 언제쯤 이 책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게 될지... 어려운 숙제다.

 

 

 

작가소개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분야는 사회이론과 문화사회학이다. 계간사회비평문학동네편집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마음의 사회학, 사회학적 파상력등이 있다.

 

 

 

은둔은 이제 생존을 위한 생명의 필사적 재조립이라는 의미를 띤다. 은둔 속에서 노동하고, 생각하고, 산책하고, 읽고, 쓰고, 견디고, 저항하고, 소통하고, 창조하며 다른 무언가로 생성되어가는 이들을 나는 은둔기계라 부른다. 이 책은 은둔기계의 삶에 관한 것이다.

 

숨어 있던 파편이 반짝거리며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전체에 매혹되거나 설득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파편이다. 파편이 총체보다 더 크고, 심오하고, 생명력이 있고, 강렬하다.

 

야구는 정교하게 디자인된, 체계적으로 반복되는 죽음의 연습이다. 야구는 죽음을 생산하고 죽음을 사실화한다. 야구처럼 노골적이고 흥미진진한 죽음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야구의 모든 기록은 어떻게 세 명의 타자들이 죽어갔는가에 대한 기억이며, 죽어간 타자들에 대한 방대한 통계다.

 

야구를 좋아하는 자에게 세계는 낭만적 우주가 아니다. 그것은 건조하고, 산문적이며, 고독한 세계다. 그것은 은둔지다.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우리는 연인의 육체를 향유할 뿐 아니라 그 육체를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향유한다. 감각적 쾌락은 그 쾌락을 지금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 감싸질 때 질적으로 증폭된다.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는 신비감이 동반된다. 다른 길이 아니라 그 길로 가서 살았거나, 그 열차가 아니라 다음 열차를 타서 살았다는 것. 왜 그 길로 갔으며, 왜 다른 열차를 탔는가? , 무엇 때문에, 어떤 이유로 (그들이 죽었고) 내가 죽지 않았는가? 왜 나는 구제되었는가? 왜 그 질병이 나를 빗겨갔는가? 해답이 있기 어렵다. 생존은 해명될 수 없는 현상이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그러나 실존에 선행하는 것은 생존이다.

 

악인이 사라진 자리에서, 악인과 싸우던 선인이 새로운 악의 형태들을 발명하고 실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이는 자란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럽게, 그리고 신기할 정도로 맹렬하게 자란다.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 아이의 성장을 기뻐하는 사람의 눈에 아이는 결코 존재하는 누군가, ‘실존하는 누군가가 아니다. 아이는 자라고 있다. 이 변화와 생성을 지각하고 기뻐하는 힘이 사랑이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대상을 생성으로 인지할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의 사랑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악이 그러하듯

 

진실의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그것은머지않아이다. 오직 머지않아 드러난다.

 

감염의 상상계. 잠복기까지의 기다림. 감염되었는지 감염되지 않았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의 불안. 혹은 건강검진을 받고 난 후 결과를 기다리기까지의 시간. 이들은 모두 의학적 패러다임의 연옥이다. 불안 속에 지내다가 결국 아무 이상 없습니다라는 의사의 복음과 더불어 회생하는 삶. 반복되는 부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어떤 경우 연결하고어떤 경우 연결을 끊는동물, 은둔할 줄 아는 동물이다

 

은둔기계는 겁쟁이다. 그는 지배를 두려워하고, 상처를 두려워하고, 폭력을 두려워하고, 갈등을 두려워하고, 오해를 두려워하고, 감염을 두려워하고, 관계를 두려워한다. 그는 의를 말하지 않는다. 우유부단하고,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이다. 소심하며, 잡스럽다. 그 것을 숨기지 못한다. 숨기려 하지만 언제나 쉽게 발각된다. 이 모든 약점들이 그의 힘이다.

 

은둔기계는 다소 자학적이고 다소 분열적이며 다소 미학적이다. 다소 고결하고, 다소 저열하며, 다소 비판적이고, 다소 무능력하다. 다소간의 존재, 다소간의 힘, 다소간의 소멸, 다소간의 믿음, 다소간의 희망, 다소간의 생명 ‥‥은둔기계는 다소주의자다. 그는 다쪽으로의 방향과 소쪽으로의 방행 사이에서 진동한다. ‘

 

파상은 자기 비우의 체험이다. 인간에게 케노시스는 사랑 혹은 파국 속에서만 가능하다. 양자 모두 의도, 기획, 노력, 의지를 벗어난다.

 

파상의 핵심에는 세계의 가상성과 주체의 가상성의 동시적 파괴가 있다. 파상은 단순한 환멸이나 실망이 아니다. 그것은 환멸이나 실망을 통한 자아의 변형이다.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적, 실체론적 주체의 파괴적 변형.

 

파상이후 우리는 은둔 기계가 된다. 지난 시절의 꿈이 붕괴한 자리에서 우리는 흩어진 채 다시 천천히 작동하며 은신처를 만들어 간다.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신, 그 아들과 함께 죽어가는 신의 모습은 종교라는 단어를 그 근본의 자리에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사제와 교리와 의례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의 문제다.

 

신도 자신을 비우고, 예수도 자기를 비우고, 인간도 자기를 비운다. 그 비워진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우리가 겪은 체험들은 타인과 나눌 수 없고, 그들에게 보여불 수 없으며, 오직 사적 기억에 응결된 채 남아 있다. 우리가 죽고 나면, 모든 이야기는 완벽하게 소멸할 것이다. 그 수많은 오후, 저녁, 대화, 웃음의 영상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모든 죽음에는 자발성이 개입한다. 죽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죽음을 욕망하지 않은채 죽는 자 또한 없다.

 

죽음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다만 죽음이 해결할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있을 뿐이다.

 

아름다움은 흐름의 것이다. 사라짐의 구조 속에서 나타나는 것만이 아름답다. 그것은 빛을 뿜는다. 언어 밖으로, 감각 밖으로, 기억의 밖으로

 

자신의 마음 깊숙이 들어왔던 말들만이 다인의 마음의 깊은 곳에 전달될 수 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쁜 글을 쓰지 않아야 한다. 나쁜 글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무언가를 쓰지 않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무언가를 쓰는 법을 알지 못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글을 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글쓰기 테크닉이 아니라 주체성이다. 무엇이 당신을 휘감고 있는 소용돌이인가? 당신을 통해 말하는 자들은 누구 인가?

 

좋은 글은 미문이 아니며 악문도 아니다. 그것은 아주, 지나치게, 과도하게 아름답거나 혹은 아주, 지나치게, 과도하게 추한 글이다. 핵심은 균형이 아니라 힘의 강도에 있다. 좋은 글은 움직이고, 변형시키고, 불붙이고, 흐르게 하고, 쏟아지게 하며, 뒤집는다. 좋은 글은 감응이다.

 

좋은 서평은 서평이 소개하는 책에 대한 욕망을 넘어서, 그 책이 다루는 행위나 상황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어떻게 좋은 글을 쓰느냐보다 더 어려운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무언가를 쓸 수 있느냐이다 단 한 줄이라도 쓸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문제이다. 커피의 힘으로, 국수의 힘으로, 맥주의 힘으로, 산책의 힘으로.

 

애석한 이야기지만, 정말 좋은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은 그냥 좋은 글을 쓴다. ‘좋은 글을 쓰는 법에 대한 글 따위는 쓰지 않는다.

 

트러블은 트러블을 부른다. 트러블은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더 심각한 다음 트러블이 온다. 아이러니하게도, 차후의 트러블은 앞선 트러블을 해결하기 위해 서둘러 수행하는 일에 의해 발생한다. 트러블이 왔을 때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수 있다.

 

사회는 꿈이다. 사회 속에서 어느 누구도 모방과 암시를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그것을 믿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그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당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사회는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소통이다. 대부분의 경우 소통은 마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나에게 통지 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으로 발생한다.

 

인간은 언어의 힘을 빌려 몸으로부터 의식으로 진화했고, 더 나아가서 아무런 물질적 실체도 없고, 심지어는 심리적 실체들도 없는 텅 빈 의사소통의 지속적 시스템을 발명했다. 그것이 사회다.

 

왜 소통하는가? 소통하기 위해. 누가 소통하는가? 소통이 소통한다.

 

구명의 기능이 없는 것은 단상이 아니다. 암벽등반을 하는 사람이 한 걸음 더 올라가기 위해서 붙잡아야 하는 돌출부, 그것이 없으면 더 올라갈 수 없는 어떤 손잡이.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고해야 하는 무언가. 생각의 영역에서 이런 손잡이는 단상의 형태로 주어진다. 단상이 주어져야 우리는 다음 지점으로 건널 수 있다.

 

단상은 읍소도 고발도 비판도 아첨도 신음도 엄살도 과장도 아니다. 단상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타자가 사라지면 곧바로 허물어지는 그런 언어가 아니다. 단상은 듣는 자가 아직없을 때 행해지는 말이다. 타자의 부재는 단상의 조건이다. 단상 속에서 말은 그 빈약함과 가난함 과 헐벗음 속에서도, 꼿꼿함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것이 단사의 자존심이다.

 

땅을 땅에 묻고, 숲을 숲에 묻고, 바다를 바다에 묻고, 공기를 공기에 묻고, 우리는 이제 아우라 없는 세계를 꿈꾼다. 아우라 개념이 아우라를 상실한다. 이것이 진정한 아우라의 종언이다.

 

기차나 비행기에서 말 못하는 어린애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상황의 괴로움. 울음소리가 시끄러워서가 아니라. 아이가 왜 우는지를 엄마도, 승무원도, 나도, 승객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 어려서 오직 발작적인 울음으로 밖에 불편을 표현하지 못하는 저 아이와 같은 존재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 누구도 자신이 처한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고, 딸서 누구도 자신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 동물들, 식물들, 그리고 우리 눈에 뛰지 않은 생명체들. 이모든 존재자들이 저 어린애처럼 어디선가 울부짖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여섯 번째 대 멸종이 다가오는 우리 시대, 인간의 가청권 외부에서 신음하는 중생들.

 

우리가 자연이라 부르는 대사의 아름다움, 선함, 신비스러움, 편안함, 쾌적함은 인간적 관념에 불과하다.

 

실존하는 것들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기위해 고투하고 있다. 그저 있는 듯이 보이는 나무는 광합성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고, 분열하고 있다. 바람에 버티고 있으며, 흙을 뚫고 내려가고 있다. 그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부단히 운동하고 있다. 흐르고 있고, 불타고 있고, 대립하고 있고, 버티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모든 존재는 무수한 작용과 겪음의 지속적 과정이다. 존재가 아니라 생성, 혹은 생성이다.

 

비인간 행위능력을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은 센스 없는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가령, 금연 중인 친구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낼 때, 그것을 혈중 니코틴 부족으로 금단형상을 겪는 의 짜증이 아니라. 그 친구의 인격의 짜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센스가 없다.

 

바이러스는 단백질과 지질 껍질에 싸여 있는 RNA 혹은 DNA 조각들로서,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고 물질을 합성하지도 못하는 유전단위다. 오직 숙주세포의 핵산과 단백질 합성기구를 이용하여 자신을 복제해애 하는 기생체다.

 

바이러스는 죽음도 아니고 생명도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 생명 속에 죽음을 초대함으로써 생명의 능력을 극대화시킨 존재다. 바이러스는 존재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환경에 위탁함으로써 평소에는 차라리 죽어 있기를 택한다.

 

COVID-19를 통해 우리는 바이러스라는 비인간 행위자와 대면하게 되었다 바이러스의 맹목적이고 저돌적이고 가공할 생명력, 변이와 복제의 속도, 통제하기 어려운 미세한 작용, 기존의 사회제도를 무력화시키고 재구성하는 힘, 사회적 삶에 가져온 파괴적 영향력의 폭과 깊이를 매일 느끼고 지각한다.

 

COVID-19 이후의 인간, 사물, 공간, 관계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이전에 이미 감염 가능성에 감염되어 있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에 인쇄된 글자들은 비리온virion 상태의 바이러스와 유사하다. 인지되고 이해되기 이전의 글자들은 물리적으로 현존할 뿐이다. 그것은 작용하지도 감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페이지가 펼쳐지고 어떤 의식이 그것을 읽는 순간, 글자와 뇌가 연결되는 순간, 글자는 인쇄된 특정 모양을 지닌 단순한 잉크 자국에서 의미의 활발한 파동으로 변신한다. 글자는 살아나고, 이미지와 생각과 느낌이 되어 읽는 자의 신체와 그 외부로 퍼져나간다.

 

읽는 다는 것은 숙주가 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생산한 바이러스가 읽는 의식에 기생체로 밀려들어온다. 의식 내부에서, 바이러스의 영토화가 발생하고, 새로운 기호의 배치가 생산된다. 쓴다는 것은 의식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변이다.

 

코알라와 북극곰은 연결되어 있다. 불과 물은 연결되어 있다. 폐부로 들어오는 숨과 허리케인도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어떤 첨단기구나 로봇으로도, 성령으로도, 예술적 상상으로도 절단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이다.

 

지나간 과거의 일만이 트라우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사태에 대한 트라우마 또한 존재한다. 이를 사전 트라우마라 부른다.

 

인간은 지구와 뒤엉켜버렸다. 자연은 사회와 뒤엉켜버렸다. 우리에게는 초월적 위치도, 객관적 위치도, 실험적 우치도 없다. 우리는 붙들려 있고, 침투 당했고, 피폭되었다. 이것이 21세기 파상적 리얼리티의 풍경이다. 이 냉혹하고 초현실적인 생태-존재론적 위급상태의 이름이 바로 인류세(Anthropocene).

 

탄핵 사회는 다양한 유형의 탄핵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면서 사회, 문화, 감성의 혁명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지칭한다. 탄핵 사회에서, 데스모()의 정동적 에너지는 적폐로 상징되는 구세력의 제거에 집중된다. 누가 적폐인가, 적폐인가를 판단하는 자가 주권자다.

 

탄핵의 핵심은 일반 사법절차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특권적 존재들에 대한 비상사태적 처벌과 응징이다.

 

포퓰리즘은 조건 없는 향유를 약속한다.

 

미래는 오지 않는다. 미래는 생산된다.

미래가 가장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시간은 정작 미래가 아니라 지금이다.

미래는 미래 쪽으로 뻗어간 현재라는 소용돌이의 위족이다.

내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깨닫는 내일의 진실, 오늘은 결코 알 수 없는 오직 내일만의 세계. 그 내일의 또 다른 내일의 세계가 (미래다)

미래의 미래는 예측될 수 없고, 예언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사건으로 온다.

누구도 미래의 미래에 도달할 수 없다. 상상으로도, 계시로도, 직관으로도 갈 수 없다. 그것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라.

 

냉소는 가장 저렴한 방어기재다.

 

시련은 인간을 단련시킨다. 그런데 단련이 반드시 성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종종 인격의 왜곡, 질병, 혹은 정신질환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멀리 있는 흉악범보다 주변의 저열한 인간들을 더 견디기 어려워한다. 범죄행위보다 에티켓의 실수가 더 견디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우리를 가장 분개시키는 것, 우리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사소한것이다.

 

용서란 자신에게 용서를 구해야 함에도 반성이 없는 어떤 사람을 마음의 밖으로 풀어내어 주는 행위이다. 그것은 사회적 행위가 아니며 관계의 회복이 아니다. 용서는 망각, 혹은 사회적 관계를 무화시키는 단절이다.

 

마음은 술어가 아니라 주어다. 내가 슬픈 것이 아니다. 슬픔이 나에게 작용하는 것. 슬픔이 슬픈 나를 생산하는 것. 슬픔이 나에게서 솟아나고, 슬픔이 눈빛을 흐리게 하며, 슬픔이 다른 이의 슬픔을 알아보게 하는 것.

 

사소한 실수가 때론 큰 실수보다 더 치명적이다.

(내가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할 이야기다. 명심하자.)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암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술대에 오르는 순간, 인간은 의료 시스템에 접속되고, 환원되고, 숫자가 되고, 대상이 된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독자성은 최대화된다. 그는 그 자신 외의 어떤 다른 것도 될 수 없는,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그 자신이 된다. 즉 자신의 생명(혹은 죽음)과 대면하게 된다. 이러한 급진적 수동성이 활동성보다 개체의 유일성과 더 깊은 연관을 맺는다.

 

기다림은 능동인가 수동인가.

 

사람들은 무언가를 잊기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은 대개 망각을 지연시킨다. 잊으려 애쓸수록 대상은 의식에 더 달라붙는다.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망각은 행위가 아니라. 과거에 발생했던 것이라고 나중에야 인지되는 사건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오랜 감당의 결과들이다. 나이테나 암석의 지층들. 산맥의 굴곡, 오묘한 풍경들, 압력과 충격과 침식과 풍화를 견뎌낸 것들이 보여주는 품위.

(사람의 얼굴에도 오랜 감당의 결과들이 나타난다. 사람의 몸에도 오랜 감당의 결과들이 나타나다.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 불편할 뿐이다. 아니 아름다운 것이다.-그루터기 생각)

 

가까운 사람에게 가한 상처,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대개 가까운 곳에서 온다.

 

죽음은 추상적이다. 그러나 헐벗음은 구체적이다. 죽음을 말하고 묵상하는 자는 아직 헐벗지 않았거나, 헐벗음과 싸울 힘이 있는 자다 헐벗은 사람에게 죽음보다 훨씬 더 두려운 것은 헐벗은 삶이다. 헐벗음은 시시각가 진행되는 과정이다. 학문이 민중의 감각에 결코 미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헐벗은 삶에 대한 감수성이 없기 때문이다.

 

욕망의 정화, 이것이 생명체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업이다. 정화는 헐벗음이다. 오직 헐벗음의 사건들만이 우리를 정화시킨다.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제로 대체되면서 사라진다. 소멸이 아니라 우선순위의 조정이 발생한다.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면, 이전에 그토록 절박하게 느껴졌던 문제의 위급성은 완화된다. 그것은 해결되기 전에 이미 사소해진다. 어떤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거나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것은 없다. 문제들은 변화하면서 흘러간다. 우리는 그들과 공생하며 공진화한다.

 

희망은 허망하다.

 

여행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나는 경험은 우리에게 가능한 삶을 상상하게 한다. 내가 지금의 나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 삶은 어떠했을까? (중략) 여행은 현실의 자아를 가능세계의 자아들과 연결시킨다. 여행이 끝날 때 상실된 것으로 느끼는 것은, 여행지 그 자체의 사실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여행지와 만나면서 촉발된 가능서계들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발생했거나 우리가 행했던 일들의 총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비껴갔거나 우리를 실망시킨 것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우리를 실망시킨 것들. 우리가 살 수도 있었던 가능성들. 살았다 한들 패배하고 허겁지겁 도망쳐 나왔을지 모르는 길들. 이들의 총체가 삶이라면, 우리는 여행을 통해서만 삶과 만날 수 있다.

 

언젠가 다 사라질 이 세상의 어떤 하루

 

이전은 이후에만 존재한다. 이전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전이 아니라 이후를 갖는 것이다.

이후를 가진 것들만 이전을 가질 수 있다.

이후가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은 이후가 결정한다. 그것은 우연성의 논리를 따라 전개된다. 다만, 우연한 이후의 또 다른 이후가 이 우연성을 필연으로 해석해낼 수 있다.

 

죽음이나 절필은 안식이 아니다. 비판의 시작이다. 이는 작가 뿐 아니라 학자나 연구자에게도 적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