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숙, 『할배의 탄생』, 이매진, 2016
최현숙, 『할배의 탄생』(어르신과 꼰대사이,가난한 남성성의 시원을 ~), 이매진, 2016
오래전에 소개 받은 ‘할배의 탄생’. 그동안 대출중이어서 기다리다가 잊었었다. 대출도서목록 메모장을 들쳐보다 확인해보고 오늘에야 빌렸다. 다른 책들을 밀쳐두고 먼저 읽었다. 70대 초반의 두 남성의 다양한 삶은 구술사로 엮었다. 비록 나와 몇 살의 차이는 있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오래된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부분이 많다. 김용술 할아버지가 말한 내용 중에 우리도 겪었던 일들이 많이 있지만 왠지 동년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책의 내용에 대한 서평은 내가 말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닌 것 같다.
저자 소개
저자 최현숙은 아마도 “너그 최씨네 양반 것들”에 관한 엄마의 숱한 넋두리 덕에, 다섯 살 무렵 할아버지에게 절하기가 싫었나보다. 내 첫 기억이다. 사춘기와 함께 시작된 천형 같던 액취증은 여성주의적 감수성을 갖게 해준 선물이었다. 아버지와 싸우며 모든 사회적 통념과 가치관에 의심을 품을 수 있었다. 나침반 없는 방황과 혼돈의 와중에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결혼을 통해 가난으로 들어섰고, 예수와 충돌하며 가난을 선택했다. 여성과 사랑하며 더 큰 자유를 얻었다. 학생운동은 하지 않고, 결혼과 출산 뒤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 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됐다. 2000년부터 진보 정당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과 성정치위원장을 맡았고, 진보 정치의 교착 속에 2009년 요양 노동을 선택했다. 현재 주된 관심사는 중장년 여성들과 노인들이다. 1957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환갑을 한 해 앞 둔 올해 초 원룸에서 독거 시작, 십대 후반의 꿈을 마침내 이루었다. 지은 책으로는 《천당허고 지옥이 그리 칭하가 날라나?》,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가 있다.
독서 메모
여성으로 만 58넌을 살아온 내가 70대 초반 두 남성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잃은 위험해서 매혹적이었다. 위태롭고 험한 짓은 삶에서 결정적 선택을 할 때마다 중요하게 고려한 사항이었다. 아마 첫째일 거다. 해야 할 일인지를 판단하는 게 내 바깥의 문제라면, 위태롭고 험한 짓은 내 변태적 욕망의 발동이라 원초적이다. 쉰여덟 먹은 여자가 일흔 넘은 남자에게 삶을 이야기하자고 꼬이는 일은, 나이도 어리고 여자인 내가 지는 싸움을 덤비는 거다. 맞장을 뜨자는 도전장이기도 했다.
나는 좌파다. 무슨 욕을 먹든, 어떤 오류가 있든, 나는 좌파다. 어떤 사회에서도 좌파일 테고, 그게 내가 세상을 사는 맛이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나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힘으로 만들어 내는 일을 해 왔다. 그렇지만 진보 정치의 폐색으로 나는 길을 잃었다. 정처를 잃은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고 속을 바짝 마르게 했다. 구술사 작업은 그 와중에 난데없이 만난 구멍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을 만나는 새로운 구멍을 얻었고, 주인공과 나는 새로운 ‘나들’을 찾아 나간다. 경험과 해석들을 나누며, 구멍을 뚫는다. - <들어가며> 중에서
김용술
그렇게 초등학교 마치고 열여덟에 중학교에 들어가려고 내일 모레가 입학식인데, 배다른 큰 형님이 속초를 들르신 거야, 근데 형님이 그러드라고, 이 나이에 중학교 들어가서 뭐하냐? 차라리 기술 배우는 게 낫지 않냐? 그래서 중학교를 포기하고 기술을 배웠지. 학교를 제때 못 다닌 게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해.
여자들은 그 세계를 몰라. 동물의 왕국이야, 그게. 어떡해, 끗발 없어서 군대 끌려온 놈이. 피할 수도 없고 대들 수도 없구. 그럼 이를 갈면서 버티는 거지. 입대 초기에 그러구 나니까 나중에는 맞는 게 편해 지더라구. 여긴 이러구 사는 데다 그러면서 다른 대가리만 굴리는 거야. 그래야 살잖아. 아니면 못 살아. 난 군대가 좋았어.
김용술은 여자와 만날 때 돈은 남자가 써야 하고, 헤어진 자식을 만나러 가고 싶지만 돈이라도 좀 들고 가야 자녀들에게 얼굴이 선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지론이다. “요즘 또 22사단 총기 사고 때문에 난리드만. 그게 다 요즘 애들이 약해서 그래. 하나나 둘만 낳아서 오냐오냐하고 키우고 어려움 견디는 걸 안 가르치니까. 조금만 힘들어도 그렇게 뻗치는 거야.”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공무원 사회의 부패로 지적하면서도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들을 비판하지 않았다. 자기 계급에 기반하지 않고 재벌이나 정치 지도자들의 눈높이로 세상을 보고 있다.
내가 결혼 전에 전도관에 다녔구, 애들 엄마도 거기 어린이부 교사랬잖아. 그때 신앙촌을 만들었어. 거기가 뿌리가 돼서 우리나라 사이비 종교들이 모두 나왔다고 봐. 나중에 제정신 들어서 보면 그게 다 완전 사기꾼 집단이야. 근데 공무원들 하는 짓이 그거랑 도낀개낀이라니까.
그때 정말 못된 짓 많이 했네. 늦게사 성의 희열을 알아서 돈만 있으면 계집질이었어. 유부녀나 처녀들이 아니고 술집에 몸 파는 애들 데리고 노는 거야. 허무하고 말 게 어딨어? 오히려 책임이 없으니까 편하지. 술집 기지바들이랑 하룻밤 풋사랑은 했을망정, 따로 길게 만나고 살림 차리고 그런 거는 없었어. 나중에 집사람이랑 이혼할 때랑 그다음에는 살림도 차려봤지만. 캬바레서 만난 여자들이랑도 여관은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길게 연애하고 그런 거는 없었어.
지금은 단칸 상가 방에서 가죽 수선을 하고 잠도 자는 신세지만 김용술은 호탕한 남자로 여자와 돈이 있을 때마다 신나게 놀러 다녔다. 한바탕 재미있게 잘 살은 셈이다. 김용술의 삶에서 개인사와 사회사가 부딪치는 중요한 지점은 이렇다. 속초서 양복점을 잘 운영했는데 어느 날 대기업에서 기성복을 내면서 양복점 문을 닫게 되었다. 그때가 한국에서 기성복이 유행하기 시작할 때였다. 그런데 없이 살고, 온갖 몸으로 하는 일에 익숙해 있어 IMF 외환위기의 타격은 오히려 적게 받았다.
1946년생 이영식은 가족관계가 복잡하고, 어릴 때 큰집에 양자로 간 트라우마가 컸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여자관계도 적고, 결혼도 하지 못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 지원입대해서 1년을 복무하기도 한다. 목수로 살면서 전국 곳곳을 떠돌아다닌다. 그는 성실하게 살았으나 늘 자신이 별 볼일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일수방 아까워서 니야까에서 자면서 2만 8000원을 키우면서 다시 살아온 거야, 지금까지. 제일 싸구려 돼지호박 5500원 어치로 완전 밑바닥에 굴러 떨어진 인생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거야. 그때만 해도 처자식 서울로 불러올릴 일념으로 정신 차리구 모은 거지. 유별나게 바람이 센 모퉁이가 있지. 그걸 지나오면 또 달라져. 나는 잡초야. 어디다 집어던져놔도, 어떤 구뎅이에 떨어져도, 내 힘으로 악착같이 다시 일어나.
한 놈 한 놈한테 몇 백이라도 쥐어주고 나와야지 생각하니까 최소한 돈 1000만 원은 있어야 겠더라구. 그러느라구 자꾸 늦어져. 막내 아들놈이 서른여덟이야, 77년생. 다들 결혼도 하고 자식들도 있겠지. 애들이 더 나이 먹으면 어떻게 될지. 애들 얘기는……그만합시다. 그 얘기만 하면 여엉……(다시 운다).
장기 기증이나 시신 기증은 장례비나 고독사 걱정에 선택하기도 한다. 상급 공적 기관인 대학 병원에서 의학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 때문에 선망하기도 한다. 매일 독고 노인들을 만나고 속 이야기를 나누는 나는, 시신 기증을 하려는 독거노인들을 자주 본다. 대부분 가족이 없거나 가족 관계가 끊어진 노인들, 자식들도 극빈층인 노인들이다.
김용술이 여행이라는 고상한 단어를 쓰지 않은 이유는, 돈과 시간의 여유라는 계급 문제다. 언어나 취미 생활의 고상함과 천박함의 차이는 여유의 문제이며, 여유 있는 사람들이 만든 구별 짓기다. 나는 고상하고 천박함의 구별 짓기를 지배자들이 계급과 정상성으로 약자를 차별하고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규범으로 본다.
시신 기증은 접수가 안됐다. 기족 등 법적 연고자가 없을 때는 본인 의사만으로 접수할 수 있다. 자녀가 있으면 관계가 단절됐더라도 자녀 2인이 동의해야 한다. 장기 기증이나 시신 기증은 장례비나 고독사 걱정에 선택하기도 한다. 상급 공적기관인 대학병원에서 의학발전에 기여한다는 점 때문에 선망하기도 한다. 매일 독거노인들을 만나고 속 이야기를 나눈 나는, 시신 기증을 하려는 독거노인들을 자주 본다. 대부분 가족이 없거나 가족 관계가 끊어진 노인들, 자식도 극 빈곤층인 노인들이다.
우리는 자신만의 생각과 행동으로 일상의 매순간 역사에 공조하고 가담하고 연루된다. 잘 모른다는 말이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암마적 결론은 평범한 악들의 총합이다. 아무도 무관하지 않다.
세상 안에 각자의 자리를 적확하게 찍어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를 가늠할 수 있고, 어디로 갈지를 선택할 수 있다. 시간과 우주가 아무리 무한하고 한 인생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그 무한 속에서 내 자리를 명확히 알아야 나 자신으로 세상과 공명정대하게 연루할 수 있다.
이영식
당시 나는 꿈도 없고 그냥 배불리 먹고 친구들이랑 노는 거만 알았죠. 모자르는 게 없는 여건이어서 그랬나 봐요. 아니, 모자른 건 있었는데 채울 수 없는 거였지요. 마음 붙일 곳……, 나를 챙겨주는 어머니나 집, 그런 거요.
― 152쪽
저러다 죽는구나 싶더라구요. 한참 지나서야 헬기가 와서 그 친구랑 다른 부상자들을 실어 가고 우리는 다른 헬기 타고 부대로 돌아왔어요. 결국 그 친구는 죽었대요. 헬기에서요. 그러면 정말 여러 날을 무지 힘들지요.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그런 소리가 났을까도 싶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던 소리도 계속 들리는 것 같고. 안됐지요. 제일 팔팔하고 좋을 나이인데 남의 나라 군인으로 남의 나라 전쟁에 와서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으니. 언제든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잖아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 왜 그렇게 떠돌았는지. 생각해보세요.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온 거잖아요. 그러니 몸이고 마음이고 붕 떠 있는 거예요. 내내 마음을 못 잡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 하는 일 없이 돈 떨어질 때까지 술 먹고 여자랑 놀고 그러다가는, 서울 형네도 잠깐 있었고, 동대문 근처에서 완구 노점도 하고. 그렇게 떠돌며 일도 하다가, 뭘 해도 현실감이 없고, 뭘 하고 싶지도 않고. 남자는 군대 갔다 오면 사람 된다고 하는데, 저는 사람이 안 됐어요. 등 비빌 데도 없고, 어떻게 할지 모르겠고. 목수 일은 그 한참 뒤에 시작한 거예요. 많이 떠돌다가 청주 고향 동네 형 따라서 공사장을 다니다가 목수가 된 거예요.
“저는 가난뿐 아니라 결혼 안 하거나 못 배운 사람, 이혼, 미혼모, 동성애자, 장애인, 그런 사람들을 비정상이나 뭔가 잘못된 사람이라고 보는 시선들에 맞서 싸워왔어요. 저는 그런 걸 다양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노인도 그렇고요. 가난한 가 아닌가보다 더 중요한 게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여기는 거지요. 빈곤을 게으름이나 방종으로 낙인찍고 비정상과 사회악으로 규정해서 사회에서 밀어내려는 나쁜 강자들의 생각을 가난한 사람들이 그대로 좇아가는 거지요. 어딜 봐도 탓할 게 없는 분이 그러시니 화가 나고 밉기까지 하네요.”
이런 최현숙의 말에 이영식은 이렇게 답한다. “그게 말로는 맞는 말이지요. 교과서에는 그렇게 나올 거예요. 근데 교과서 바깥세상에서는 그렇게 안 봐요. 뭐가 모자르고 잘못됐고 비정상인 걸로 받아들여요.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있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잖아요. 많이 배우고 높은 자리에 있고 힘깨나 쓰는 사람일수록 나 같은 사람을 하찮게 봐요. 그러니 그나마라도 비웃음을 안 당하고 살려면 숨길 건 숨기는 거지요.”
조치원서 방황하며 살 때 오다가다 여자들도 여럿 만났고, 같이 산 여자들도 있어요. 그중에는 매춘 생활 하는 여자도 있었고, 남편 있는 여자도 있었구요. 몸 파는 여자는 내가 그 집을 몇 번 가다 보니까 친해지게 됐고, 그러다가 눌러 살게 된 거지요. 내가 돈을 벌 때가 아니니까, 주로 여자한테 빈대 붙은 거예요. 매춘하는 여자들이 몰려 있는 동네기는 한데 지방이니까 규모가 작지요. 그런 인연이 오래가지는 않았어요. 사람이 어떤지는 더 겪어봐야 아는 건데, 그걸 알도록 길게 살지는 않았어요.
은행에 넣어놓은 5,000만 원을 어떻게 쓰고 갈지가 제일 큰 걱정 이예요. 있는 사람들이야 우스운 돈이겠지만 그게 진짜 깨끗한 돈 이예요. 순전히 몸뚱아리 하나로 모은 돈 이예요. 내 돈이라는 예기가 아니라 내 몸뚱아리라는 예기예요. 30년 노가다로 척추 측만에 망가진 무릎에 늙고 병든 몸, 그거랑 같은 거예요. 초라하지만 부끄럽지 않네요. 이젠. 몸뚱아리랑 같이 잘 놓고 가야지요.
일흔의 남자가, 다섯 살 때부터 혈육들에게 받은 아픔을 이야기하며 흐느낀다. 작정하고 잘못한 사람은 없다. 저마다 사정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곡절로 얽혔다. 다섯 살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못이 깊게 박혔고, 갈수록 깊어져서 여태껏 꺼내지도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혈육들은 다 죽고 혼자 남아서 남을 붙잡고 흐느낀다. 내가 물어봤다는 건 핑계다. 울고 싶었던 거다.
참전 용사들을 보수 할배로 취급하고 마는 진보는, 월남전 참전 용사 이영식이 자기 아버지를 혐오한 그 혐오의 다른 모습니다. 성찰 없는 자식들은 젊어 자기 부모를 혐오하다. 나이 들어 자기가 그 부모를 닮은 사실을 알고서야 울면서 그 부모를 달랑 용서해버리고는, 자식에게 미움을 받으면 살다. 죽는다. 아버지를 제대로 죽이지 못한 자식이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은, ‘너도 늙어 봐라’가 전부다.
새롭게 꾸며질 진보는 가난의 구조화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비하에 개입할 길을 먼저 찾아야 한다. 가난 한 사람은 왜 보수화되느냐는 질문에 내놓을 답도 그 언저리에 있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는 지배자를 향한 선망과 숭배로 이어진다.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비하를 깊이 살피고, 그 사람들을 옹호하되 함께 분석한 뒤, 자기 긍정의 에너지를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힘으로 모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