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이길보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문학동네, 2020

그루 터기 2021. 12. 3. 00:06

이길보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문학동네, 2020

 

선 예약자가 있어서 예약을 통해서 빌려본 책 중 하나이다. 남성으로 60여년을 살아온 나로서 생각해야할 내용이 많았다. ‘남성 중심의 사회보다 한 번 더 생각게 하는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 혹시 내가 그 중심에 서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의 행동에 대한 사과와 국가의 이익 사이의 갈등이 나를 고민케 했다. 영화<기억의 전쟁>이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을 끝낸 후 프로듀셔가 주요 제작진 모두가 여성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무대에 다 같이 서자고 했을 때 처음에는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남성이어서일까? 이 책을 읽고 난 이후 두고두고 화두로 남아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작가의 메시지처럼 해보지(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인가? 신선한 맛으로 다가왔던 카누의 맛을 오늘은 잘 느끼지 못했다. 새벽에 머리를 세게 두들긴 이 책 때문인지, 당연하다고 생각한 카누의 맛에 길들여진 때문인지. 괜히 미안해서 커피잔을 들고 나간다. 깨끗하게 씻어야지.....

 

작가 소개

 

이길보라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 사람. 농인 부모 이상국과 길경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아시아 8개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밖 공동체에서 글쓰기, 여행, 영상 제작 등을 통해 자기만의 학습을 이어나갔다. ‘홈스쿨러’ ‘탈학교 청소년같은 말이 거리에서 삶을 배우는 자신과 같은 청소년에게 맞지 않다고 판단해 로드스쿨러라는 말을 제안했고, 그 과정을 자신이 제작하고 연출한 첫 다큐멘터리 로드스쿨러에 담았다. 농인 부모의 시선으로 본 세상을 담은 장편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 소리,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의 기억을 담은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을 만들었다. 지은 책으로 길은 학교다』 『반짝이는 박수 소리』 『우리는 코다입니다(공저)가 있다

 

 

독서 메모

 

고등학생 때였나. 한 언니가 물었다.

너는 부모님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항상 자신감이 넘쳐? 왜 다 해보는 거야 무작정?”

답은 단순했다. 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했던 것뿐이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다 해봤다.

 

괜찮아, 경험예술가로서 어떻게 지속 가능한 삶을 꾸려나가야 할지 깊이 보이지 않아 막막할 대 이 말을 생각한다. 두 단어로 연결된 짧은 수어지만, 엄마 아빠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말. 그 삶의 방식을 믿었기에 선택의 순간마다. 용기 내어 직접 부딪칠 수 있었다. 이 책도 누군가에게 닿아 또 다른 모험의 씨앗이 된다면 감사할 것이다.

 

그렇게 수화언어는 나의 모어가 되었고, 부모가 속한 농사회는 삶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곳에서 수어로 옹알이를 하며 걸음마를 익혔다. 그러나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 농인 부모 아래서 태어난 자녀를 일컫는 이 단어는 농사회와 청사회를 오가면 자란 나에게 빼놓을 수 없는 정체성이 되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적당한 관심과 친절, 무엇보다 일을 똑 부러지게 할 것 같은 저 여성학장이라니. 사전 약속도 하지 않고 찾아온 이에게 마음과 시간을 내어 학교를 소개하고 입학상담까지 단번에 처리하는 저 열린 자세와 실용성! 단단히 반해 버렸다. 어쩌면 이곳에 다시 오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봐야 알 수 있으니까 무조건 가라.” 엄마다웠다. 눈으로 직접봐야만 알 수 있으니 가라. 당신들이 지닌 삶의 철학이었다.

 

스무 번째 지원자가 아닌 지원자 보라가 되는 경험. 지원자들의 경험과 앞으로의 경구 계획을 사려 깊게 살펴보면 석사과정의 새로운 구성원을 고민하는 사람들과의 만남. 내 생애의 최고의 면접이었다.

 

어머니가 손을 움직여 수어를 하는 순간, 가슴이 벅찼다.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음이 어쩌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게 기본이고 당연한 디폴트값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타인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관계 맺음의 가장 기본일 텐데 왜 그리 어렵고 힘든 것일까.

 

아니, 학장님.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세요?”

여기 사람들 다 자전거 타는데, 왜요? 총리도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는데.”

 

페미니즘은 담론화 하기 어려웠다. 다들 예술가는 진보적인 사람들이며 진정한 예술은 그런 것들을 뛰어 넘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니라고 목소리를 내면 그거 하나 못 참고 어떻게 예술가가 되느냐며 지탄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보라는 보라의 속도대로 성장해나갈 거고, 중요한 건 보라가 자신의 연구를 해나가는 거예요. 제가 아는 보라는 빠르게 습득하는 사람이니까 여기서도 굉장히 많은 걸 저 나름의 속도로 배워나가겠지요. 저는 그걸 굳게 믿어요.”

 

내가 암스테르담에 처음 왔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줬어. 그래서 정착할 수 있었던 거야. 비자 신청 시기를 놓쳐서 불법으로 체류했던 적도 있어. 언젠가는 식당에서 일을 했는데 월급을 못 받았어. 울면서 길을 걷는데 어떤 여성이 왜 우느냐며 무슨 일이냐고 묻고는 그 돈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줬어. 그렇게 여기까지 온 거야. 그때 내가 받았던 도움을 보라 너에게 돌려주는 거야. 그러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학장을 비롯한 멘토들이 하나둘씩 도착했다. ‘페미니스트언니인 조고 크리스도 오는지 궁금했다. “크리스는 학교 밖에서 만나는 자리를 편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이런 자리에는 잘 오지 않지만 오늘은 올 수도 있다고 미카가 말했다. 놀라웠다. 학교 직원이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 꼭 참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에 맡긴다는 게. 파티나 뒤풀이 참석 여부를 자기 취향과 성격에 딸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학과다웠다.

 

코다가 수어를 전문적으로 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수어를 배웠지, 전문 통역 교육을 받은 건 아니잖아. 그런 코다들에게 완벽한 수어 실력을 기대한다는 건 이상해. 중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영국에서 자라 학교를 다닌다고 바로 중국어- 영어 전문 통역사가 되는 건 아니잖아?”

 

반응도 반응이었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사진과 글이 아닌 수어라는 수단으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낯선 곳에 와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일까.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맨 처음 유럽 여행을 왔을 때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게 신기했다. 무엇을 입어도 어떻게 다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암스테르담은 그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도시였다. 남들과 비교하기보다는 각자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았다.

 

 

수어의 세상에는 그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생각과 감정이 있다. 한국음성 언어와 한국 수어, 두 언어는 한국사회를 기반으로 형성되고 만들어진 언어지만 완전히 다른 모양새를 지닌다. 음성언어와 수화언어, 청문화와 농문화, 이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으로서 두 언어와 두 문화가 가진 가능성을 찾아내고 비교하고 탐구해보는 일을 하고 싶다.

 

네델란드에는 결혼 제도 외에 파트너십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그 권리와 의무가 결혼과 동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는 세계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 한 곳이다. 그 말은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고 지지한다는 뜻이고, 그건 성별이 무엇이든 국적이 어디든 동일하게 적용됐다.

파트너의 범위는 결혼한 배우자. 등록된 파트너, 등록되지 않았지만 6개월 이상 지속해왔음을 입증할 수 있는 관계를 포함한다.

 

한국에서는 우리를 비혼 동거 커플 혹은 동거 커플 정도로 소개할 수 있을 텐데 그것보다 어떤 경계없이 그냥 파트너라고 부르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나는 그를 남자친구나 애인이 아닌 파트너로 부르기 시작했다.

 

예술학부네서 학부를 졸업하고 디자인, 문학 및 철학과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했다고 했다. 왜 또 석사과정을 하는 지 물었다. (중략) 일반적이라고 표현을 쓴 것이 부끄러웠다. 무엇이 일반적이고 일반적이지 않을 걸까. 예술 작업을 해 왔던 그는 영화를 만들고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걸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게 이유였다. 그래, 이게 진정한 배움이지.

 

습관을 바꾸는 건 쉽지 않죠. 그런데 꼭 습관을 버리고 뜯어고쳐야만 할까요? 훌륭한 습관이 있다면 그걸 활용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자신이 기존에 해왔던 방식과 방법론에는 분명히 장점이 존재해요. 그걸 취해서 관점을 바꿔 다르게 접근하면 또 다른 방법론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과 방법론을 그냥 버리려고 하는 거죠?”

 

내가 농인 부모한테서 태어나 침묵의 언어를 배우고 그 사이의 행간을 읽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어온 비장애 남성 중심의 세계로부터 밀려나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걸 작업으로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중략)

살펴보니 국민 체조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전쟁을 위한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시작되었고 이후 박정희 정권이 경제 발전을 위해 산업 역군을 육성하기 위한 용도로 계속해서 수정 및 발전되었다고 한다.

(‘비장애 남성 중심 세계의 한국사회를 말하면서도 박정희 정권이라고 말하는 또 다른 표현이 왜 마음이 편하지 않은 걸까? 노인네들은 잘 몰라라고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오버인가?)

 

여기서 산다고 꼭 이 사회에 소속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제가 여기 사는 건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고 제 일이 여기 있기 때문이지 소속감을 느껴서인 건 아니거든요. 소속감을 느끼는 대상이 꼭 사회일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직장이나 기관 혹은 어떤 공동체에 소속감을 갖게 될 수도 있죠. 보라씨 한테는 지금의 학교처럼 요.”

 

이 영화는 한국군이 참전한 베트남전쟁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이 세계의 모든 인간들은 계속 다른 형태의 전쟁을 일으키고 그 기억 속에서 살아가죠. 그럼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궁극적으로 기억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직 그 질문이 안 보여요. 그러나 희망은 이 영화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거죠.”

 

완전히 배제하지는 말고 일단 시간을 두고 들여다봅시다. 모든 촬영분과 아이디어는 다시 들여다볼 가치가 있어요. 버린다면 버리는 이유 역시 확실해야 하고요. 그걸 사용하지 않는다면 왜 사용하지 않는지 들여다봐야 해요. 거기에 답이 있을 테니까.”

그건 내가 필름아카데미에서도 매일 같이 듣는 말이었다. 결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 왜 그 선택을 했고, 어떠한 과정에 따라 그 결과물이 나왔는지를 돌아보는 일. 단순히 이건 좋고 이건 나쁘다가 아닌 어떤 촬영분에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를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것, 나는 영화<기억의 전쟁>편집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편집 과정이 어떻게 창의적이고 발전적인 과정이 될 수 있는지 배우는 중이기도 했다.

 

뒤쪽으로 길게 줄을 섰던 사람들이 차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행하던 차량의 운전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경찰 역시 그랬다. 그렇게 집회 대오는 넓게 확장된 도로로 옮겨갔다. 드디어 차도를 점거했다. 누군가는 불편할 터였지만 그들이 불편함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이 집회의 목적이었다. 여성은 단지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생 불편함을 겪어왔으니 말이다. (맞는 논리인가? 내로 남불이 정당화 되는 사회?)

 

대한민국 정부는 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야 했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보내야 했는지 질문하고 대답해야 한다. 전쟁 기간에 벌어졌던 일들을 묵인하고 은폐하는 개개인 역시 이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프로듀셔가 무대에 다 같이 서자고 제안했는데 이 영화를 만든 주요 제작진 모두가 여성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영화를 기획할 때부터 이 영화의 제작진은 영성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질문했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여성들이고 나는 엄마의 몸으로부터, 할머니의 몸으로부터 나왔는데 왜 우리는 각자의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할 수 없는지. 여태껏 발화되지 않고 몸 어딘가에 묻어둔 기억에는 이상적인 몸을 갖추기를 요구하는 국가,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 영화를 통해 나와 엄마의 몸, 할머니의 몸, 우리의 몸에 대한 여정을 계속 해 나가면서 여성의 몸과 재생산권에 대한 질문을 해 가고 싶다.

 

이 책은 단순한 유학기 혹은 헬조선 탈출기라기보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직접 다 해본 경험의 기록이다.

 

가봐야 알 수 있으니까 무조건 가라고 말했던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은 내가 언제든지 돌아갈 곳이다. 이들을 믿고, 계속 시끄럽게 해보고 말하고 부딪히고 껴안을 것이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