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귓속말(처음 내 집을 지으며 생각한 것들)』, 최준석, 아트북스, 2020
『집의 귓속말(처음 내 집을 지으며 생각한 것들)』, 최준석, 아트북스, 2020
평생 집 한 채를 지어 살아보고 죽는 게 소원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는데 이젠 그 꿈을 접어가는 중이다. 그동안은 살아오기 바빠서 집이란 그냥 살아가는 도구에 불과했었기도 하지만 간편하고 쉽게 내 집을 살 수 있는 아파트의 영향이 컸다. 아파트란 규격화되어 지어진 집을 사서 살 수밖에 없으니 내 개인적인 취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겨우 인테리어를 살짝 바꾸어 보는 것 밖에는...
이 책 저자는 건축가이면서 가족들이 살 집을 짓는 과정을 에세이로 풀었다. 내가 생각하는 건축 설계는 사뭇 이과(理科)식 생각이었는데 책을 읽어갈수록 집을 설계한다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감성적인 문제라는 걸 느꼈다. 처음 건축주와의 만남에서 어떤 집을 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먼저 알아간다는 말이 가슴에 닿는다. 앞으로 살아갈 사람의 취향이나 습관, 이상에 맞는 집을 짓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나의 과거를 반성하게 한다. 나는 이제까지 기계를 설계하면서 단 한번이라도 사용자의 감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다시 한 번 물어봐도 ‘없다.’이다. 어거지로 생각해 보면 편리성이나 안전성에 대한 내용이 조금 위안이 된다. 그것 외엔 무조건 성능 1순위가 내 설계의 첫 번째 목표였다.
내가 앞으로도 기계설계나 내 집을 새로 지을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 책을 읽지 않고 설계하거나 지은 집보다는 단연코 달라질 거라 생각된다. 벌써 보는 눈이 달라졌으니까.
저자 소개
최준석
건축가, 건축에세이스트.
집을 짓고 글 짓는 일을 한다. 용인시 보정동 주택가 골목에 자택 미생헌(未生軒)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늘 아옹다옹하는 부모님과 친구 같은 아내, 시크한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빈 땅, 빈 종이처럼 비어 있는 여백을 보면 집이든 글이든 어떻게 채울지 혼자 상상하며 즐긴다. 집 1층에 마련된 건축사사무소 나우랩(NAAULAB)에서 다양한 의뢰인들의 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서울의 건축, 좋아하세요?』 『서울 건축 만담』 『건축이 건네는 말』 등의 책을 펴냈다.
독서 메모
주말에도 출근하고 일이 바쁠 때나 바쁘지 않을 때나 늘 출근하는 사람.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입사해 삼십 년간 열심히 직장생활ㅇ르 하며 동기들과의 경쟁에서 항상 앞섰고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도 빨랐던 사람. 대기업 임원인 그는 사회적 기준으로는 성공한 인생일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회사 말고는 마음 붙일 곳이 없다는 게 고민이라니, 성공이란 무엇인지 처음으로 생각해 본다.
가족이란. 하께 해온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가족이라 부르는 사람들과 지금껏 어떤 시간을 만들어 왔는지 헤아려본다.
어떤 집이어야 할지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해본다. 부모님, 아내, 두 아이가 꿈꾸는 집에 대한 퍼즐을 하나씩 맞춰봐야 할 일이다. 건축주이자 건축가로서 집을 짓는 첫 경험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아내는 밴드 ‘언니에 이발관’이 리더였던 작가 이석원의 에세이를 빗대어 ‘보통의 집’을 만들어 보라고 농담을 던졌다. 내가 물었다. “보통의 집은 어떤 집인데” “ 음 … 그냥 따뜻하고 시원하고 튼튼하고 안전하고 밝은 집. 무섭지 않은 집. 밖에서 봤을 땐 누구라도 괜찮은 집이구나 느낄 만 한 집. 으스대거나 폼 잡는 허세가 업는 집, 집 안이 집 바깥보다 더 기분 좋은 집, 계절과 날씨를 담을 수 있는 집, 비 안 새는 집, 아이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속도로 천천히 일상을 배울 수 있는 집” “……” “ 너무 어려운 집이네”
그냥 산다고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흘려듣는 음악처럼 별생각 없이 흘러가는 삶보다는 한 곡 한 곡 관심을 기울여 음미하듯 사는 삶이 조금 더 충만하지 않을까. 그냥 사는 것과 주의 깊게 사는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 집. 아마도 그런 집이 좋은 집일 것이다.
다락에서 구름이 보이는 창문은 꽤나 새로운 경험일 것이다. 큰 달이 뜬 날, 그 창에서 망원경을 통해 달을 보여주면 서우는 아마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비를 무서워하는 선우에게 천창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끔찍한 괴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더 걸릴 뿐 선우는 지금까지 그런 것처럼 구름과 달과 비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선우와 같이 살며 배우는 것 중 하나는 소통보다는 공감이 먼저라는 것. 어디서나 누구나 소통을 말하고 있지만 소통을 하려면 공감이 먼저라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어떤 관계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감이 중요하다.
책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시간은 초고를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는 작업이다. 원고 수정, 교열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은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다. 마음에 완벽하게 흡족한 수준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하는데 까지 고치다가 어느 시점에서 멈춘다.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손을 수없이 거쳐 어느새 활자가 되어 종이에 인쇄된다. 그리고 제본과정과 유통 단계를 통해 책이 된 이야야기는 서점으로 간다. 집도 그렇다.
지금까지 해온 설계는 남의 집이었다. 남의 집을 그리는 것과 내 집을 그리는 것은 다르다. 그게 뭔지 딱 부러지게 답할 순 없지만 뭐랄까, 남의 삶은 객관적인 시선에서 조금 떨어져 바라볼 수 있으니 설계 방향을 잡을 때 기준이나 원칙이 비교적 명료하다고나 할까. 그에 반해 내 집 설계는 객관적 시각으로 떨어져서 바라보기가 힘들다. 도면을 그리다보면 그 집 안에서 생활하는 나와 내 가족들의 모습이 눈앞에 자꾸 아른거린다.
도시에는 수많은 건물이 있다 가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건물들. 건축가 자신의 집이었더라도 저렇게 했을 까 싶은 건물 들. 건축가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최선이 집주인에게 최선은 아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건축가와 군축주가 바라보는 관점의 미묘한 차이란 설명하기 참 힘든 것이겠지만
건축은 중력을 맞서지 않고 힘의 균형점을 찾아 세월을 버틴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끝나면 중력에 따라 서서히 땅으로 부서져 내린다.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실제 사는 사람 입장에서 접근한다는 건 외관을 고민할 때 ‘밖에서 어떻게 보일까’에서 출발하지 않고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말이 좀 안 되는 것처럼 들려도 외부는 내부로부터 만들어진다. 사람의 겉모습이 속마음의 결과 인 것과 마찬가지다.
흑과 백 중간 어딘가에 놓인 회색의 매력은 대충 보면 비슷해 보여도 구별할 수 있는 색감의 종류가 무궁무진하다는 데 있다. 회색 벽돌 한 방에도 수많은 색이 섞여 있다. 그날의 빛에 ᄄᆞ라 벽돌에 머금은 습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회색의 미묘함이 집의 생기를 만들 것이다. 문제는 이 벽돌 역시 다루기가 어렵다는 것. 이래저래 벽돌 작업자에게 욕을 좀 먹게 생겼다.
집짓기는 본질적으로 마음공부다. ‘집을 짓다 십 년 늙는다.’는 명언은 반은 맞고 반을 틀리다. 집짓기를 막 시작한 초반에는 심한 마음고생을 할 수도 있다. 아닌 척 하지만 집짓기를 통해 이뤄야 할 뭔가가 있고 기대하는 꿈이 있으니까. 그런 높은 기대가 집짓기를 시작한 이유이기에 포기하거나 절충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일 수밖에, 이걸 위해 시작했는데 이걸 못하면 안 짓고 말지 하는 생각이랄까. 그러다보니 초반까지는 기대치가 점점 상승하고 욕심이 단단해지면서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자세로 임하게 되고, 또 그런 각오가 오히려 마음을 힘들게 한다.
실수하지 않으려 할수록 자꾸 더 실수하게 되는 게 삶의 딜레마라면, 이는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집 하나 짓는 중에도 수많은 실수를 겪는다. 하지만 실수가 있다고 실수가 반드시 실패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실수 끝에 이룬 완성.’ 오히려 이것이 현장의 진리다.
집이라 모순 덩어리. 어쩌면 사람과 닮았다. 실수를 감춘 집짓기는 흔해도 실수 없는 집짓기란 없다. 집짓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 하나는 실수가 곧 실패가 아니라는 점이다. 실수가 모여 성공에 가까워진다.
집은 결국 사람이 짓는 것. 마음과 마음이 모여 지어진다. 아닌 건 아니라 해야 하고, 잘한 건 잘했다 해야 하고, 괜한 의심 말아야 하고, 맡겼으면 믿어야 하고, 더러는 기다리면서 지켜봐야 하고, 할 말 많지만 가려야 하고, 무엇보다 서로 동상이몽 하지 않아야 한다. 서로에게 이심전심하는 현장은 거의 좋은 집이 된다.
집짓기란 그게 어떤 집이든, 완성되고 입주한다고 끝나는 건 아니다. 집짓기의 완성은 오히려 집에 들어와 살면서 얻는 생각과 경험을 통해 마무리 되는 건 아닐까. (…) 지난 일 년 동안,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집을 지켜보며 고민했던 시간들을 떠올려 본다. 집 앞엣 매일 겸손해지던 누군가의 불안과 희망, 체념과 기대가 다시 손에 잡힐 듯하다.
누구나 살면서 자신만의 집을 한번은 짓고 싶어 한다. 구체적 계획이 있든 없든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꿈일 것이다. 음식 하나가 만들어지는 시간과 정성의 과정을 엿보면서 집 짓는 과정 역시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건축가는 균형을 잡아주는 사람이다. 집을 지으려는 사람이 작은 부분에 빠져 있을 때 전체를 보도록 환기하고 길을 찾게 해주는 안내자의 역할이다. 그러니 집을 지을 분들은 부디 마음에 맞는 건축가와 한땀한땀 뜨개질하듯 만들어가는 설계를 꼭 경험해보시길. 뜨개질이 끝날 때 즈음엔 꿈꾸던 공간과 원하는 삶이 한 점에서 만난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 점이 집이 된다. 세상에 하나뿐인 내 가족을 위한 집
원테이블 설계사무소, 단독주택 같은 소규모 건축설계로만 한정한다면 내가 들일 수 있는 정성의 한계치는 일 년에 두세 채 정도다. 중요한 원칙 하나는. 설계가 진행 중일 때 그 설계가 끝나기 전까지는 다음 집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한 집에만 온전히 열중한다. 이 집이 마지막 작업이라는 느낌으로.
좋은 건축일수록 예술적 성취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보다 구체적인 실제 생활에 훨씬 더 의미를 둔다. 건축이 다른 예술과 조금 차이가 있다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안에 담길 내용에 주력한다는 점이다. 누군가 말했듯 물이 필요한 곳에 물을 쓸 수 있게 하고, 전망이 필요한 곳에 전망을 주고, 휴식이 필요한 곳에 휴식을 만든다. 그 결과로 건축은 조성된 내부 공간에 따라 외부의 꼴을 갖추게 된다. 안과 밖의 결과가 모두 만족스러울 때 ‘쓸모 있음’을 넘는 그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때가 건축이 예술이 되는 지점이다.
창문은 풍경과 빛을 조절한다. 창문은 외벽에 표정을 만들어 외관의 모양을 결정짓는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실내로 유입되는 빛을 조절하면서 실내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한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집의 전반적인 분위기, 공간감, 외관을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 요소가 창문이라 할 수 있다.
감옥은 대부분 찬을 남쪽으로 내지 않는다. 일조량을 없애는 것 자체가 일종의 형벌이기 때문이다. 빛이 많으면 공간이 환하고 따뜻해진다. 이런 공간에 사는 사람은 덩달아 마음이 환해지고 들뜬다.
우리는 죽은 유적을 통해 살아 있는 현재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시간은 형상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것이지만, 공간을 통해 시간의 실제를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다.
살아보니, 집 안에 허옇고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하나쯤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효율성 따지고 가성비 따지는 피곤한 세상살이 속에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텅 빈 그 허공이, 나름의 치유와 위로가 되어준다.
인생은 기다리는 세월이 절반이다.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 세상과 나, 남과 나 사이의 간격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기다림 덕분에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마음대로 안 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생긴다. 그러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은 경우에 따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고, 가능하면 멀리 보고 사소한 것부터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크고 작은 실천의 축적이 있어야 성공한다. 작은 것을 쌓아가지 않고 단번에 성공하는 건 진정한 성공이 아니다. 머지않아 크게 실패하게 된다. 기다림의 크기가 한 인간이 가진 인생의 크기다.
예산이 많지 않다는 것은 매번 선택의 기로에서 둘 중 하나이거나 혹은 셋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 싸고 좋은 집이란 성능은 지키면서 선택 가능한 마감재에선 욕심을 버리는 방향으로 지어진 집을 말한다. 비용 부담을 만드는 자재와 디자인, 시공법을 초기부터 체크하는 게 중요하다. 설계에서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집은 시공 단계로 가면 부실 공사나 추가 공사비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싸고 좋은 집은 일차적으로 설계에 달려있다.
‘집’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건축주와 건축가는 ‘결혼’을 사이에 두고 맞선을 보는 남녀와 닮았다. 일반적인 거래처럼 ‘돈을 줄 테니 내 집을 그려주세요’라는 일방적인 요청만으로는 누군가의 집을 설계한다는 행위가 양측 모두에게 진심의 문제로 각인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조금 긴 시간 동안 건축주와 건축가가 서로 어떤 사람인지 서로의 삶을 이해하려는 시간이 필요하다.
집은 건축주가 꿈꾸고 있는 이미지가 중요하다. 왜 그럴까. 그 이미지에 그가 집을 짓는 이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건축주가 꿈꾸는 이미지를 따라가다 보면 지어질 집의 꼴과 격이 보인다.
가설계를 거부하는 건축가가 있다면 진짜 그런 식으로 설계해 본적이 없거나, 그런 설계가 결국 집을 망치는 길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단독주택의 단열공사는 예산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투자하는 게 맞다. 단열 성능이 좋은 집은 한파와 폭염에도 자연 형성된 잠열, 냉기를 잘 유지해 준다. 밖으로 빠지는 잠열과 냉기가 상대적으로 적다.
설계 과정은 언제나 결정의 연속이다 이럴까 저럴까 고민이 될 때는 시작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조금 돌아가더라도 과저의 실수를 정확히 잡아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해법이다. 조금 귀찮더라도 시작의 기분으로 정돈하다보면 뒤엉킨 것처럼 보이는 도면이 생각만큼 나쁘기 않고, 발전되고 있는 과정이라는 점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도면 다시 그리기는 청소다. (인생사 모든 일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볕과 마당이 갖고 싶어 단독주택을 지으려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볕과 마당이 허용되지 않는 현실에서 이제 우리가 정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은 집을 채우고 남는 자리를 마당으로 보지 않고, 마당을 먼저 설정하고 남는 공간에 집을 채우는 방법이었다.
그를 위해 서너 평이 작은 공간을 도면에 그려 넣었다. 늦은 밤이면 이나 이른 새벽, 2층 복도 끝에 연결된 발코니로 나가 작은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누구에게는 기도실이 되고 누구에게는 소박한 사랑방이며, 누구에게는 비밀의 서재가 된다. 우리에게는 종종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나와 만날 공간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냄새가 있는 공간이다.
일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집이 멋지십니다.” “설계가 좋습니다.” 같은 칭찬이 아니라 “소장님 만나서 다행이에요” “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다. 일을 떠나 사람과 사람으로서, 그 존재를 자체로서의 고마움과 신뢰가 오가는 순간이랄까.(…) 집 지으면서 ‘그래도 저사람이 있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나마 행복한 집짓기가 아닐까. (나는 내가 설계한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때 가장 행복했을까? 지금까지 내가 설계해서 공급한 설비을 사용해 보고 행복해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별로 없는 것 같다. 대부분 ‘뭐가 불편하다’, ‘뭐가 나쁘다.’ 이런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기계가 불편하고 나쁜 것도 있었겠지만 사용자의 감성에 접근하지 못한 부분이 더 크지 않을까 생각 된다. )
담양 소쇄원에 가면 계곡과 지형을 따라 흐르는 오곡문이 있다. 오곡문은 코벽으로 만든 담장 일부를 자연스럽게 터놓음으로써 계곡에서 흐르는 물길을 열고 사람도 드나들게 한다. 집이 놓인 원래 자연환경을 중시하여 문의 기능보다는 집 안과 밖 사이에서 문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의미를 곱씹을 수 있는 문이다. 우리에게 문은 무엇일까. 닫지 않아도 될 것까지 모조리 벽처럼 막으며 살고 있는 집이 늘고 있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Y는 집은 사는(live) 곳이지 사는 (buy)게 아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글런데 실천이 쉽지 않아 보였다. (…) 어떤 사람에게는 사고 싶은 집과 살고 싶은 집이 따로 있다. 느닷없이 욕심과 걱정이 언제나 그를 혼란에 빠뜨려 두 개의 가치가 하나로 모이는 걸 막는다.
단독 주택이란 아파트와는 다른 그 가족만의 자긍 우주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공간적으로 그 가족이 원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아파트의 천장 높이는 2.35m 이다. 전국의 모든 아파트는 거의 같은 높이로 지어진다. 깊이와 높이 개념이 없는 납작하고 평행한 공간에서 수십 년을 살다 단독주택을 지으면, 1.5미터에서 8.5미터까지의 천장 높이를 통해 다양한 공간의 깊이와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 큰 묘미다.
살아봐야 알게 되는 예상하지 못한 경험과 의외성, 그것이 건축의 묘미다.
남의 집을 설계하면서 실험할 수 없으니 일차적 실험의 대상은 내 집이라는 마음으로 집을 지었고 살다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조금씩 바꿔나가려 생각하고 있다. 자잘한 하자를 생각한 대로 고치고 손보는 과정을 통해 저절로 얻는 통찰과 반성. 살다보면 잘못을 고치면서 배우는 것이 참 만다. (집 뿐 아니라 인생이 다 그렇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면적이 아니라 공간이다. 방 하나의 크기, 숫자로 표기된 아파트 모델하우스 관점의 면적 개념에서 벗어나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분위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답변으로 만들어진 나만의 공간을 갖추는 것. 그것이 단독주택의 본질이다.
“설계는 건축주와 건축가가 만나서 대화하는 일입니다. 대화의 공용어는 도면이고 모형이고요. 집에 살아야 할 사람의 마음과 건축가의 생각이 서로 공감할 시간이 피요하기 때문이지요. 많은 대화를 나누는 일이 좋은 집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집 짓는 과정에서 건축주와 건축가가 같은 목표를 갖는 협력자로서 나눈 대화는 중요합니다.”
시간은 공간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의 장면이 된다. 그 장면을 담는 그릇이,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