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박경철, 리더스북, 2011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박경철, 리더스북, 2011
초판이 인쇄되어 17년이 지난 지금 이제야 그 유명한 이 책을 읽었다. 그동안 잊고 있던 책이었는데 우연히 도서관 1층의 무료 나눔 책장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누군가가 가지고 있던 책을 ‘나눔’한 것이다. (나도 다시 그 장소에 나눔 하려고 한다. 책을 소유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읽는 것으로 만족하니까)
책을 읽으면서 의사로서의 삶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만 한 삶을 아닐 거라는 생각과 힘들지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일 거라는 두 가지 생각이 겹쳐진다. 때론 황당하기도, 때론 분노하기도, 때론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모습에서 의사로서의 짊어진 무게를 느낀다. 아마도 다른 직업을 가진 우리도 같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도 아직까지 ‘시신기능’에 서약하지 못했다. 마음은 있으나 용기가 없다. 머리로는 가능한데 가슴으로는 아직이다. 내 선택으로 많은 분들이 의사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행복한 일이나, 자식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용기도 부족하고.
20여 년 전 고등학교 1학년의 조카를 떠나보내면서 장기기증에 서명을 해 본 경험이 있다. 조카는 먼저 천당으로 갔겠지만, 나머지 장기는 몇 몇 분에게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을 것이다. 또 몇 년 전에 장기 이식 수술을 받고 유명을 달리한 아주 가까운 친척이 있다. 오랫동안 이식을 기다려왔고 수술도 잘 됐는데. 수술 후 관리에 문제가 생겨 의료사고로 젊은 생을 마감했다. 인간 능력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지나간 일은 다 인생의 순리라고 생각한다.
책속에는 다양한 의료 경험과 죽음이나 완치에 대한 내용이 있다. 모든 글들이 가슴에 와 닿지는 않지만 의사로서의 힘든 과정을 조금은 이해가 될 수 있었다. 모든 의료종사자님들께 감사를 표한다.
이 책을 기회로 박경철 시골의사님의 다른 책들도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저자 소개
박경철
외과전문의이자 유명작가이며 경제전문가. 대학 시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를 읽고 깊은 충격을 받아, 카잔차키스가 평생의 영웅으로 삼았던 니체, 단테, 베르그송을 탐독했으며, 이를 통해 인문학적 소양의 기초를 다졌다. 이후 대학에서 전공한 의학과 무관한 경제학을 독학했고, 패러다임의 전환기마다 한국경제에 대한 전망을 발표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그로 인해 증권업계 인사가 아님에도 한국거래소와 증권사 사장단이 수여하는 제1회 증권선물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6년에는 의사로서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을 발표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드라마 [뉴하트]의 소재가 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후 집필한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은 출간과 동시에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즈음 연간 200~300회씩 행해진 그의 강연과 칼럼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으면서 후일 ‘청춘콘서트’로 이어졌고,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청춘콘서트’는 2012년 이후 우리 사회에 중요한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되기도 했다. 그 외 공익단체 및 기업의 이사회에 참여해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그리스 문명 기행을 하면서 문명 탐험서 『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출간하여 르네상스적 인간으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독서 메모
그곳(중환자실)은 또 하루에도 두어 명씩 심장마비가 나기도 하고 즉석에서 심폐소생술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중환자실 침대 위에서 바로 가슴이나 복구가 절개되기도 하는 곳이다. 매일 매일 누군가가 사망하고 또 누군가가 그 자리로 새로 들어오는, 그런 곳에 누워 있는 환자의 마음은 어떨까.
그날 저녁에 환자가 필담을 요청했다. 나는 유언을 남기시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가족들을 중환자실 내로 모두 불렀다. 그런데 인공호흡기가 달린 채 환자가 팔을 움직여 겨우 힘들게 쓴 글자는 ‘시신기증’이라는 네 글자였다. 주변에 있던 의사들과 간호사, 그리고 목사님 내외까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쓴 네 글자에 담긴 깊은 사랑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녀의 뜻을 온전히 받드는 것뿐이었다. 외상으로 상태가 좋지 않아 다른 장기기증은 불가능했지만, 늘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보던 소중한 눈은 다른 누군가의 눈이 되어 지금 이 시간에도 세상을 여는 소중한 차이 되어주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인턴 선생이 가진 종파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의사로서 수혈 문제와 국가의 일원으로서 군복무 문제 등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그 사람들이 지키려는 원리주의적인 삶은 어떤 면에서는 현재 타락한 기성교회에 대한 모범이 될 수도 있다. (…) 환자가 위험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사로서 수혈거부라는 종교적 신념과 맞닥뜨릴 때 의사는 과연 무엇을 먼저 존중해야 할까. 참 난처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수술과정은 늘 어렵고 힘들지만 수술 후 회복한 환자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대부분 그 힘듦이 상쇄되곤 한다. 아마도 그렇기에 맹리 같이 반복되는 그 피 마르는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리라.
응급실에서는 늘 수많은 사람들이 삶과 죽음이 교차된다. 그곳에 있으면 그 동안 내가 살리지 못했던 환자들에 대한 안타까운 기억이 유독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온다.
가끔 응급실에서 이미 생명이 떠난 환자를 맞이하면서 혹은 방금 숨을 거둔 환자를 뒤로 하고 돌아서서 손을 씻으면서, 내 심장 속에 어느덧 그렇게 길들여진 차가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문득 깨달을 때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타인의 죽음을 생각하고 돌아보기를 반복하곤 했다.
그날 내가 보았던 남자의 눈물은 부성애의 슬픈 향기가 느껴지는 그런 눈물이었다.
의사들은 환자들의 죽음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탓에 종종 타인의 죽음에 무뎌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무뎌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바로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어린 생명들이 떠났을 때다.
수술대 앞에 섰을 때 손이 떨리면 그것은 의사로서 환자를 놓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럴 때는 무엇보다 나를 추슬러야 한다. 의사가 무너지면 환자는 바로 죽음의 경계를 넘어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노인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특히 시골에서 바로 보는 노인 문제는 도시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특히 치매노인들의 문제는 그 심각성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유서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마음에만 담고 있다니 터져버릴 것 같아서…… 함께 있는 것 말고는 욕심내본 게 없어요. 돈 따위는 다 필요 없어요. 오늘을 행복하게 최선을 다하면서 열심히 살아가세요. 내일은 아무도 모르거든요. 오늘만 죽을힘을 다해 행복해지세요. 오늘만 …….” 고 오길영 상사 부인의 유서 중에서
유서를 남기고 떠나간 분들의 간절함이 비수처럼 내 가슴을 파고든다. 나는 혹은 우리는 누군가가 그렇게 사랑하는 누군가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증오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이 혹시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사람은 아닐까?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결국 돌아보면 온 세상은 사랑인 것을, 우리는 왜 그렇게 힘들게 누구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지독한 한 시절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지독함도 시간이 흐른 어느 순간엔 아름답게 변하곤 한다. 50년을 뛰어넘은 어느 노부부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그제야 진우 씨는 문둥이의 아들이라는, 아내는 문둥이의 며느리라는, 아이들은 문둥이의 손자라는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진우 씨를 보면서 인생을 배웠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당당하게 맞선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륜이 무너진 시대에 정말 사람답게 살고자 노력한 사람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물음에 당당하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을 향해 이렇게 소리친 것이다. “그래, 나는 문둥이 아들이다! 이 진짜 문둥이들아!”
사람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수많은 약들. 하지만 이 약들 중에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다. 아무리 의사라도 마음의 병까지는 칠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참 안타까울 때가 있다.
가난 때문에 목숨을 끊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불편해진다. 누추한 세상을 버리는 그 마지막 마음을 엿보다 들킨 사람처럼 나는 어느덧 죄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한쪽 다리가 절단된 아름다운 숙녀의 미니스커트, 나는 그것으로 그녀가 드디어 가혹한 운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가혹하고 잔인한 운명과 정면으로 맞서 당당하게 이긴 것이었다. 이 세상에 어떤 아름다움이 있어 그녀의 한쪽 다리만큼 아름다운 감동을 줄 것이며, 어떤 강인한 자가 있어 그녀의 승리보다 더 단단한 승리를 자랑할 수 있을 것인가. 인주 씨의 미니스커트. 그것은 작은 시련 앞에서도 쉽게 나약해지고 무력하게 넘어지고 마는 우리들에게 웅변보다 더 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군가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철렁해질 때가 있다. 가슴 아팠던 기억들은 잠시 잊은 듯해도 그 자국까지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라는 명제는 과연 참일까?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일 때가 많다.
방송국에서도 그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그것이 누군가의 마지막 희망과 삶을 빼앗는 일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날 출연했던 대학 교수도 자신이 한 이야기가 연기의 사슬이 되어 누군가의 생목숨을 빼앗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왜 걱정을 하느냐, 당신이 여태까지 말을 안 들어서 그렇지 치료만 잘하면 이 병은 충분히 나을 수 있는 병이다. 쉬면서 치료하면 완치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된다. 충분히 희망이 있다. 왜 두려워하느냐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고통스러운 전쟁이 점점 힘들고 지친다. 그래서 인지 요즘에 들어와서는 가운을 벗는 상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
환자들을 괴롭히는 병마들과 씨름 하는 것도 임이 드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의료보험제도조차 도움이 되어주지 않는다. 우리나라 의료행정시스템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할 때가 많다.
생각해 보면 병원만큼 인간의 정이 많이 오가는 곳도 없다. 수술실에선 의사와 환자이지만, 회복 후에는 따뜻한 이웃이요. 친구가 되어 주는 이들 때문이다.
진료를 하다보면 환자들 표정이 가지각색이다. 그런데 고학력에 생활수준이 높을수록 표정이 심각하고, 오히려 소외되고 어려운 분들이 병중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바람이 제법 찬 가을 아침에 일자리가 없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분들의 모습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운다.(…) 과연 행복의 총량은 어느 쪽이 더 많은가?
인생에는 오묘한 인과의 질서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금도 나는 보이지 않는 그 오묘한 질서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는 게 법문’ 이라는 그 말씀이 바로 ‘법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