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상실수업(인생수업 두 번째 가르침)(김소향 옮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이레, 2007

그루 터기 2022. 8. 7. 09:50

 

상실수업(인생수업 두 번째 가르침)(김소향 옮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이레, 2007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옮긴이 김소향

 

독서메모

 

자신이 쓴 글에 심취되어 밤을 지새울 수 없다면 그 글은 결코 다른 누군가의 밤을 지새우게 할 수 없다. 는 속담이 있다. 마찬가지로, 이글이 진정 우리를 울게 하지 못한다면 이 책은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을 것이다.

 

슬픔을 치유하는 과정이라면 절망은 그 과정에서 꼭 지나쳐야 하는 단계 중 하나이다. 만일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인식하거나 친구들로부터 자신이 낙담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당신의 첫 번째 반응은 그것을 부정하며 빠져나올 방법을 모색한다. 절망에서 빠져나오려는 길을 찾는 것은 마치 태풍의 소용돌이 안에서 탈출구가 없음을 두려워하며 바다 위를 배회하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완전히 껴안을 수는 없지만, 개인적이고 특별한 수용의 길로 자신을 안내해줄 갈등과 싸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항상 존재한다. 수용한다는 것은 안좋은 날보다 좋은 날을 보내게 된다는 의미이다. 감정을 부정하는 대신, 움직이고, 변화하고, 성장하고 그리고 발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요구에 귀 기울이라.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하므로 그들의 삶에 참여하게 된다. 우정과 관계 속에 자신을 투자한다.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기 시작한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슬픔에게 충분한 시간을 배려할 때만 가능하다.

 

정작 피해야만 하는 일은, 쏟아내어야 할 눈물이 충분히 빠져나오기 전에 울음을 억지로 멈추는 것이다. 30분 동안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말라. 눈물이 전부 짜져나오게 두라. 그러면 스스로 멈출 것이다.

 

환영이 실제 현실이든 아니든 치유의 과정과는 관련이 없다. 슬픔에 잠긴 당신을 위로하고 지켜주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그 경험을 의심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주요 핵심을 놓친 것이며 선물은 놓친 것과 같다.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당신이 남겨졌다는 것에 대해 의미를 잃었는가? 당신이 굳이 남겨졌는지 이유를 알고 싶은가? 신과 우주만이 그 정답을 얘기해주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만은 있다. 당신들은 모두 살기 위해남겨졌다는 사실이다.

 

착하고 바르게 살면 그 대가로 고통 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사랑을 알아간다는 것은 사랑할 권리를 조용히 내려놓은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러니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모두 사후 세계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궁금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대답에 가치를 둔다. 하지만 사실 질문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실로 중요한 것은 사랑한 이가 어떻게든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남겨진 이가 그 때문에 큰 위로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제 됐다. 그만 하면 됐다. 이제 당신에게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돌아가서 지산과 접촉하고, 스스로 어떤 감정 상태에 빠져 있는지 눈여겨볼 일이다. 몸의 속도를 늦추고, 오직 몸이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라.

 

슬픔에 종결이 없다는 것을 알라. 수시로 그와 관련된 기면일이 돌아올 때마다. 그간 네가 힘들여 꼭꼭 눌러두었던 슬픔은 여지없이 또 분출 될거야. 그러나 기억해. 어떤 경험을 하든지 그 안에는 늘상 슬픔이 웅크린 채 숨어 있지. 애석하게도 , 죽음에는 쉬어가는 기념일이 단 하루도 생길 수 없거든

 

인간은 자신이 할 만큼 최선을 다했다는 걸 확인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에 대해 종종 언급하게 되지만,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다.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결국 삶이 지금까지 그 자체만으로 완성되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슬픔은 밖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고통과 슬픔은 오직 표현할 때만이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떠나간 이에게 편지를 쓰라. 당신이 얼마나 한심하게 지내고 있으며, 얼마나 독하게 잘 참아내고 있는지를, 그리고 단 하루도 당신을 잊은 적 없다는 고백을 쏟아 보라.

 

잘려진 나무는 육체적 충격을 경험한다. 그것으로 나무의 삶이 완전히 끝났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곳에서 작은 생명의 새싹이 돋아나온다. 아주 서서히 그리고 조용하게

 

수많은 예고와 준비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견디기 어려운 사건이며, 갑작스러운 경우에는 그것만의 복잡한 심리가 따로 있다. 주위의 모든 자연 만물 속에서 수많은 시작과 끝을 목격하기에 우리 인간 역시 시작과 끝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만물에는 계절과 때가 있음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땅 위로 수명이 다한 갈색 낙엽이 떨어지는 그 시간만을 가을이라고 여긴다면 세상에서 평화를 찾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푸른 잎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을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당신이 살아가면서 무언가 잃어갈 것들에 대해 정년 두려운가? 하지만 우리네 삶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반복 속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상실이란 모두 끝났다.’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의 증거가 된다.

 

슬픔의 힘은 희한하게도 슬픔을 치료하는 자체의 효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아직도 슬픔의 초기에 있을 수 있고, 어쩌면 상실을 미리 예감하는 감정에서 다시 시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그것은 들쑥날쑥한 감정의 주기를 끝마친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걸 말끔히 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상실의 고통이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탄생과 죽음의 주기를 완전히 따르므로 삶을 충만하게 경험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상실을 건져내고 살아남았다. 슬픔과 애도의 힘이 우리를 치유하고, 잃었던 그 사람과 함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그것이 바로 슬픔의 은총이며, 슬픔의 기적이다. 그것이 곧 슬픔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