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쓰고 있네』, 황서미, 씽크스마트, 2021
2020 문학나눔 선정도서 목록에서 찾은 책이다. 큰 글자책으로도 나와 있다.
작가 소개
황서미
1999년, 조그마한 광고 대행사 카피라이터로 처음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강산이 대충 두 번이 바뀌는 동안 직업이 수없이 바뀌었고 현재는 이름 없는 고스트 라이터로 작업 활동을 하다 드디어 앞에다가 떡 하니 이름을 걸고 낸 첫 에세이가 나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작품 활동’을 하고 싶은 것이 바람이며, 건강하게 오랫동안 ‘세상에 돈 되는 글’은 다 쓰며 살기를 소망한다.
독서 메모
인생의 현재 스코어에서, 나는 남편이 다섯 명이다. 다섯 번째 남편이랑 지금 8년째 살고 있다. 이 정도면 아주 오래 살았다. 예전 네 번의 결혼 생활은 모두 3년 이내에 종을 쳤으니 꽤 좋은 성적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 사는 것하고 똑같다. 현 남편직을 수행 중인 이와도 중간에 헤어지네 마네, 산으로 가고 싶네, 별로 가고 싶네, 난장을 치기는 했다. 이렇게 살아온 8년이다. 아, 오래도 살았다.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말하자면 다들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그런 미모의 여배우도 아니고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사람인데, 어쩌자고 무슨 결혼을 그렇게 많이 했나 다들 궁금해한다. 내 앞에서 얘기하지는 못해도 나에 대한 의혹들은 하나씩 있다. 내가 그것을 왜 모르겠나.
어떤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다. 호르몬을 공부하다 보면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해’란 말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고. 인간 신체의 구조상 그 ‘영원’이란 말이 성립될 수가 없다고 한다. 세포는 날마다 탈락과 재생을 반복한다. 우리 몸에서 분출되는 호르몬도 항상 일정할 리 만무하다.
어느 날 함께 카페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틱 증세가 아주 심하게 나타나는 바람에 물컵을 쳐서 깨뜨렸다. 쨍그랑 소리가 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이 친구한테 모두 집중됐다. 순간 그의 얼굴을 바라보니 ‘읍읍’ 하며 뭔가 참는 것 같았다. 화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창피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단순히 얼굴로 순식간에 피가 몰리는 느낌에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가자!” 하면서 앞서서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가고 있는데, 못 참겠는지 그가 결국 뿜었다. “꺼억!! 씨발 조오또오오오!” 일순간 카페가 얼어붙었다. 처연하게 아름다운 영화 [엘비라 마디간]에서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누군가는 슬로모션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그런데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지. 너무나 아름답고 맑은 날씨 속에 배경음악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멈췄는데, 우리 둘만 그 정적을 뚫고 나가는 듯했다. 사랑은 끝났다.
세상에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결혼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결혼 생활은 열정은 제거되고 생활만 남는다.
그가 한국에서 무슨 이유로든 비행기를 타지 못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마자 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리도 너무 아프고, 목도 말라 하카타역 초입 편의점에서 청포도 맛 탄산수를 사 들고 근처 의자에 앉았다. 신호음이 간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왜 이 사람한테 전화하시는 거예요? 어디세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 나는 전화를 끊고, 눈을 잔뜩 찡그리고는 다음 날 유후인 가는 기차 시간표를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날 떠났다.
(이글을 쓴 것이 2019년 여름인데, 2020년 봄, 하고 많은 훈련소 중에서 정확히 22사단 이 부대 훈련소로 아들이 입대했다. 물론 그와 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곰신 한번 아주 제대로 신을 것 같다. 지금은 벗었지만 …)
하지만 아이는 엄마인 나를 포함한 어른들이 맘대로 결정을 내린 후, 몇 번 만나본 적도 없는 부산의 친할머니댁으로 보내졌다. 자기의 거처를 정하는데에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못하는 고작 다섯 살 꼬맹이, 어른들은 이렇게 하루하루 삶이 힘들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내 인생도 어른들이 맘대로 결정해서 힘들었던 것 같은데…. 알면서도 어리석은 일을 기어코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아이는 어릴 때의 엄마 모습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계셨다는 것은 알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냥 모르는 어른들 만나는 것 같다고 한다. 다섯 살 꼬마가 갑자기 너무 어른이 되어 돌아왔다. 나도 이 청년이 누군가 싶다. 우리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잘 왔다.
결혼 생활은 전혀 다른 사람의 유전자와 문화를 맞추는 지난한 과정이다. 설령 동거를 오래 했더라도 결혼이라는 제도의 그물이 씌워지면 전에는 알지 못했던 또 다른 부담이 생겨버린다. 거의 골수 이식에 맞먹는 힘든 과정을 거치는데, 둘 중 누구 하나는 꼭 참거나 희생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첨예하게 겨루는 꼴이 되고야 만다.
“저 눈도 이상해요. 맞아서 이런 건지 아니면 우연히 오늘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요.” “안과 연결해드릴게요.” 내 오른쪽 눈은 그날 이후 평생 맑은 하늘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갈비뼈는 두 대가 부러졌는데 깁스도 못 하고, 손 쓸 방도도 없다는 이야기만 듣고 돌아왔다. 어두컴컴한 집에 혼자 앉아 있으려니 별 느낌 없이 움직이던 ‘내 소유’의 몸이 그날따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생소했다. 내 몸은 내 것이다. 다른 이가 훼손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와서 때린다고 해서 얼른 때리고 가라고 등 대주는 일은 내 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결국 오른쪽 눈의 가벼운 장애와 갈비뼈 박살, 그리고 각 대봉투 2개를 꽉 채운 진료 기록지와 진단서만 남기고 두 번째 결혼 생활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햇수로 3년에 걸쳐 간간이 얻어맞았다. 그런데 참 바보 같은 것이, 그렇게 맞고도 나마저도 내가 다른 여자들보다 기가 세서,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해서 맞는 것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명백한 결론은 단 하나다. 어떠한 경우라도 맞으면 안 된다. 맞을 만한 사람을 세상에 아무도 없다. 때려서는 더 안 된다. 다 알고 있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사람을 왜 때리나. 왜.
수녀원의 아침은 5시에 시작된다. 수녀원에 우아한 성가가 기상송으로 울려 퍼지면 후다닥 세면장으로 질주한다. 누가 먼저 수도꼭지를 맡느냐가 관건. 운 좋게 먼저 세수를 마친 수녀님들은 얼굴에 로션만 대충 바르고 바로 새벽 미사를 드리러 성당으로 또 질주한다. 우사인 볼트가 따로 없다. 늦으면 선생 수녀님과 할머니 수녀님들에게 혼쭐이 나기 때문이다.
할머니 수녀님들은 50년 가까이 수녀원에서 사신 분들인데, 그만큼 이분들의 인격이 모두 고매하고 성녀와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평생을 사회생활 한번 안 하고 여자들 사이에 갇혀 사신 분들이라 의외로 괴짜가 많다. 게다가 나이 들어 새벽잠이 없어지니 성당에는 그렇게 일찍도 나와 앉아 계신다. 십자가 앞에서 눈을 감고 묵상하시나 보면 어떤 분은 사방으로 고개를 풍차 돌리며 주무시기도 하고, 또 다른 분은 실눈 뜨고 누가 일찍 미사에 나오나 감시하기도 한다.
어떤 할머니 수녀님은 화장실에서 화분을 막 갖다 엎으시고 흙을 파내고 계셨다.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영성에 방해가 된다고, 하느님과의 대화시간을 식물이 뺏는 것 같아서 갖다 버리시는 거란다. 식물도 우리 인간과 분류는 다를지언정 생명체인데 왜 그러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약간의 치매 증상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여하튼 이런 일부 할머니 수녀님들께 잘못 찍히면 수녀원 생활이 고달파진다.
지금도 나는 그 맛이 그리워, 미역국을 끓이면 가끔 그렇게 달걀을 숟가락으로 다각다각 깨서 노란 국물을 만들어 먹는다.
스물 갓 넘은 수녀가 꼴랑 수박 하난 가지고 싸우고 있는 나이 지극한 선배 수녀님들을 바라봤을 때 어떤 생각을 했겠나. 물론 그때 먹은 나이만큼 곱절을 더 살아보니, 그 지긋한 수녀님들의 밥상머리싸움은 단지 수박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가 수박으로 터진 것뿐이지, 오랜 시작 그 뒤에 숨어서 쌓인 그녀들의 반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수녀원에 와서 농사짓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뒤늦게 알게 된 것이 하나있다. 내가 농사에 엄청나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낫질도 기막히게 잘한다. 목장갑 폼 나게 끼고 말이다. 나만 지나갔다 하면 그 밭은 싹 다 깔끔하게 갈린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수산나 수녀가 최면 치료를 받았는데, 하필이면 최면에 걸린 와중에 나와 로마나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밤에 술 마시고 나는 주지도 않고, 저들끼리만 얘기하고 나는 끼워주지도 않고 ….” 이러면서 펑펑 울더란다.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최면을 통해 밝혀진 대 침묵 어긴 죄, 포도주 훔쳐 마신 죄, 게다가 같은 방 수녀를 따돌린 죄까지 얹어져서 나는 응당의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영원히 머무를 줄만 알았던 수녀원에서 나왔고, 먼 훗날 내 아이들이 차례차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세상일은 참 신비롭다.
그래도 그 더러웠던 광고 대행사에서 생활하면서 내내 돈 봉투만 들고 다닌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고심 끝에 내놓은 최대 히트작 카피가 있다. 당시 대한민국 탈모인들의 심정을 정확히 꿰뚫어 어루만져 주었던 모 탈모 치료제의 헤드 카피! 탈모는 병이 아닙니다!
그날 오후 인터넷 쇼핑을 무척 좋아하던, 같이 일하던 언니가 나에게 뜯지도 않은 박스에서 새 바지를 건네 주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화장실에서 바지를 갈아입으면서 깨달았다. 사장의 마인드로 일을 하되 사장 같이 일하면 안 된다는 것을.
면세점 비즈니스에 몸담았던 짧은 2년 여간, 사장님께 비즈니스 매너와 자기 관리를 배웠다. 그리고 사장님의 최대 장점이었던, 사업상 미팅을 할 때 어떻게 하면 최대한 내 쪽으로 유리하게 협상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는지 배웠다.
아, 이 센스 있는 놈, ‘10호 닭’이라는 별명을 가진 치킨 대학 동기 녀석이 보낸 것이다. 팔다리가 딱 조리하면 제일 맛있는 사이즈인 생닭 10호 같이 다부진 녀석. 지옥의 닭회사. 그러나 지금은 내 가장 큰 저력이 되었다. 덕분에 어떤 회사를 들어가도 버틸 것만 같다.
일단 나는 이별의 아픔을 잘 모른다. 이혼의 아픔만 알지. 사랑하는 족족 결혼을 해 버린지라. 나의 사랑은 바로 현실로 직행해 버렸다. 즉 사랑에 대한 판타지는 싹 발라지고 뼈다귀만 남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도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라든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슬픔을 소재로 하는 최루성 멜로에는 손도 못 댄다. 사랑이란 소재가 내게 다가오면 전격 생활 밀착형 코미디물로 직전직하, 탈바꿈되기 때문이다.
수십에서 수백 편의 야설을 다듬으면서 처음에는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도저히 작업이 안 돼 중단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야설 교정 알파고가 되어갔다. 제아무리 야한 소설이 와도 오타, 비문들만 눈에 들어오는 경지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살짝 틀어서 더 야한 문장으로 바꿔놓기도 했다. 계절이 몇 번 지난 후, 야설을 서비스하던 플랫폼이 문을 닫게 되어 나의 야설 교정 작업도 막을 내렸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경이롭다. 그 수많은, 야하기 그지없는 디테일과 상상력은 다 어디서 왔을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창조할 수 없는 마의 영역이다. 지금도 머릿속에 춤추고 있는 오조 오억 개의 야한 이야기를 컴퓨터 자판으로 만들어내고 있을 전국 각지의 수많은 야설 작가님들께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그랬더니 그 과묵한 소년이 그때부터 방언이 터졌다. “아, 얼탱 없어요. 어제도 저보고 시재 점검을 하라는 거예요. 진짜 얼탱……. 2시간 전에 점검한 걸 불안하다고 하고 또 하고, 저 창고에 가 있는데 언제 오냐고 전화하고. 제가 짜증을 잘 안 내는데 어제는 한번 냈어요. 퇴근 15분 전인데……. 아, 존나 얼탱…….” 애야, 너 나랑 멜론 깎으면서도 계속 짜증냈단다.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계신 선생님들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나처럼 아이들 보육 자격증도 없이 영어만 나불나불할 줄 아는 사람이 영어 유치원 선생님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아이들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선생님인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아이들은 어디를 가든 낮에도 밤에도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부적격자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반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나만 그랬을까? 수업이 끝나 교무실에 앉아 있으면, 선생님들은 모여서 특정 아이들과 그 엄마를 욕하기 바빴다. 물론 나도 우리 아이 똥 좀 포장해 갖다 달라던 늬사 마누라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씹어 댔다.
CCTV가 아이들의 안전이 아닌 선생 감시용으로 활용되는 이곳에서는 서로를 이렇게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유치원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운영하고 있는데도 엄마들은 열광하며 한 달에 200만원 되는 돈 이상을 척척 갖다 낸다.
결론은 부족한 실력 때문이라는 생각에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다. 하루하루 삶을 기록하는 것 그 자체가 나에게는 살기 위한 인공호흡이었다. 이런 나를 보고 책이 무에 그리 중요하냐고, 왜 그런 것에 목숨ㅁ을 거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하는 이들도 있었고, 글 가지고 ‘관심종자’ 짓 그만 하라는 이야기도 수없이 들었다. 그런 이야기는 네 일기장에나 적으라며 말이다.
머릿속에 든 생각이 번개처럼 치고 나와 청산유수처럼 흘러 명문장이 되는 희대의 천재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이 평범한 자는 어떤 재료를 써서 얼마나 발효시키고 난 뒤라야 읽기 좋게 곰삭은 문장을 내놓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분별력과 용기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결과는 애타게 기다릴 때 결코 쥐어주지 않는다. 모든 것 다 포기하고 허허로우면 슬그머니 자기가 뒤따라와 뒷주머니 구멍 난 틈을 찾아 저절로 꽂히는 것이다.’
과연 마셔보니 술은 맛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칼로리도 계산할 바가 아니었다. 술은 영혼을 마시는 것이었다. 방학 동안 매일매일 만나서 술을 마셨다. 낮술 밤술 가리지 않았다. 술은 물과 분자가 달라서 몸으로 쪽쪽 흡수도 잘된다. 배부르지도 않다. 입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고 영혼으로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과연 그는 최사의 주도 9단 열반주의 경지를 이루시고 또 다른 술 세상으로 가시고야 만 것이다. 조금만 더 일찍 찾아야 했다는 아쉬움과 동시에 진정한 두주불사계의 화신이 되신 시인 장승욱 님의 삶에 경외감이 들었다. 나 또한 남은 한 생, 더 마시고 싶을 때 즐겁게, 맛있게 마시고는 그의 자취를 따라 알알이 글로 남겨야겠다는 결심을 다지게 되었다.
마지막 전화에서 준석이가 나 오늘도 돈 없다고 했을 때, 그럼 이번만 내가 살 테니까 다음엔 네가 사락 말했어야 했다 그때 얼굴을 봤어야 했다. 이 아이가 다음주, 다다음주 죽을지 나라고 알았을까. (…) 지금 앞에 있는 사람에게 잘하자. 있을 대 잘하자. 길 떠나고 나면 소용없다. 지금 여기, 이 시간 함게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 그때부터 내가 살아가는 데에 가장 큰 기준이 이것이 되었다. (…) 요즘은 우리나라도 날이 더워졌는지 장미가 5월에 핀다. 언제 피든지 장미만 보면 생각나는 준석이. 앞으로도 내 삶에서 장미라는 함수의 x값에는 다른 어떤 것도 치환될 수 없을 것 같다.
3개월 뒤 영업에 복귀하고 나서도 일을 잘했을 리가 없었다. 현금서비스, 친구 찬스, 보험 해약 등등 끌어올 수 있는 돈이란 돈은 탈탈 다 털었다. 나는 돌 맞기 직전 개구리 모습을 하고 은행 대출코너에 앉아 있었다. 직원이 화면을 보고 ‘으음’ 소리 내며 자리만 고쳐 앉아도 움찔했다. 무서웠다. 나에게 또 어떤 하자가 있는 걸까. 단 한 군데에서도 나한테 돈을 빌려 주지 않았다. (서른 살의 결혼 초년생 시절이 생각난다. 월세보증금 때문에 은행에 신용보증으로 돈을 빌리려 갔었을 때였다. 신용보증 제도가 있어도 나에게는 신용이 없었다. 아니 내가 생각하는 나는 신용을 목숨처럼 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지만 은행에서 생각하는 신용이란 단어는 내가 생각하는 것하고는 다른 것이었다. 은행문을 나서는 나는 빈손이었다.)
어쩌다가 연하남이랑 깊이 사랑을 하고 있었다. 겨울 가면 봄이 오듯, 어느 날 그는 나랑 함께했던 모든 것을 다 접고자기 마누라한테 돌아갔다. 많이 힘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친구가 하나도 원망스럽지 않은 것이, 그는 처한 상황에서 나한테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 온갖 추잡하고 비루하고 나쁜 새기들, 젊은 여자 몸만 탐하는 늙수그레한 노털 새끼. 장가 안 간 공식 독거 중년 남자 새끼에 어정쩡하게 판단 내리기 어려운 착한데 못된 새끼들까지 다 만나봤지만, 그 애의 진심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쉬움도 없고 그리움도 없다.
불행의 쓰리 쿠션을 다 처 맞던 2011년. 나는 소주와 맥주를 가지고 차에 들어갔다. 이쯤 되면 자식이고 부모고 뭐고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싶다.
그러나 일본 소설 『금각사』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일본 자위대 선동에 실패한 후 할복자살을 하면서, 소설에서 그렇게도 할복에 대해 묘사하며 경외감마저 보였던 데 반해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미처 계산하지 못했듯, 나도 차 안에서 소주와 맥주를 마시고 나서 자살 시도를 할 때 방광이 그렇게 빨리 찬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번 한 번만 오줌 싸고 죽어야지, 한 번만 더 싸고 죽어야지 하다가 엄마 아빠한테 차 안에서 숨 쉰 채로 발견되었다.
“기억은 잊을 수 없겠지만, 몸이 나쁜 기억들을 버릴 때까지 끌어올리면 됩니다.”
그중 한명을 고르라면 나는 단연 ‘중2 엄마’를 꼽겠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의 엄마가 아니라,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아기 엄마였다. 첫 강의에 교복을 입고 왔다. 학교 갔다가 바로 왔단다.
미혼모란 없어 엄마일 뿐이지
옛날에는 양반가에서 초상이 났을 때 상주를 대싢 구성지게 슬픈 목소리로 울어주는 역할을 도맡아 하는 여인, 곡비가 있었다.
곡비는 배우이자 시인이다. 저승으로 떠나는 이를 맘 편하게 보내기도 하지만 사실은 정처 없이 이승에 남은 이를 위로한다. 곡비라는 이름, 참 쓸쓸하고 애잔하다. 함께 울어주는 곡비와 같은 고마운 존재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이리 비루하게나마 살아낸 것이리라.
이번 코로나 사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두가 주중에 어머님 댁에서 지냈다.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다시 유치원에 슬슬 보내기 시작했더니, 아이가 서럽게 울면서 이런다.
딸은 남편을 ‘아저씨’라고 부른다. 둘은 완전 따로 국밥이다. 한 집에서도 서로 소 닭 보듯이 투명인간들로 산지 오래되었다. (…) 골수 이식보다 더 힘든 것이 ‘자식 데리고 재혼 가정 꾸리기’ 아닌가 싶다.
아들, 만두 녀석은 자폐 증상에 언어 장애가 있는지라 세 살 정도의 아이들보다 발화가 원활하지 않다. 아들하고 이야기하려면 그저 벽을 복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저 이곳 지구별에 잠시 놀러온 친구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언어가 익숙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가벼워진다.
바닥을 등을 다 쓸고 다니며 울부짖는 아이와 그를 무심하게 좀비처럼 발보고 있는 나, 그리고 ‘저 엄마는 왜 애를 안 달래고 저래?’ 하며 쳐다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눈길 속에 는 우리 딸이 있었다는 것을…….
그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클래슨을 빠아아앙~ 울렸다. 꺅! 비명이 나올 정도로 큰 소리였다. “아, 아저씨 너무 시끄러워요!” 어? 만두다. 분명히 거실에서 놀고 있는 만두 목소리다! 너무 놀라서 만두를 붙들고 또 한 번만 해보라고 했다. 네가 아까 했던 말 엄마도 따라서 같이 해보자고 했더니…… “아으씨, 이끄어어 ……” 다시 흐지부지한다. 이상하다. 분명히 만두 목소리였는데
“할머니 타고 원숭이 보러 가자. 할머니 타고 씽씽이 타러 가자. 할머니 타고 케잌 먹으러 가자.”
아이고, 할머니가 이 모든 일을 다 해주셨나 보다. 나는 아이에게 흠뻑 빠진 엄마가 아니다. 만두가 세 살 무렵 되었을 때, 다른 사람에게서 ‘엄마가 아이에게 아직 이슬이 안 내렸네요’란 말을 들었을 만큼. 지금은 일곱 살인데 그 이슬이 아직 내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계속 가슴에 걸린다.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하도 서럽게 우니까 남편하고 내가 마음이 아파서 어머님께 전화했다. 어머님은 애를 한 달 반 보시더니 병이 나서 앓아누우셨다. “혜성이, 할머니 보고 싶어? 할머니는 혜성이 사랑해. 할머니도 혜성이 보고 싶어. 우리 다시 만나자.”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서 꾸역꾸역 다니는 것 같던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거의 8년 전이다. 그 뒤로 주위에서 ‘내 황서미 성공하는 것 꼭 보고 만다’는 응원을 내내 들어왔다. 나도 계속 고맙다고, 열심히 해보겠다고 주먹 꽉 쥐어 파이팅을 보여드린 것도 5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이제는 하도 그 ‘한 방’이 안 터져서 격려해주시는 이들에게 미안할 정도다. 사실 그 한 방, ‘잘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감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작은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어 나의 삶에 귀 기울여 주신 분들에게 이제는 조금 덜 미안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피 끓던 초창기와 달리 나이를 몇 살 더 먹어서 그런가, 그 ‘한 방’이 안 터져도 매일 이렇게 조근조근 재미나게 살 수 있을 듯도 하고. 내 모자란 이야기를 함께 읽고, 웃고, 울어주신 분들에게 큰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도 또 얼마나 덜떨어진 이야기가 쏟아질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내 곁에서 함께 ‘물개박수’ 치면서 함께 웃어주시면 그만한 행복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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