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제주도 한 달 살기』, 송일준, 스타북스, 2021

그루 터기 2021. 12. 24. 07:35

제주도 한 달 살기, 송일준, 스타북스, 2021

 

 

 

저자 소개

송일준

1957년 영암에서 태어나 나주로 이사했다. 나주초등학교에 입학해 나주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주중학교로 진학했다. 나주중학교 1학년 때 상경, 덕수중학교(야간부), 양정고등학교, 고려대학교(사회학과), 한국외대 통역대학원(한영과)을 졸업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에 능통하다.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을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신문방송학과)에서 언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일본의 테레비, 역서로 거대 NHK 붕괴』 『미디어리터러시 접근법등이 있다.

1984MBC에 입사, 3년 간의 AD생활을 거쳐 PD로 승격했다. 출발 새 아침〉 〈취미여행〉 〈인간시대〉 〈PD수첩,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국제협력팀장, 도쿄PD특파원, 외주제작센터장을 맡아 떠나 있기도 했지만, PD수첩과 함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20084월 이명박 정부의 광우병 위험 미국쇠고기수입 무제한 허용 방침을 비판한 방송 후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다. 보수정권 내내 제작현업에서 쫓겨나 사내 유배생활을 했고, MBC PD협회장, 한국PD연합회장이 되어 언론자유 회복 투쟁의 일선에서 싸웠다.

20181월 광주MBC사장으로 부임하여 지역성과 보편성을 겸비한 글로벌 수준의 프로그램 제작, 지자체와 협력하여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는 문화사업을 열정적으로 추진했다. 홍어를 180도 새로운 관점에서 들여다본 11부작 다큐멘터리 핑크피쉬(연출 백재훈 최선영)로 많은 상을 받았다. 나주정미소를 리모델링한 공연장 난장곡간’, 광주 양림동 펭귄골목 입구의 라디오 오픈스튜디오, 담양에 추진 중인 LP뮤지엄 등으로 지역의 쇠락한 원도심을 활성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의 방송에 PD저널리즘이란 용어를 탄생시킨 PD수첩의 대표적 얼굴 중 한 명으로 PD수첩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독서 메모

 

요셋말로 주캐 부캐를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농업을 6차 산업이라고 하는데 나는 콘텐츠 산업이라고 생각한다. 콘텐츠의 360도 전개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 모든 게 콘텐츠다. 지역을 콘텐츠 측면에서 바라보면 소재가 넘친다. 대도시에 없는 자원을 발굴해 매력적인 콘텐츠로 만들어내야 한다. 서울 사람들, 무슨 신도시를 보러가는 게 아니다. 지역만의 개성이 있는, 재밌는, 사진찍기 좋은 콘텐츠들이 있고,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예쁜 사진이 나오는 곳이면 어디든 사람들이 찾아온다. 세상이 많이 변해다. 그걸 잘 이해하면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살 길을 찾을 수 있다.

 

육십 중반의 사내, 하는 짓이 열여덟 청춘이다 스스로도 웃음이 난다. 그래도 민폐가 아니라면 하고 싶은 건 하고 살 것이다. 덧없는 인생, 주체적으로다가, 재미지게, 살아야 한다.

 

이주노동자들, 우리는 그들보다 먼저 이 땅에 온 사람들이다. 언제 어떻게 이 땅에 정착했는지 모를 뿐이다. 사실은 우기가 먼저 왔다기 보다 우리 조상이 먼저 온 것이지만..

자연생태계나 인간생태계나 똑 같다.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 폐쇄적 배타적이면 망한다.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원래부터 순수한 조선민족? 그런 건 없다.

 

하얀 등대는 밤에 초록빛을 내고 배에서 바라볼 때 등대 좌측은 위험하니 우측으로 항해하라는 의미이고, 빨간 등대는 밤에 빨간 불빛을 내고 배에서 바라볼 때 등대 오른쪽은 위험하니 왼쪽으로 들어오라는 뜻이고, 노란 등대는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으니 조심하고, 등대 쪽으로는 오지 말라는 표시다.

 

가파도 되고 마라도 되고

 

유리창밖으로 정원이 내다보인다. 눈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편안하다. 16년 세월을 지나며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PD와의 인연. 36년이 넘는 방송 생활. 앞으로의 계획. 주로 내가 말을 많이 했다. 지나고 보면 좀 자제할걸 하고 늘 후회한다. 37년 군인으로 살았던 아버지는 차분하고 과묵한 성격인 듯하고 어머니는 활달하고, 여장부 스타일이다. “PD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라고 했더니 늦게 알아채셨네라고 어머니가 말한다. 아버지는 광주 사람인데 어머니는 부산 사람이다. 옛날엔 흔치 않은 커플이라 사연이 궁금했다.

 

느즈막이 일어났다. 출근 준비로 쫓길 일이 없으니 세상 여유롭다. 아침은 샐러드와 커피 한 잔.

차에 오른 시각 오전 11. 목적지는 거문오름. 박정희가 죄수들을 동원해 만들었다는 5.16도로를 달린다. 구불구불, 헤어핀커브의 연속이다. 오토바이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자동차는 재미가 없다. 도중 한라산 등반을 시작하는 성판악에서 잠시 쉴까 하고 주차장으로 들어갔다가 도로 나왔다. 차들이 꽉 차있었다. 인터넷으로 사전예약을 하고 와야 한다는데 사람들로 북적였다.

 

법환에 있는 초밥집. 일전에 내가 그런대로 먹을 만한 초밥집이라고 소개했던 곳이다. 졸지에 22, 처음보는 사람들끼리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담소했다. 자주 페북에서 접하는지라 처음 만났는데도 오랜 지인처럼 서먹할 게 없었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된 담소는 유쾌하고 재밌었다. 살아온 이력을 털어놓고, 했던 일과 경험, 앞으로 할 일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느 국회의원 보좌관 일을 했고, 여덟 번의 선거에 관여했다는 윤지용 씨는 정치판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가보면 좋을 데로 어디가 있겠느냐는 질문에 나는 빛의 벙커를 추천했다.

 

젊은 연인 한 쌍이 출입금지선 앞에서 용머리해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 도대체 언제 와야 볼 수 있는 거야. 우리 벌써 네 번째 허탕이다 그치.” 뭍에서 여행을 그렇게 많이 오진 않았을 테고, 아마 제주도에 사는 청춘들일 것이다. 통행금지가 풀릴 때까지 거의 세 시간 가까이 남았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지. 발길을 돌린다. 하멜기념비와 산방연대는 올레길 10코스가 지난다. 오르막 경사길을 걸어야 한다. 길가에 올레길 표지판과 리본이 보인다. 하멜의 표착 스토리, 하멜기념비를 세우게 된 내력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잔디 깔린 마당에 놓인 나무 테이블과 의자. 두 여자가 앉아 돌담 너머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바다멍 때리기 좋은 곳이다. 더 이상 좋을 수 없이 환장할 봄날이다. 카페 안. 낮은 천장이 훤히 드러나 있다. 구불구불 대충 다듬은 나무 기둥, 서까래, 하얗게 회칠한 천장. 간소, 질박, 자연옛집을 고친 카페들이 흔히 그렇듯 가파리212도 그런 곳이다. 주방에서 두 여자가 바쁘다. 키가 큰 한 여성은 머리를 짧게 잘랐다. 스포츠 스타일. “남자인 줄 알았네.” 목소리를 듣더니 일행 중 한 명이 말한다. “들리겠네. 목소리 낮추시오.” 남들은 미숫가루를 시키는데 나는 카페라떼를 시켰다. 바로 후회했다.

 

유리창밖으로 정원이 내다보인다. 눈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편안하다. 16년 세월을 지나며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PD와의 인연. 36년이 넘는 방송 생활. 앞으로의 계획. 주로 내가 말을 많이 했다. 지나고 보면 좀 자제할걸 하고 늘 후회한다. 37년 군인으로 살았던 아버지는 차분하고 과묵한 성격인 듯하고 어머니는 활달하고, 여장부 스타일이다. “PD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라고 했더니 늦게 알아채셨네라고 어머니가 말한다. 아버지는 광주 사람인데 어머니는 부산 사람이다. 옛날엔 흔치 않은 커플이라 사연이 궁금했다.

 

새알팥죽. 묽은 팥수프 안에 새알들만 들어 있다. 예상이 빗나갔다. 보통 쌀팥죽과 새알이 같이 들어있는 것 아닌가. 새알 수도 적다. 결국 쌀팥죽과 새알팥죽을 한데 섞어 먹었다. 광주MBC 근처에 팥죽집이 있다. 팥칼국수, 쌀팥죽, 새알팥죽을 판다. 냉면 그릇이 넘치게 담아준다. 처음 갔을 땐 5,000원이었는데, 퇴임 무렵엔 6,000원으로 올랐다. 그렇더라도 언제나 한 그릇을 다 비우기 힘들었다. 어딜 가든 광주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 먹었는데도 포만감은 없다.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 먹으면 안 되는 것을 아는데도 뭔가 부족하다. 비 오는 이중섭거리. 사람들이 없다. 간혹 비옷을 입은 관광객들이 눈에 띌 뿐 가게들도 한산하다. 서귀포극장이 비를 맞고 있다.

 

쿠사마야요이는 젊었을 때 호박에 꽂혀 평생 호박을 테마로 작품활동을 해왔고 호박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3전시관은 호박 한 점과 무한거울의 방-영혼의 광채가 전부였다. 야요이의 호박은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커졌는데, 호박 위에 찍은 무수한 검은 점들은 반복과 집적이라는 쿠사마야요이 특유의 표현방식이고, 그녀가 끊임없이 고민해온 영원성을 생각하게 한다고 설명문에 쓰여 있었다. . 썩 와 닿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환각증세를 치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시작했다는 쿠사마야요이. 머릿속 환상을 밖으로 쏟아내는 작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다. 작품이 좀 더 많았더라면 이해도가 높아졌을 텐데, 아쉽다.

 

어릴 적 여기서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조천에서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할망당 얘기를 들었고, 아버지가 시멘트로 바르는 것도 봤고, 할망당에 사는 뱀신도 직접 목격했단다. 아직 할망당이 바닷가에 있을 때였다. “큰 바위 밑 조그만 돌들 틈 사이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어요.” “아니, 제주도에 원래 뱀이 많은데 그 뱀이 할망 당신이라는 걸 어떻게 알아요?” “보면 알지요. 느낌이 다르더드라니께요. 한참을 보고 있었더니 스르르 구멍 속으로 사라졌어요.” 크기를 물어봤더니 그다지 크지 않았단다. 배 밑창에 난 구멍을 막을 정도의 구렁이가 아니고? “작은 뱀이었다면, 나주에서 온 구렁이 후손일까요? 대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네요.” “그랄 수도 있겄지요.” 박씨에게 들은 얘기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과는 조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