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원태연, 『고맙습니다그래서나도고마운사람이고싶습니다.』, 자음과 모음, 2021

그루 터기 2021. 10. 24. 06:54

원태연, 『고맙습니다그래서나도고마운사람이고싶습니다.』, 자음과 모음, 2021

 

마음의 무게

국어사전에서 / 자비의 뜻을 읽고 / 처음에는 뭉클했다가 / 다시 한번 일고 울컥하다가 / 덮고 나서는 / 한참을 칼처럼 심장을 찌른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나는 말을 잘한다. 특히 거짓말을 잘한다. 나는 난독증이다. 마흔살이 넘어 함께 테니스를 치던 정신과 형님한테 들어서 알았다.

통지표에는 늘 ‘주의가 산만하다.’고 적혀 있었다. 내가 산처럼 크다는 소린 줄 알았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처음 시작하는 순간은

진짜를 애기했을 때 어른들이 믿어주지 않는, 그 순간부터라고 한다.

 

그날 밤 엄마는 귤을 까서 내 입에 넣어주었고, 난 식탁 위에 엄마가 까놓은 귤껍질이 느린 화면으로 펼쳐지는 꽃잎처럼 서서히 펴지는 걸 바라보면서 울었다. 억울한 나의 마음속은 바짝 메말라 습도가 0퍼센트였지만, 엄마가 화를 풀어서 다행이었던 나의 눈물샘은 차고 넘쳤었나 보다.

 

밤이라 추운지, 겨울이라 추운 건지,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못해서 추운 건지, 여하튼 무지하게 추운 밤이었다.

 

선생님! 희망 직업이 의사라면 장래 희망은 환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멋있는 의사가 맞지 않나요? 아닌가요?

 

친구야, 내가 힘들다고 예기할 때 내 눈을 바라보면서 해결책을 내 놓거나 돌파구를 찾아주려고 하지 말고 그냥 술잔을 채워줘, 내 잔이 채워져 있다면 그 잔에 쨍! 건배하면서 “마셔, 태연아” 하고 이름을 불러줘.

 

나는 살면서 참 많은 잘못을 했다. 귀를 열어야 할 때 입을 열었고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관찰했고 약속을 어긴 날에도 항상 숙면을 취했다. 사랑은 내가 필요한 만큼만 했고 이별은 항상 내가 먼저였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무심히도 내뱉는 누군가의 그 말에 가슴이 또 먹먹해진다.

 

사랑이라고 쓰면 외로움이라고 읽는 사람들

 

말은 씨가 된다. 그리고 씨가 된 그 말은, 듣는 사람의 귀가 아니라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다.

 

나는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닌 마음을 읽는 시인이었습니다.

 

나는 그 말이 참 좋았습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고마운 건 참 좋은 거니까. 그래서 나는 고마운 사람들이 좋았고 나도 고마운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고마운 건 참 좋은 거니까요. 고맙습니다. 나는 선생님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선생님에게 고마운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만약 나이를 노력해서 먹었다면 난 아마 지금쯤 일곱이나 됐을까요?

 

갑자기 엄마의 한숨이 고막이 아닌 가슴을 친다.

 

나는 영원히 살 것처럼 교만하고, 오늘만 살 것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내일은 없는 사람처럼 오만방자하게도 하루하루, 하루를 살았지/ 나에게 문을 열어준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베풀어 준 호의를 감사가 아닌 권리처럼 누리면서 말이야.

 

말을 안 해도 다 들린다. 내무반 불침번이 몰래 먹었던 과자 깨무는 소리처럼.

 

프라이버시 : 화장실 문을 잠그고 볼일을 보는 행위

비밀 : 화장실 문을 잠그고 남들은 모르는 행위를 하는 행위

 

커피는 쓰고, 너는 달고, 나는 영원히 살고 싶었다.

 

너의 이름은

어쩌면 첫사랑, 어쩌면 내 신발, 어쩌면 잘못 끼운 첫 단추, 어쩌면 내 거울, 어쩌면 아무도 밟은 적 없는 눈밭 위의 맨발, 어쩌면 벼랑 끝에서 바라본 나의 노을, 어쩌면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1악장. 어쩌면 버리지 못한 영원한 나의 꿈. 어쩌면 내가 마지막에 마주치고 싶은 눈동자.

 

외로움은 피부속에 산다. 비가오는 날 알 수가 있었다. 외로움은 친구가 없다. 바람 부는 날 알 수가 있었다. 외로움은 말이 없다. 눈이 내리는 날 알 수가 있었다. 나는 가끔 외로움이 꼭 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후회하기 싫으면 그렇게 살지 말고, 그렇게 살 거라면 후회하지 마라.

 

미안해 보다 고마워, 고마워보다, 사랑해, 사랑해보다 널 사랑해, 널 사랑해보다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사랑해보다 나부터가 아니라 너부터.

 

당장 사과나무라도 한 그루 심어야 할 것처럼 불안하게 만드는 앵커의 목소리가 싫다. 그리고 나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우는 아이를 다그치는 엄마를 보면 화가 난다.

 

나는 오래전에 설렁탕 집에서 엿들은 노부부의 대화 중에 “이렇게 젊고 예쁜 여자가 죽다니”라고 말하며 신문을 넘기던 할아버지 와 할아버지 설렁탕에 고춧가루를 뿌려 넣으며 “늙고 못생긴 여자면 죽어도 돼요?”라고 말하던 할머니의 표정, 그리고 육개장처럼 새빨간 할아버지의 설렁탕이 아직까지도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