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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경,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여성앵커의 고군분투 일터 브리핑), 마음산책, 2020

그루 터기 2021. 11. 8. 00:08

김지경,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여성앵커의 고군분투 일터 브리핑), 마음산책, 2020

 

우리가 알게 모르게. 곳곳의 왕언니들이 그래도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나도 언젠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왕언니의 위치에 오르면 ‘젊음과 미모’라는 획일적인 기준 말고, 다양한 매력과 능력을 반영해 색색깔 아름다운 이들로 스튜디오를 채워보고 싶다.

 

이유는 한 가지, J가 남자 앵커이기 때문에 관행상 왼편에 서고, 인사를 먼저 하고, 뉴스도 먼저 전하는 거였다. 뉴스만 잘 전하면 됐지,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뉴스 프로그램을 대표해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를 전하게 되는 자리를 늘 ‘남자’ 앵커가 해왔다고 해서 ‘아 그렇구나’ 하면서 넘길 수는 없었다.

 

앵커를 맡으면서도 “내가 얼마나 앵커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40대 여기자의 앵커 진출을 막는 일은 없도록 열심히 하자”고 다짐했던 터였다. 보통 남자 앵커보다 후배인 여자 앵커들은 문제제기를 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내가 선배인 이 경우에도 ‘관행’이라며 지나가버리면, 내내 마음이 괴롭고, 말하지 않은 걸 오래오래 후회할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이런 사례들이 드물고 특수한 일이라는 것이다. 내가 만든 이 조그만 ‘선례’가 다음 이 길을 걸을 여성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기자와 아나운서는 일단 입사 시험부터 다르다. 기자 시험은 상식과 논술, 작문처럼 글쓰기와 논리력을 먼저 본다. 거기서 상당수를 걸러낸 뒤에 다음 단계 시험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아나운서는 첫 번째 관문이 카메라 테스트이다 호감 가는 외모인지, 방송 진행에 적합한 발음을 하는지가 아나운서가 되기 위한 첫째 조건이고, 이 단계를 통과한 10분의 1 정도만이 다음 시험을 치룰 수 있다.

 

“기자님은 농인과 청각장애인 중에 무슨 말이 맞는 것 같아여?”

“청각 장애인은 듣는 능력이 기준점 이하인 사람들을 부르는 거고요. 농인은 수화를 사용하는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거예요. 전자는 병리학적 시선으로 외비에서 붙인 이름이고, 농인은 스스로 붙인 이름이죠. 영어에선 이 구분이 명확해서 전자를 deaf, 후자는 d를 대문자로 해서 Deaf라고 해요.”

 

수화는 한국어와 문법 체계가 다르고 어순도 오히려 영어에 더 가까워서 이런 주문은 서로 다른 두 언어를 동시에 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다.

 

하지만 부러지면 지는 거다.

 

그래, 이 ‘현장’이 주는 매력 때문에 내가 그렇게 기자가 되고 싶었지. 기레기라 욕먹고, 내 생활도 없고, 일은 힘겹고 부담스러워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가장 중요한 일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궁금한 건 물어보고 또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건 아직도 가슴 뛰는 일이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내 일을 좋아하나 보다. 그리고 여전히 스튜디오의 앵커보다는 현장을 뛰어다니는 백발의 할머니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든다.

 

워킹맘은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하는데, 잘 내려놓지 못하고 매사 최선을 다하려다 보면 죽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가혹한 여건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환경에 처해보지도 않은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비수를 찌른다. 여자는 결혼을 하면 전투력이 약해진다는 둥, 그저 편하게 생활하려고 내근직을 택했다는 둥 하면서.

지금 그 자리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는 모든 워킹맘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정도면 됐다. 우리 죽지말고 잘 살아남자. 세상이 조금씩은 계속 바뀌겠지. 육아맘들에게는 더더욱 경의를 표한다.

 

55, 66, 77 같은 숫자들은 공식적인 사이즈 체계가 아니라고 했다. 1980년 20대 성인 여성의 평균키가 155센티, 가슴둘레가 85센티미터라서 끝의 숫자 5 두 개를 따서 ‘55’ 사이즈라고 기준점으로 삼고, 키는 5센티미터, 가슴둘레는 3센티미터 간격으로 더하고 빼면서 44부터 88사이즈까지 만들었다는데

 

임신한 열 달 동안 자리를 양보받은 건 딱 한 번 이었다. 양보를 권한답시고 아무리 화려한 핑크 빛으로 의자를 몽땅 칠해버려도, 사람들은 일단 자리에 앉으면 계속 휴대전화만 보고 있을 정도로 무심하거나, 또는 피곤했다. 그들을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할 만큼의 뻔뻔함은 내게 없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 겪은 서러운 일들을 예기하자면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이 모자란다.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둥 사람 젖을 먹이지 소젖을 먹이냐는 둥, 아기 건강과 지능 향상과 애착 형성에 최고라는 둥 ‘모유수유’를 강조하고 모유 수유를 안 하는 엄마는 나쁜엄마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면서도, 막상 모유 수유를 할 수 있는 시설은 찾기 어려웠다. 아기 엄마들이 백화점이나 마트에 많은 건, 그들이 ‘남편들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비싼 커피나 사 마시는 된장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나마 그런 곳들에서만 수유시설을 손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혹한 운동장에서도 예전엔 ‘일은 더 열심히 하고, 술도 더 맹렬히 마시면 되지!’라며 자신감 있게 달릴 수 있었지만, 임신과 출산은 나의 머리채를 출발선 100미터 뒤로 확 잡아끌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1인분의 노동력을 흡족하게 제공하는 이들과는 같은 선에 설 수 없다는 걸, 늘 ‘아기냐 일이냐’를 저울질하면서 그때그때 어떤 선택을 하든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매 순간 깨닫는다.

 

근데 후배들이 윗세대랑 지금 차장님들이랑 누구를 더 싫어하는지 아세요? 바로 차장님들이에요. 꼰대들은 그냥 꼰대인데 차장님들은 ‘착한 척하는 꼰대’라고

 

역시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니……. 대안적인 여성 리더십이란 무엇일까 고민을 해도 모자랄 판에 탈꼰대, 탈마초를 고민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떡하겠나. 나 자신을 정확히 알고 반성하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앞으로도 꼰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의 노력은 계속될 거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고 생각하는 순간, 진짜 꼰대 확정이다.

 

TMI(Too Much Information) 너무 과한 정보, 달갑지 않은 정보,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 사용된다.

 

김용균 씨의 사고처럼 사회적 타살에 가까운, 모두 힘을 합쳐 막아야 할 죽음들이 있고, 고독사와 탈북모자의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처럼 사회보호망에서 벗어난 곳에서 벌어진 가슴 아픈 죽음들이 있고, 정말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자연재해나 불의의 사고로 인한 죽음들이 있고‥‥‥

 

얼굴을 벅벅 닦아내고 있는데 문득 고등학교 때 생물선생님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꽃다발은 식물의 생식기 다발일 뿐이다.’ 라는 말로 한창 마음이 꽃망울처럼 부풀어 올랐던 사춘기 소년 소녀들을 객관적 과학의 세계로 인도하셨던 그 선생님이 ‘피부를 1밀리미터만 벗기면 다 핏덩이일 뿐이다.’라는 말씀도 하셨었지.

 

온갖 중요한 일을 하는 척, 바쁜 척은 다하고 살면서 정작 가장 소중한 건 이렇게 놓치고 사는 게 아닐까. 문득 두렵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곳곳의 왕언니들이 그래도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나도 언젠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왕언니의 위치에 오르면 ‘젊음과 미모’라는 획일적인 기준 말고, 다양한 매력과 능력을 반영해 색색깔 아름다운 이들로 스튜디오를 채워보고 싶다.

 

결과는 우리 빼고는 해피엔딩이었다. 그녀도, 그녀의 후배도 잘살고 있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원하는 수위의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나도 ‘지금 기사는 안 쓰지만 계속 주시하겠으며, 제대로 징계 절차가 진행되지 않으면 바로 다시 문제 삼겠다’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누가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나쁜 놈이 있듯 나쁜 년도 있기 마련이지만, 살다보면 이런 멋진 언니들의 세계를 종종 마주친다.

 

조금만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광활한 자연에서, 우주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작은 존재이다. 내가 분초를 다투며 매달리는 이 일은 나중엔 기억도, 흔적도 남지 않을 것들이다. 내가 옳다고 믿고 있는 이 일도 기준과 상황에 따라선 얼마든지 달리 보일 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좀 힘이 생긴다. 그리고 희망도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