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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혜, 『한마을과 두 갈래 길을 지나는 방법에 대하여』 (소설), 교유당, 2021

그루 터기 2021. 11. 30. 09:42

한지혜, 한마을과 두 갈래 길을 지나는 방법에 대하여(소설), 교유당, 2021

 

참 괜찮은 눈이 온다.라는 책을 읽고 한지혜 작가님의 소설을 한 번 읽고 싶었다. 글 속에 소개된 제목도 길고 독특한 책이라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많이 좋아해서 소설책은 한 달에 한 두 권정도 읽는 편이다. 그 소설 중에 들어간 책이다. 에세이보다 소설을 덜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소설이 어렵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단편 소설집을 읽다 보면 스토리에 순식간에 읽어지는 것도 있고,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소설들도 있다. 이 책 또한 비슷했다. 두세 번씩이나 다시 읽어도 뭔가 이해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소설은 총 9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있다. 등단 작품인 <외출>, 표제작인 <한마을과 두 갈래 길을 지나는 방법에 대하여> 그 외에도 7편의 작품이 있으며, 작가의 말에 의하면 20년 전에 쓴 소설을 현대적인 언어의 변화에 따른 언어의 성장폭을 조금이라도 따라가기 위해 애를 쓰면서도 대대적인 개작없이 당대의 시대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특히 기면증이 있는 여자의 이야기인 <사루비아>는 아주 살짝 기면증 증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건 아니고 나도 잠이 무척 많은 사람이다)는 간질이 아닌 심한 기면증이 그 정도로 심한 것인지 처음 알았다. 친구들에게 가끔 기면증의 제일 낮은 단계라고 말했던 나는 오늘부터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다. 의사가 기면증이라고 진단하기 전에는.

 

 

 

작가 소개

한지혜 :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 미필적 고의에 대한 보고서』『물그림 엄마, 산문집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썼다.

 

목차 (9편의 소설)

 

외출 (등단 작품)

이사

사루비아

왜 던지지 않았을까, 소년은

목포행 완행열차

햇빛 밝은

호출, 1995

자전거 타는 여자

한 마을과 두 갈래 길을 지나는 방법에 대하여

 

 

책속에서 찾은 고은 글들

 

가끔은 유서를 쓰기도 했다. 그렇다고 정말 죽을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죽음에 대한 상상은 권태랄까 나른함이랄까 하는 것들을 잠시 소멸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세상은 별것 아닌 것이 돼버리는 까닭이었다. 죽는 이유는 유서를 쓸 때마다 달랐다. 어떤 날은 가난을 견딜 수가 없어서 죽고, 어떤 날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죽고, 어떤 날은 나를 받아주지 않는 이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기 위해서 죽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지루해서 죽었다. 마지막 이유는 언제나 마음에 든다.

 

방안에 있으면 시간은 고요하고 평화롭게 흘렀다. 그래서 나는 문득 주인 남자가 이 마당에서 종일토록 본 것은 스멀스멀 피어나는 세월은 아니었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가끔씩은 슬기가 지금도 구멍가게에서 눈깔사탕을 집어먹으며 셈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다른 것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언제나 같이 찾아온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듯싶다. 내 경우에는 대개 좋은 일이 먼저 찾아온다. 그러고 난 후에 찾아오는 나쁜 일은 언제나 앞서 찾아온 좋은 일들을 취소시키거나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린다. 이번 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싸울 때 어머니의 눈빛에서 피어오르는 전의를 보노라면 위기일발의 전쟁터를 앞장서서 지휘하는 장군의 그것이 저보다 더 맹렬할 까 싶은 탄복이 절로 나왔다. 굶주린 야수가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듯한 비장함. 그것이 타고난 천성인지, 아니면 서른둘에 쥐방울만한 자식 둘 달고 청상이 된 순간부터 살기위해 택한 방편인지 모를 일이다.

 

정말 요사스러운 일이다. 어머니가 싸움을 포기했다니, 누군가와 싸운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삶의 원동력 같은 거였다. 내 집도 아닌, 내 집이 될 거라는 희망도 사라진 열 평짜리 아파트를 잃게 될까봐 싸움을 포기했다는 사실은 요사스럽게 쓸쓸한 일이다.

 

이제 나는 벌을 설 차례이다. 어머니가 내게 내린 벌은 간단했다. 이제부터 이 집안의 가장이 될 것. 나는 가을이 오기 전에 전자제품에 들어갈 부품을 조립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관리 사무직이었고, 내가 원한 급여보다 200만 원쯤 적게 받는다. 직업지도관의 혜안이 놀라울 뿐이다.

 

왜 아파트에 살긴요? 그래도 맘만 좀 독하게 먹으면 파트가 살기는 편해요. 그냥 안에서 물 단단히 걸어 잠그고 누가 와도 나 몰라라 하면 되거든요. 잡상인이 찾아와서 띵동 해도 모르는 척, 부녀회에서 띵동 해도 모르는 척, 관리실에서 띵동 해도 모르는 척. 몇 번만 그렇게 살면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냥 자기들 관심 밖에 내놓는 거죠. 어쩌다가 모여서 입이 심심하거나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치면 우르르 모여서 입을 댓발이나 내밀고 궁시렁거리겠지만, 뭐 섞여 산다고 안 그러겠어요. 사람 사는 데서 말 나오지 어디 딴 데서 나오나요. 살면서 젤 무서운 게 사람이에요

 

심판은 내 동료에게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규정은 실전에서는 소용없는 문서상의매뉴얼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순간 네가 지키고자 했던 것이 단지 규정 뿐이었을까. 너를 둘러싼 수많은 관중이 네게 폭언과 비난을 퍼부었을 , 그 가운데서 완강하게 버티면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단지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을까. 혹시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이 되어 버린 축제 앞에 한순간 반역의 깃발을 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한순간도 미동하지 않던 너의 완강한 등이 자꾸 서늘하다. 일탈이든 규정 준수든 거대한 축제 한복판에서 자신의 의지를 좇기가 쉬운 일이었을까. 미안하다. 그 때 나도 너에게 손가락을 겨누었다.

 

실은 내가 우리 엄마랑 성이 같소. 우리 엄마가 일정 때 물 장사를 했소. 팔자가 박복하면 그냥 술이나 팔지, 하긴 물장사하는 팔자들이 곱게 술이나 따를 팔자이기는 하간. 내가 죽은 양반 두고, 그것도 엄마라는 사람을 두고 할 소리는 아니지만, 울 엄마가 피가 이만저만 뜨거운 여자가 아니었소. 어찌나 몸이 뜨거운지 사내가 없으면 잠을 못 잤다는 거 아이요. 그러다 유부남 정분이 안 났소.

 

사실 젊은 L 의 질문은 우스운 것이다. 왜 죽으려고 하다니, 사람이란 어차피 모두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데 새삼 죽음에 이유가 필요하다니. 저절로 던져버린 죽음에 이유 같은 건 없다. 있다면 핑계가 있을 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이러저러하지 내 죽음에 대해 더 이상 추억하거나 상관하지 말고 살아달라는, 오직 남은 사람들을 위한 ㅍㅇ. 죽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잊히고 싶은 거라는 걸, 나에게서 잊히고 싶은 거라는 걸 젊은 L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밤마다 일기 쓰듯 유서를 썼다. 그럴 만한 절망에 빠져 있던 것은 아니다. 희망이 없는 데 절망이 찾아올 리 없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산다는 건 줄 하나에 매달려 가파른 절벽을 오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절벽에는 끝이 없다. 오르고 오르다 결국은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P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끝까지 힘을 내어 절벽을 오르면 다음 절벽이 또 기다리고 있다. 누구든 어느 순간에는 힘이 다해 줄을 놓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함께 죽으면 외롭지 않을 거라고? 어느 한 순간 저렇게 절실히 껴 않았던 상대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갈 수 있을까. 꽃처럼 노랗던 지물이 빠르게 색깔을 잃고 있었다.

 

중년 남자도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남아 있는 것은 중년 남자가 마시던 빈 잔과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천원 권 한 장, 나의 1995년뿐이었다.

 

식물인간이라는 마이 얼마나 함축적이고 적합한 표현인지는 직접 겪어봐야 안다. 움직이지 못해서만 식물인 것은 아니었다. 화분처럼 누군가 돌보아야 하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엄마는 한 마리 나비 같았다. 그대로 어딘가 훨훨 날아가고 좋을 것만 같았다. 홀린 듯 넋을 잃은 채 엄마를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목구멍 안쪽에서 떫고 쓰고 독한 그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마을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들어오는 길이고, 하나는 나가는 길이다. 들어오는 길은 푸르고, 나가는 길은 붉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들어오는 길을 푸른길이라 부르고, 나가는 길을 붉은 길이라 부른다. 길은 그게 전부다. ‥‥‥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은 물론이고 자신의 마음도 스스로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읽지 못한다는 것이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읽을 수 있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지 싶다. 일단 그들은 마음을 보지 못한다. 당연하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것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이야기로 만드는 일은 무척 수고스러운 일이다. 사람들이 가져오는 마음은 상태가 일정하지 않다. 어떤 것들은 함부로 다뤄서 깨지기도 하고, 얼룩이 져 있기도 하다. 또 어떤 것들은 어린 풀의 속살처럼 너무 보드라워서 자칫 소홀하게 다루었다가는 바스라질 것처럼 생겼다. 나는 그 모든 마음들을 일단 꽃잎을 우려낸 물에 담가둔다. 그래야 마음을 덮고 있는 더께가 벗겨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깊고 큰마음은 처음 출발하던 그 자리에 여전히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 하여 나는 이제 이 소설책에 시작하던 마음을 함께 묶는다. 그러하다. 이것이 나의 처음이고 나의 시작이고, 나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