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아버지의 고무신』, 모임득, 수필가 비평사, 2021

그루 터기 2021. 12. 11. 22:34

아버지의 고무신, 모임득, 수필가 비평사, 2021

 

엊그네 모임득 작가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내 블로그 글을 보시고 연락하셨다. 작가님의 저서 먹을 갈다에 대한 글을 읽으셨단다. 어제 이 책과 먹을 갈다를 직접 사인을 하셔서 보내주셨다. 책을 양천도서관에서 빌려보고 너무 맘에 들어 서점에서 사서 보관해야겠다고 글의 끝에 썼는데 그 글을 보시고 보내주신 듯하다. 나는 이공계 출신이다. 기술서적은 저자인 친구나 저자인 지인으로부터 여러 권 선물로 받았는데 인문학 쪽은 처음이다. 이 나이에 애들처럼 기분이 좋고 설랬다. 작가님의 사인을 받은 책을 선물 받아서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좋은 글을 만날 수 있다는데 설렘이 다가왔다. 지난번 쓴 글은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내 기분을 그대로 쓴 것이다.  이젠 작가님으로부터 책을 받았으니 내 개인적인 생각을 쓸 수가 없다. 비록 객관적으로 글을 쓴다고 해도 남들이 그렇게 봐 주지는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책이나 맛집 소개를 돈을 받고 한 적이 없다. 사실 서평을 쓸 실력이 되지 않아 지금도 서평이 아닌 독서메모를 쓰고 있다. 책속의 좋은 문장을 다음에 또 읽어 보려고 옮기는 것이다.

 

아버지의 고무신은 수필과비평사에서 <현대수필가 100>를 발간했는데 그 100인 중에 모임득 작가님이 포함되어 이 책이 빛을 보게 되었다. 내용의 반 정도는 먹을 갈다에 실린 내용이지만 또 읽어봐도 감동적이 부분이 참 많다. 모 작가님은 우리와 비슷한 세대다. 나도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서 책 내용 중에는 공감 가는 내용이 많다. 역시 믿고 볼 수 있어서 좋고, 행복하다.

 

 

 

작가소개

모임득

 

충북 증평 출생, 2006수필과 비평수필 등단, 수필집 간이역 우체통2013. 수필집먹을 갈다2020, 문학나눔도서 선정(한국 문화예술위원회)

수필과비평 문학상 2017, 푸른솔 문학상 2020, 청주예총 공로상 2020

청중문인협회 주간, 수필과비평작가히의 충북지부회장역임, 충북수필문학회, 푸른솔문인협회 부회장.

 

 

독서 메모

 

옷가지를 가득 달고 바람에 흔들리는 빨랫줄이 남편의 모습 같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내가 늘어진 줄 같았다. 인연이 되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하는 태아들로 침통해 있을 때 남편은 바지랑대가 되고 따뜻한 햇살이 되어 힘을 보태 주었다.

 

무거워진 줄에 온 식구가 걸려있다. 혼자 두 팔을 벌리고 힘겨움을 참고 있을 남편의 빨랫줄에 이제부터는 내가 바지랑대가 되어야겠다.

 

고무신을 들고 수돗가로 향한다. 대야 속에 잠긴 고무신을 보니 아버지의 발을 씻겨 드릴 때가 생각이 나서 눈시울이 적셔진다. 그동안 힘든 농사일의 훈장이라도 되는 듯 양쪽 발바닥에 뚝 살이 박여 있었다. 힘줄도 보이고 감각이 있는 왼발에 비해 오른발은 약간 휘어진 듯하면서도 많이 부어 있어서 씻겨 드리기가 힘이 들었었다.

아버지의 발이라도 씻겨 드리는 듯 수세미는 제쳐 두고 손으로 고무신을 정성스럽게 닦는다. 비누칠을 한 다음 여러 번 헹구어 댓돌 위에 세워놓았다. 어렸을 때 어둑해지면 지게 지고 대문을 들어서던 아버지는 샘물을 퍼 올려 바짓단 걷어 올리고 씻으신 후 검정 고무신에 들어간 물 빠지라고 댓돌 위에 세워 놓곤 하셨는데.

 

며느리로 엄마로 아내로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니 매 순간 치열한 삶이었다. 길고 쭉 빠진 온전한 연필에서 이순을 바라 볼 만큼 살다 보니 내 몸은 겨우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짧은 몽당연필이 되고 말았다. () 살아온 생을 글로 적는다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살고 싶은 나이가 어디쯤일까.

(작가님은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살고 싶은 나이를 되돌아봤는데 나도 그런 나이가 있을까? 나는 돌아가서 지우고 싶은 나이가 없다. 아니 있지만 없는 것으로 해야겠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생애의 최고의 날들이 되어야 하고 , 굴곡진 과거가 있어서 지금의 행복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지우개로 지우고 싶듯이 미래에 지우개를 들고 지금 이순간을 지나는 오늘을 지우고 싶게 되면 그때는 어떡할 것인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 전에 오늘, 지금, 이순간 최선을 다해 행복해야겠다.)

 

내 고향 가을은 진 다홍빛으로 물드는 감나무 잎새에서 시작되었다. 마을 주위의 산야는 빨간 꽃을 피운 것처럼 감나무가 지천이다. 고샅길을 걷다 보면 초가지붕에 얹힌 하얀 박과 돌담 위로 뻗어 나온 감나무 가지의 붉은 감이 운치가 있었다.

 

넓지 못한 내 마음도 침을 담그면 너그러워질까. 상념의 꼬투리를 잡고 괴로워하는 마음의 찌꺼기도 소금에 타서 하룻밤 지나면 맑아질 수 있을지. 그럴 수만 있다면 난 매일 침을 담그는 수고를 하더라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몇 년 전 뱃속에서 다 키워놓고 하늘나라로 보낸 쌍둥이는 잠시 기차에 탔다가 잘못 탔다고 도로 내리었나. 나와는 부모자식 간의 인연이 아니라서 한번 안아보지도 못한 채 내 곁을 떠났던가. 가슴이 아릿하다.

 

시드는 꽃은 애처롭지만 피어나는 꽃은 어여쁘다. 흐름을 멈추어 본 적 없는 세월은 피어나고 시드는 꽃들 사이로 잠시도 머무르는 법 없이 가고 있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따라 우리의 인생도 흘러가는 것이다.

 

독은 비어 있기에 그만큼의 하늘을 담을 수 있다지만 난 무엇을 담을 수 있을지. 비우려고 할수록 온갖 탐욕, 근심은 늘어만 간다. 입구가 넓은 독은 그만큼의 하늘이 있고, 작은 독은 그에 따라 작아지는 하늘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얼키설키 엉킨 내 마음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 들여다보는 얼굴에 파문이 인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투정하며 남의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욕심만 부리던 부끄러운 나의 인생, 항아리의 기다림과 인내심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까지도 껴안을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침묵의 언어로 스스로를 다스리며, 속으로 가득 채우는 인성으로 그저 바라만 보아도 포근한 항아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작가님처럼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루터기라는 닉네임에 부끄럽지 않은 그런 인생....)

 

장미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북자북 피어있는 파꽃을 보면 하늘을 향해 일제히 꼿꼿이 머리를 쳐들고 있어 아침 일찍 점호를 받으려고 연병장에 집합한 군인들 같다.

 

막사발은 이래서 좋다. 밥이나 국도 담을 수 있지만, 꽃을 담고 있어도 어울린다. 농부같이 투박하고 소박한 사발은 막걸리를 담아서 마시면 서민의 그릇이 되고 이도다완처럼 문화적 국가의 자긍심을 보여주는 자기도 된다. 이도다완이라 불리며 보물로 대접받는 조선 시대 찻사발처럼, 평범하고 수수하지만, 품위 있는 사람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살면서 내 가족이 아닌 남을 위해서 누구의 바지랑대가 되어 본 적이 있던가. 내게도 삶의 바지랑대가 필요했다. 늘어진 빨랫줄에 바지랑대처럼 쳐들어 꼿꼿하게 받쳐주는 도움이 절실했다.

 

꽃이 진 잘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을 때, 아이들과 과수원까지 걸어서 가보면 대여섯 개 달린 열매 중에 제일 좋은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솎아 내고 있었다. 고품질 사과를 만들기 위해 적과를 하는 것이다. 크고 튼실한 사과를 위해서 가위에 자려 땅으로 떨어진 열매가 내 눈에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긴 세월 삼신할머니에게 자식을 점지 받지 못했던 내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뱃속에 잠시 둥지를 틀었다가 인연이 되지 못하고 가 버린 태아들 같은 느낌 때문이었는지 가슴까지 시렸었다.

 

우리 부부의 애간장을 태우고 쌍둥이가 무사히 세상에 나왔을 때는 내 설움인 양 비가 추적추적 내렸었다. 십년 만에 자식을 얻었을 대의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하리. 태어난 아이들이 정상이고 건강하다는 소리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배경 좋은 아버지면 그것으로 족하다. 굳이 어머니가 뭐 하는 지 잘 묻지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가 일하면, 아빠는 뭐 하는지가 궁금한 사회다. 그래서 종종 난처한 경우가 있다.

 

커피는 한 모금 넘기는 맛보다 향이 좋다. 갓 구워낸 빵에서 나는 빵의 냄새와 커피의 향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한다. 그래서 향기로 마케팅을 하는 곳에서는 일부러 빵과 커피의 향을 내 보낸다고 하지 않던가.

 

둥글고 넓적한 돌을 위짝과 아래짝 중쇠에 맞춰 포개놓고, 위짝에 구멍을 파서 나무 손잡이인 맷손을 끼워 맞춘 맷돌. 맷돌을 갈 때 그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한다. 곡식을 준비해 놓고 맷돌질을 하려고 할 때 맷돌에 어처구니가 없으면 얼마나 황당할까? 한낱 보잘것없는 나무 손잡이지만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돌에 불과하다.

내가 지향하는 엄마의 역할은 어처구니다. 콩이건 팥이건 무엇이든 갈아주는 맷돌은 아래 윗돌이 맞물려서 제대로 돌아가야 제 몫을 다한다. 그러나 손잡이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랴. 어처구니를 잡고 돌려주어야 콩을 갈고 팥을 타는 맷돌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자식들이 이일 저일 부딪혀 보면서 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정말 꼭 한 가지 부족해서 일을 처리 못 할 때, 그때 도와주는 것이 어머니의 몫이 아닐까.

 

순응하던 아들이 어느 날 덜 절인 무처럼 반기를 들었다. 누름돌에 눌린 동치미 무처럼 짊어진 삼의 무게에 버거웠던 나도 날을 세웠다. 둘 사이는 짜서 더 손볼 수 없는 김치처럼 소태같이 썼다.

 

무는 익히지 않으면 아삭하지만 열을 가하면 부드럽다. 늘 곁에 있지만 대접받는 채소는 아니다. 옆에 두고도 늘 무심했던 존재이나 곁에 있어서 고마운 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자신으로 하여 주위를 더 유익하게 하는 무 같은 사람이 세상을 살맛나게 만든다.

(오늘 아내와 시장에서 무 한 단을 샀다. 무생채를 많이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손자가 잘 먹는 소고기 무국을 끓이기 위해서 산 무를 뚝뚝 썰어서 과일처럼 내어 놓았다. 역시 무는 지금 계절이 제맛이다. 책을 읽으면서 낮에 먹은 무 생각이 난다. 저녁에 먹은 무 생채도..)

 

가끔 변비로 고생하는 사내아이의 배꼽 주위를 둥글게 문질러줄 때면 기분이 묘해진다. 탯줄을 통해서 나와 연결되어 잇던 곳이라 그러한가. 내 배꼽은 친정어머니 자궁의 일부며, 어머니는 그 어머니의 흔적 ‥‥‥. 핏줄이 당긴다는 말이 보이지 않는 탯줄이 우리 배꼽에 남아 있어 자석처럼 끌리는 것이 아닐까. 배꼽은 생명의 시작이며 중심이다.

 

머문자리는 늘 추억이 있고 그립다. 더구나 가고 없는 이의 머문 자리는 가슴이 시리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 없는 이별은 언제나 서럽다.

 

어머니의 세월만큼이나 오래된 친정집에 이사하던 해 며칠을 장대비가 내렸었다. 우리 식구가 머물고 있는 사랑채 천장에 빗물이 스며들더니 이내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지붕에는 기와가 한 장 어긋나 있었다. 큰집을 덮어주려면 수많은 기와가 얹혀 졌을 텐데, 겨우 한 장 때문에 제 할 일을 다 못하다니. 친정집에 살고 있는 내 역할과 비슷하다.

 

꽃은 맺었으나 제 몫을 다 못하고 밭고랑에서 시들어 가는 담배꽃, 인생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농사일만 하시다 가신 아버지 같은 꽃이다. 형에게 밀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한평생 농사일로 뼈 빠지게 일한 당신은 결국 잎을 위해 밭고랑에 버려진 담배꽃이 아니었을까. 담배꽃을 보니 끈끈한 진액이 묻은 옷으로 묵묵히 일만 하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내가 너희 여섯을 키웠는데, 너희는 여섯이 나 하나 간수 못 해 요양병원에 데려다 놓았냐고 말씀 하셨단 소리를 듣고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다.

 

항아리를 닦는다. 깊은 울림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마음을 다잡아 세월을 닦는다.

 

냉면을 바라보며 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아빠와 딸, 아들 셋이서 먹었던 냉면 두 그릇이었는데, 이번에는 엄마와 딸이 냉면 그릇을 앞에 놓고 바라보기만 할 뿐 끝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사람마다 지닌 재능과 쓰임새가 다를 수 있다. 누구에게나 꽃 피는 절정의 때는 따로 있으리라. 훗날의 나는 분명 앞서가는 타인보다 더 많은 걸 얻으리라 확신한다. 타인의 삶에 나를 끼워 맞추려고 안간힘 쓰고 가슴 아파하던 그동안의 나를 도닥여주고 싶다. 안타까운 발돋움 대신 느리게 가는 나를 껴안아 주리라. (작가님이 지금부터라도 더 많은 글들을 쓰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은 글들을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다려 본다.)

 

나는 인연이란 말이 참 좋다. 찬란하게 빛나는 시간을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같이 보내고 있으니까. 때로는 눈물 나도록 슬픈 시간도 있을 테고 기쁠 대 같이 웃어줄 인연들인 사람들. (인연, 내가 정말 좋아하는 단어인데 작가님도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다. )

 

톨스토이는 단편 <세 가지 질문>에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 때는 지금이고,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할 일은 지금 이 순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이라 했다. 그 소중한 인연을 기반으로 톨스토이 말대로 지금 이 순간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며 살리라. 물론 사랑한다는 말도 하면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에서 보랏빛 봄까치 꽃이 봄을 알리고, 헐거워진 포슬포슬한 흙을 헤치고 돋아나는 새싹들의 아우성이 들려오는 해토머리다. 잠포록한 날씨, 산수유 목련 몽우리가 더 도톰해졌다.

 

요즘 길에 떨어져 있어도 경제성이 적어 줍지 않는 1, 5, 10원짜리 주화 테두리는 아무 무늬도 넣지 않은 평면형이다. 오백 원, 백 원, 오십 원 주화는 각각 120110109개의 톱니 바퀴가 들어 있다고 한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잠을 살 수 없고, 장식품은 살 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살 수 없고, 책을 살 수 있지만, 두뇌는 살 수 없는 데도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았었다.

 

낮은 곳에 서고 보니 눈가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치장은 허술하지만, 마음이 따뜻한 이들이 있다. 내가 둘을 가졌으면 하나를 나누고 남이 두 개의 등짐을 지고 있으면 한 개를 덜어줄 줄도 안다.

 

사람의 성품도 꼭 가래떡 같다. 너무 물러도 안 되고 너무 강해도 힘들다. 많이 무르면 처음에는 좋을지 몰라도 오래가지 못하고 질린다. 덜 굳으면 떡살이 묻어나고 모양도 나오지 않는다. 너무 굳으면 엉덩이를 들어서 힘껏 힘을 가해도 손만 아프지 잘 썰어지지 않는다. 적당히 굳어야 잘 썰리고 모양도 마음에 든다. 그러나 적당한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상대는 내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내 생각을 바꿀 수는 있다.

나는 상대를 바꾸려고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이순이 가까워서야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이제 막 군인의 삶을 살려고 하는 딸은 나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새겨들어야 하는 말 같다. 내가 바뀌어야 하는데 상대를 바꾸려고 하다가 결국 내가 부러졌다. 결국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어머니이지 여자란 생각을 안했다. 내가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고 나 역시 같은 처지에 있고 보니, 재혼을 시켜드릴 걸 후회가 된다. 치매가 있으신데 가끔 정신이 좀 돌아올 때면 나고 결혼하라고 성화다. 시원찮은 남편이라도 남편 밥은 누워서 받고, 자식 밥은 서서 받는 것이야.” () 요양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하는 내 옆에서 엄마를 어머니로만 보던 딸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날씨가 몹시 추웠던 날로 기억된다. 부엌에서 손을 호호 불며 음식을 장만하여 밥상을 들여간 뒤 시어른들이 앉아 계신 상에 국그릇을 놓는데, 그릇이 손에서 저절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부엌에서 손이 꽁꽁 언 것이다. 식구들 식사가 거의 끝날 때까지 언 손을 녹이는 나를 안쓰럽게 지켜보시던 시아버님은 이듬해 부엌을 입식으로 고치셨다. ( 멋진 시아버님 파이팅!, 나는 두 며느리에게 이런 시아버지일까? 아니면 둔한 시아버지일까?)

 

겨울 무렵이면 온몸이 아프다. 아프려고 한 것도 아니고 생각한 것도 아닌데 왜 아프지?’ 생각해보면 제사가 다가오고 있다. 해마다 한두 달 전부터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마음이 아팠다. 이제는 좀 잊으리라. 늘 우울하던 아이들 얼굴에 웃음이 조금씩 번지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마음을 추스르려는 의지와 달리 겨우내 아프다.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계산기 주판, 주판이나 계산기로 산출할 수 없는 무한대의 숫자는 무엇일까? 주판을 보며 어렸을 적 양발에 하나씩 묶어 스케이트 타면서 놀던 물건이라고 신기해하는 딸을 보며, 무한대의 숫자는 사랑이라고 깨단한다.

 

치자꽃 꽃말은 청결, 순결, 행복, 한없는 즐거움이라 하는데, 난 순백색 꽃을 보면 그리움이 떠오른다. 청결하고 순결했던 언니는 폐암을 극복하지 못하고 갔다. () 꽃은 여름이면 피어 치자꽃내음 향기롭기만 한데, 이시 년 전에 간 언니는 추억 한 움큼 속에 있다. 품과 품 사이, 추억과 인생 사이에서 꽃향기로 머물러 있다.

 

가을걷이한 채소와 알곡들이 고시고실 말라가기 좋은 계절. 들판에는 자신들 세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한 식물들이 마지막 혼신을 다하듯 꽃을 피워 내는 시월이다 내가 몇 번째 시월을 맞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생의 사계절에서 가을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연의 시간 속에서 시월의 뜨락일지라도 열심히 살아가는 현재가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절정의 때는 따로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한 언제나 화양연화. 인생 후반의 화양연화는 더 짙고 화려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