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르(박서영), 어크로스, 2020

그루 터기 2021. 12. 27. 16:09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르(박서영), 어크로스, 2020

 

나에겐 몇 명의 미혼 친구들과  가까운 친척중에서도 미혼이 있다. 그러나 비혼인 경우는 잘 생각나지 않는걸 보니 아마도 가까운 곳에는 없는 것 같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비혼에 대한 생각을 할 기회가 되었다.   한 번도 비혼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비혼에 대해 거부 반응이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결혼제도라는 것이 인간이 만든 것이므로 비혼도 인간이 결정한다고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거다. 내가 가지 않은 길을 누군가 가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져본다.   ( 이 책에 비혼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

 

저자 소개

무루(박서영)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 안내자.

스무 살 무렵 늦은 성장통이 시작됐다. 그때부터 그림책을 읽었다. 성장기에 읽은 책을 다 합해도 그 시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림책 속에서 기쁨과 슬픔의 여러 이름들을 알았다. ‘사는 게, 세상이 다 그래라는 말을 밀쳐놓을 힘도 얻었다. 비혼이고 고양이 탄의 집사이며 채식을 지향하고 식물을 돌보며 산다. 예전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차를 우리고 요리를 하며 다양한 분야의 아마추어로 살았다. 가장 오래 한 일은 15년 남짓 아이들과 책을 읽고 글을 쓴 것이다. 지금은 어른들과 그림책을 읽고 문장을 쓴다. 세 조카와 언젠가 태어날 그들의 아이들에게 재밌고 이상한 이모이자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림책 섬 위의 주먹, 마음의 지도, 할머니의 팡도르를 번역해 소개했다. 여러 창작자들과 함께 책을 만들고 있다

 

 

독서 메모

 

지난 몇 년 나는 어른들과 그림책을 읽고 문장을 쓴다. 그전에는 오랫동안 아이들과 온갖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책을 별로 안 읽었다. 책 안 읽는 아이와 책으로 일을 하는 어른 사이에 무엇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그림책이 있다. 어른이 되어 읽기 시작한 그림책 때문에 어느 날 세상 모든 책이 재미있어 졌다더라는 이야기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그림책은 한 여인이 어른으로 살아온 긴 시간의 흔적들을 재료 삼아 만들어졌다. (...) 그 손은 오래된 것들을 쉽게 버리지 않는 손이고, 때로는 그것들을 모두 꺼내 과감히 자르는 손이며, 끝내는 섬세하고 다정하게 깁고 이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낼 줄 아는 손이다. 나이 든 어느 날의 내 손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손이기도 하다. 오래 품고 있던 생각들을 천 삼고 아끼는 그림책들을 실 삼아 썼다. 쓰는 동안 나의 쓰기가 할머니의 바느질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기로 결심한 아이들이다. 성장은 언제나 균열과 틈, 변수와 모험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그 속에서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들을 발견하며 조금씩 자신을 완성해 나가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책을 단 한 권만 읽은 사람이라는 말이 맞다. 이제 막 하나를 알게 된 사람. 혹은 남들보다 하나를 더 안다고 믿는 사람의 확신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무지하다는 겸손을 상실한 인가의 오만이란 얼마나 폭력적인가.

 

어른이 되어서야 그 마음을 짐작한다. 살아보니 경험의 총량에 비례하는 지혜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나를 어딘가로 움직이게 하고, 다시 설 수 있도록 일으켜 주었던 말들은 언제나 나를 잡아끄는 말이 아니라. 나를 안아주는 말이었다.

 

진실도 작게 말한다. 무려 2500년 된 말이다. 목소리가 절로 작아진다.

 

엄마들 사이에 이런 괴담이 있다. ‘늦게 온 사춘기가 더 무섭다’, ‘지랄에는 반드시 총량이 있다.’, 맞다. 말 잘 듣고 온순하던 맏딸이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사춘기를 선언하면 부모는 당황한다.

 

궁금하면 해 본다. 새로운 것이라면 해본다. 망할 것 같아도 일단 해본다. 하다못해 재미라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재미난 것들이 모여 재미난 인생도 될 것이다.

 

나는 스스로 고독하게 살기를 선택했다.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조금 외롭게 보내고 있다. 외롭기 때문에 자유롭고 고요하며 느슨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지키고 채워준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세상과 연결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세상 속에서 내가 무엇이 되고 어떤 것을 해낼 수 있는지도 알고 싶다. (...) 혼자지만 더 넓은 지도를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 이 마음은 지금도 좋지만 더 좋아지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더 절박한 마음이다.

 

심란해질 때 프레드릭을 생각하면 마음이 좋다. 서로 잠잠히 제 할 일을 하는 들쥐들의 자유로움이 좋다. 각자의 노력을 재지 않고 나누는 너른 마음도, 시인이라고 인정해 주는 동료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나도 알아라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프레드릭의 자신감도 좋다.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고, 낯선 것을 포용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어떤 소중하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마음이 좋다.

 

또래 집단에 소속되지 못한 아이가 최선을 다하는 일은 친구를 찾는 일이 아니다. 태연을 가장하는 것이다. 친구가 없다고 울 수도, 원망할 수도 도망치거나 애원할 수도 없으니까. 어떻게든 무너지지 않고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 견딜 만하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게 정말 스스로에게는 나쁘다.

 

나에게 사람 인의 두 획은 넓게 벌린 발이다. 씩씩하게 걸어가는 한 사람의 다리 말이다.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걷다가 가끔은 누군가를 만나 함께 걷거나 서로의 손을 잡아줄 수 있다. 그런 시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도 안다. 그러나 기왕이면 혼자서도 잘 걷는 길이면 좋겠다. 좋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나타났다가 또 어딘가로 사라지더라도. 우선은 혼자서, 두 발로, 씩씩하게 걷고 싶다.

 

이상한 것들은 자주 오해받고 소외된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이상한 것에 마음이 끌린다. 그럴 때의 이상異常은 이상理想을 조금 닮았다. 이상사이의 교집합 속에는 선한 이들의 각자의 본성대로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자유로움이 있다. 노력의 방향이, 모두가 정상에 속하게 만들기보다는 누구도 어디에도 속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쪽으로 움직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다른 것을 배척하지 않고, 낯선 것을 포용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 어떤 소중하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마음이 좋다.

 

나는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고 싶다. 이모는 자주 엉뚱한 일들을 하고 낯선 것들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여기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가족, 집안, 어른에 대해 나는 조카들이 태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에게 어른으로서의 내 역할은 아마도 행복의 변수가 되는 일이 아닐지. 세상의 언저리에서도 재미나게 잘 살아가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것이 아이들과 가족으로 인연을 맺은 내 몫의 책임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물론 나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87층 의 늪지에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하는 학어들 중에 하나는 내가 아는 악어다. 정글맨션이 마지막에 등장하기로 했던 바로 그 악어 말이다. 나는 안다. 틀림없다.

 

그림은 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감정에 닿는다.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기 때문이다. , 크기, 음영, 구도, 비율, 질감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온다.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 더 강조되는 방식으로. 그래서 그림책은 종종 줄거리를 요약하기가 곤란하다.

 

교통사고에는 가해자가 있지만 로드킬에는 가해자가 없다. 도로 위에서 죽어가는 동물들의 고통에는 어떤 책임도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원인은 분명히 있다. 누군가는 묻는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고통이 있는가. 길에서, 동물원에서, 도살장에서, 사냥터에서, 번식장에서 죽어가는 동물들의 고통에 우리는 계속 침묵해도 되는가.

 

하나의 죽음이 얼마나 많은 슬픔으로 이어지는지 우리는 안다. 죽음은 소멸인 동시에 상실이기도 하니까.

 

인간이라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자꾸 상처를 받는다. 반복되는 상처로 내상이 기어갈수록 점점 인간이 싫어지려 한다. 그럴 때 얼른 문 하나를 떠올린다. 고양이라는 이름의 문이다.

 

경험은 한 번도 열어보지 못한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세계가 한 칸씩 넓어진다. 새로 문이 열리면 세계의 모양도 크기도 달라진다. 새로 문이 열리면 세계의 모양도 크기도 달라진다. 열리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세계. (나는 아직도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워보지 않아서 인지 저자의 마음을 100퍼센트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글 중에 있던 누군가처럼 공공장소에서의 길고양이에게 음식을 주거나 거두는 일은 반대하는 사람이다. 각각의 가정에서는 몰라도. 지난번 TV에서 길고양이와 공생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주제는 같이 살아간다는 내용이었는데 나는 불편함이라고 읽고, 동물사랑이라고 했는데 이기심이라고 읽고 말았다.)

 

나도 안다. 허무주의에 빠져 삶은 체험하는 대신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 아마도 어른이 된다는 건 모순과 부조리와 불행의 중력 속에서 힘껏 저항하는 경험을 하나씩 늘려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그럴 수 없는 순간을 맞게 되었을 때는 그것을 잘 감내하는 일이기도 할 테다. 그래도 속절없이 마음이 무너지면 나는 세상에 구멍이 있다고 큰 소리로 말하는 이야기들을 읽는다.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 이야기들. 너무 쉽게 타협하지 않는 이야기들 말이다.

 

나는 결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려면 우선 그 일에 대한 욕망이 있어야 나다. 나에겐 결혼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 어떤 판타지도 생기질 않았다.

 

선을 보는 일은 끔찍했지만 좋은 것도 있었다. 나를 다 안다고 섣불리 확신하지 않는 예의 바른 상대의 진지한 질문에 진심으로 대답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왜 일하는 시간이 그리 짧은지, 왜 돈을 더 벌려고 하지 않는지, 결혼에 대한 어떤 이상이 있는지, 무엇이 나의 삶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 되는지. 신기하게도 낯선 사람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대화의 깊이는 관계의 거리가 아니라 경청하는 태도에 있다는 것을

 

이가 빠진 동그라미와 모서리가 닳은 조각들 속에서 함께 데굴데굴 구르며 마흔이 되었더니 이제는 책장 너머로 이런 목소리도 들려온다. 가보지 않고 장담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걷는 것보다 중한 건 어쩌면 걸음걸이라고.

 

실패한 채식주의자가 되는 대신 나는 게으른 채식지향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여전히 고기를 머고, 어떤 단호한 각오나 결단도 없지만 내 마음의 방향은 확실히 채식을 향해 있다.

 

내가 먹고 입고 쓰는 것들은 곧 나다. 그것들은 내 삶의 문자에서 명사가 된다. 나의 명사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살다 죽어간 동물들의 이름이다. 명사를 바꾸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 채식지향적인. 오래 품고 있엇던 이 형용사가 더디겠지만 확실하게 내 문자의 품사들을 바꾸어 줄 것이다.

 

노인이 아니어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노년의 삶을 위협하는 요인은 다름 아닌 가난가 질병이라는 것을.

 

노년의 삶에 필요한 세 가지 조건에 대한 질문을 이렇게 바꿔본다. ‘당신은 어떤 노인이 되고 싶은가?’ 우선 좋은 습관을 지닌 노인이 되고 싶다.

 

아끼는 마음이 자신을 초과하는 사람. 그래서 타인과 타자에 대해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마음을 나누는 사람.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또렷한 흔적을 남기는 사람.

 

나에게 노년이란 상실의 의미이기보다 완성의 의미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마침내 내 삶이 한 줄의 아름다운 유언이고 유산이 되기를 바란다. 마거릿 와일드가 쓴 할머니가 남긴 선물과 미스카 마일즈가 쓴 애니의 노래처럼.

 

 

기왕이면 재미있고 신기하고 이상하고 궁금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작고 귀엽고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이 오밀조밀 공간을 채우고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이 그곳에 깃들기를.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며 서로의 마음에 어떤 흔적이 되기를. 슬프지만 아름다운 일들에 대해 함께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 여정이 있기를 나는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