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화판』, 권윤덕, 돌베개, 2020
저자 소개
권윤덕
서울여자대학교 식품과학과와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과를 졸업했다. 이후 미술을 통해 사회참여 운동을 해 오다가 1995년 첫 그림책 『만희네 집』을 출간하면서 그림책 작 가의 길에 들어섰다. 동양 재료를 바탕으로 산수화와 공필화, 불화를 공부하며,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그림책에 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 『만희네 글자벌레』, 『시리동동 거미동동』, 『고양이는 나만 따라해』, 『일과 도구』, 『꽃할머니』, 『피카이아』, 『나무 도장』, 『씩스틴』이 있다. 한국출판 문화상, CJ그림책상, 올해의 여성문화인상-청강문화상,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 등을 수상했다.
독서 메모
내 머릿속에는 세 개의 방이 있다. 일상을 살아가는 현실의 방, 작품 구상을 넣어 두는 창작의 방, 그리고 그 누구의 간섭 없이 제멋대로 노니는 꿈결의 방.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작은 하얀 화판을 가지고 태어난다. 화판에 무엇을 담아 어떻게 그려 갈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수없이 많은 탐색선을 그을 수밖에 없고, 대부분이 비뚤고 망친 선투성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지지 않을까. 거기서 다시 그려 나갈 실마리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사정이 이런데도 『만희네 집』의 그림이 따뜻하고 마음으로 그린 것 같다고 이야기해 주시는 감사한 독자분들이 있다. 아마도 그건 매일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돌보고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내가 가장 깊숙이 들어가 있었고, 그 시간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어 놓으려는 바람이 그림으로 발현됐기 때문이 아닐까. 하루 종일 집안을 맴돌며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짬짬이 그렸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에 느꼈던 행복을 어린이들도 느끼고 스스로 행복하기를 바랐다. 책장을 넘기다가 자기 옷에 담긴 이야기를 옷장에서 하나씩 꺼낼 수 있기를 바랐다. 표지를 넘겨 자잘한 액세서리 그림으로 가득한 면지를 마주하고는, "엄마는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 예뻐?"라고 물어봐 주기를 기대했다.
어린 시절 내가 당했던 폭력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가 그제야 내가 몸과 마음이 크게 다쳤다는 것을 알았다. (…) 나 자신을 마주하기보다 사회로만 내달리다가 미술운동을 정리하고 그림책을 만났다. 그러면서 내면을 조금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 그렇지만 성폭력 경험이 나의 잘못이 아님을, 내 몸이 더럽혀진 게 아님을 더욱 확실히 깨우치게 된 것은 책을 내고도 한참 후인 2003년 제 1회 성폭력피해생존자말하기대회에 참석하면서 부터다. 어릴 때 겪었던 성폭력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한 자락을 집요하게 끌어오고 있으니, 어찌 보면 그 경험과 분리된 나는 존재하지않는다.
가족을 묘사한다면 이제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 부모 가족, 조손 가족, 다문화 가족, 심지어 소년소녀 가장의 가족까지도, 가족의 형태와 상관없이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 행복도 여러 갈래라는 사실을 새로 발견하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큰 책장에서 벌레들이 글자를 먹고 사는 거야. 먹는 것을 좋아하는 벌레가 매일 책을 뒤져서 맛있는 낱말을 만들어 먹는데 ….. 고소하고 얼큰하고 새콤달콤하고 달짝 지근하고…”
학교 갔다 돌아온 아이는 아랫입술로 윗입술을 밀어 올리며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표정을 짓고, 어느 날은 "힘드니?" 물어보면 눈 안으로 눈물이 와글와글 고여 눈을 크게 뜨고 눈동자를 굴리며 눈물을 말린다. 내가 어렸을 때처럼, 아이가 눈물이 하도 말ㄴㅎ길래 하루는, “그래, 울 수 잇다는 것은 소중한 거지. 어른이 되어서도 멋진 음악을 듣거나 좋은 그림을 보며 감동해서 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울 때마다 500원을 주기도 했었다.
5학년을 마치고 종업식 날. 선생님이 학생들을 하나씩 품에 안아 격려하고 교실 밖으로 내보냈는데, 그 대 선생님 옆구리로 얼굴을 내밀며 빠져나오는 운지를 보았다. 운지는 두 눈이 빨갛게 젖어 있었고, 그걸 보던 나는 운지 안으로 들어가 운지가 되었다.
나는 사회 적응에 절대적인 가치로 삼아 어린이들의 본성을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어린이는 나름 나름의 기질과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다. 각자 그것을 밑천 삼아 사회 안에서 서로 보완하고 어울어지면서 저마다의 행복과 의미를 찾아간다. 사회의 기존 가치나 질서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화해해 가면서, 새롭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인류의 오랜 생각을 읽어 내는 글자벌레는 그런 지혜를 가진 존재라고 믿고 싶다.
열 살이면 바다에 나가 물질을 배우는데, 바닷길은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지 죽어서 나올지 모르는 저승길과 다름없다는 것. 물속에서 욕심을 내면 아차하는 순간 목숨을 잃는다고, 한 달 전에도 물질 나갔던 한 사람이 돌아오지 못했는데 그런 소식을 들으면 다시는 물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하늘이 푸르다”라는 글귀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막막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너무나도 분명한 말이지만 문장 그대로 하늘을 푸르게만 그린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마치 선승의 화두처럼 입안에서 되뇌면 되뇔수록 미궁에 빠져 버리는 글귀였다. 글이 함축적인 만큼 그림 역시 대상을 직접 묘사하는 방식은 맞지 않았다.
내 내면의 이런 간극은 그림책을 한 권, 한 권 만들면서 조금씩 좁혀졌다. 새 책에 들어갈 이것저것을 고민하며 주인공과 한두 해를 살다 보면, 주인공 내면 깊숙이에 있는 또 다른 생명의 심지와 만난다. 그들과 대화하며 길어 올리는 이야기는 그림책의 내용이 되면서 동시에 나의 성장 스토리가 되기도 한다. <고양이는 나만 따라 해>를 만들 때의 경험이 그렇다. 위협에 직면하면 온몸을 부풀리는 고양이처럼, 아무리 하찮은 생명일지라도 자신을 지키고 키워가는 힘을 내부에 가지고 있다. 잘 먹고 잠 잘 자던 매일 세포가 바뀌며 몸이 새로워지듯, 마음과 몸의 상처도 스스로 치유해 가는 힘이 우리 안에 있다. 이런 믿음은 <고양이는 나만 따라 해>에서 시작해 <꽃할머니>를 거치고 <피카이아>로 옮겨 가면서 더 확실해졌다.
하루 일을 마칠 즈음이면 돌돌 말린 대패밥과 고운 톱가루가 작업장 한편에 수북이 쌓이고, 결이 거친 목재는 분홍색 뽀얀 속살ㅇ르 드러내면서 다른 한편에 나란히 세워진다. 나무 낸새 가득한 그 안에 앉아서 생각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문짝이 집을 일으켜 세우고, 그 문으로 사람들과 온갖 정이 드나들겠지’
내가 일본군 ‘위안부 ’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여서운제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읽은 문건에 큰 충격을 받았고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그 분들에게 내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 그 후로 이런 질문을 늘 마음 한구석에 담아 두고 있었다.
실제로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 뿐 아니라 한국 정부에 대한 분노도 크게 가지고 계셨다. 1945년 해방 이후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첫 증언을 하시기 전까지 그들은 사회의 무관심 냉대 속에서 살아왔고,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 내는 이데올로기적 폭력 속에 갖혀 있었다. 여기에 더해, 베트남전뱅에 참전했던 한국 군대가 베트남 여성에게 많은 상처를 남긴 사실은 한국 사회 역시 전시 성폭력 문제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답변을 끝내고 수업을 참관했던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린이들의 질문에 아픈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내 심경을 토로했다. 선생님은 자신도 학생들에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는 편인데, 다만 그들에게 직접 일러주어야 할 것과 스스로 생각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을 구분하고, 나아가 배운 것이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이끄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교육법에 깊이 동감했다. 어른들이 역사적 사실을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어린이들의 반응이 달라진다는 것, 따라서 어른이 어떤 관점과 태도를 가지느냐가 교육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에서도 서로 공감했다.
<꽃할머니>의 일본어판 출간의 의미가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출간 전까지는 <꽃할머니>가 일본에서만 출간되지 못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있을 것이라고 위안을 해 왔다. (…) 출간은 할머니가 불확실한 기억으로 증언을 의심받고 부정당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살아오신 삶 그대로의 모습을 사회에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회가 할머니에게 어떤 증언을 요구하는가'의 문제이자 할머니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임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할머니를 감싸 안는 일이었으며, 동시에 내 작업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진행된 심리 테스트에서 아이들 모두 자존감이 크게 올라간 결과가 나왔다. 수업 내내 선생님들과 키스, 도서관 관장님과 사서들까지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작은 것까지 하나 하나 상의하고 결정하며,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병원에 사는 유기견들을 보면 그 어린이들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구나, 사람받으면 덜 아프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버제스 동물군이 폭발적으로 생겨났다가 그 후에 한꺼번에 멸종되었다고 합니다. 피카이아는 그 힘든 시기를 견디고 살아남았어요. 우월해서 살아남은 건 아니었어요. 중요한 건 피키아이는 그저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동물이 진화해서 척추동물과 인간이 생겨날 수 있었지요. 누구에게나 살아가면서 힘든 시기가 있을 거예요. 그걸 견뎌 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의미 있어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야만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소중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이후의 삶에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으니까요. 앞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꿀 힘이 생길 수도 있지요. 피카이아처럼요. 그래서 그런 가능성을 무한하게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한 것입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악마, 미개인, 빨갱이, 반동분자, 바퀴벌레와 같은 존재가 돼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없애야 할 적이 만들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서라면 아무리 잔인한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건을 반성하고 책임자를 엄중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사회는 그렇게 잔인함을 용인하게 되고, 훗날에는 엄연한 사실조차도 부인하고 잊혀진다. 학살은 늘 이런 과정을 밟는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학살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아홉 명이 죽는 것도, 한 명이 죽는 것도 우리는 원치 않는다고 외치며 제3의 선로를 깔아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멀고 어렵고 낯선 길이라고 해도, 그래서 좋은 결과를 충분히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그림 그리기는 매번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이러 저리 헤매고 난 후에야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생각이 그림 속 형상으로 화판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책이 나오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 다시 그림을 펼쳐 보면, 그때 어떻게 그려 냈는지 신기할 때가 많다. 다시 해보라면 선뜻 나설 자신이 없다. 작품을 구상하면서부터 차곡차곡 쌓인 감정을 그림 속에 온통 쏟아 붓고 나면 다시 그 감정,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다음 새로운 책을 시작할 수밖에 없나 보다.
20장이 넘는 그림이 일관된 흐름을 가지려면 긴 호흡이 필요하다. (…) 그렇게 망친 그림에서 조화의 아름다움을 하나라도 발견하면, 그 단서를 근거 삼아 다시 하얀 새 화판에서 새롭게 시작한다. 조화로움, 아름다움을 찾아가 끝내 완성하는 것, 그것이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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