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게 낯선 곳에서 너를 만났다. 』, 이주영, 나비클럽, 2017
이주영 작가님의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를 읽고 두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친구와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학창시절과 일본의 유학시절의 이야기들이 특히 가슴에 와 닿았다. 물론 이탈리아나 프랑스 생활에서의 우정도, 남편과의 우정(?)도 특유의 글솜씨로 엮어냈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 내 경험과 비슷한 곳에서는 불연 듯 친구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지금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연락하지 않는 S가 더욱 생각나는 밤이다.
저자 소개
이주영
일본 메지로대학에서 일어일문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잡지사 기자, 방송국 구성작가와 PD, 번역가와 통역가로 일했다. 서른 중반에 로마 제1대학 라 사피엔자 동양학부에서 또 공부했다. 로마에서 만난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여 이번엔 파리에 살고 있다. 일본어, 이탈리아어에 이어 졸지에 프랑스어까지 공부하게 된 터라 걸어다니는 비교언어학자이자 멀티링구얼 욕쟁이다. 지은 책으로 『사무치게 낯선 곳에서 너를 만났다』와 『한 달쯤 로마』, 『한 달쯤 파리』, 그리고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등이 있다.
독서 메모
둔해빠진 난 이제야 알게 되었다. 든든한 내 버팀목의 정체를. 내가 누구였는지. 어쩌다 내가 낯선 타지를 떠돌다 낯선 남자를 만나 엉뚱하게 결혼해서 이곳에 살게 되었는지. 아직도 가끔씩은 사무치게 낯선 파리에서 어떻게 외로움도 우울함도 버텨낼 수 있었는지.
수많은 생각과 욕망, 걱정들에서 놓여나 따뜻한 휴식이 허락되는 곳, 마음이 통하고 서러움이 사라지는 곳. 친구라는 공간이다. 언제나 똑같은 자리를 맴돌던 우울하고 소심했던 나는 그 공간 안에서 꿈꾸고 성장하여 지금의 내가 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용기다. 도움을 구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은 자존심보다 강한 용기다. 유진은 내가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줬다. 그녀의 용기가 열쇠였다. 용기는 자기 이야기 속으로 당당하게 상대방을 초대할 수 있는 진정한 자존심이다. 베로니크에게 메일을 썼다. 핫산을 닮은 친구 유진에 대해 이야기했다. 며칠 후 , 베로니크는 핫산이 용기를 냈다는 소식을 전하며 기뻐했다.
예전의 해맑게 개구진 미소가 그녀의 입가를 스친다. 친구의 눈 속에 내 얼굴이 보인다. 내 몸이 다시 온갖 색깔들로 채워진다. 나는 또다시 더 이상 투명인간이 아니다.
마음이 시키는 짓과 우리가 철없다 생각하는 짓의 차이는 거의 없다. 마음이 시키는 짓을 그대로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지혜처럼 살면 철없다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일 뿐이다. 아니다. 마음이 시키는 짓을 따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혜처럼 사는 사람들을 철없다 몰아세운다. 일종의 질투심이다.
아무래도, 열심히 살아야 할 것 같다. 친구라는 세심한 감시자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사실 열심히 사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속편한 일이다. 결과가 어떻든 적어도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미련이 남지 않으니까. 친구라는 너그러운 감시자가 옆에서 인심 좋게 도와줄 테니까.
그는 무려 9개국의 여자들을 동시에 만나는 신기를 발휘하며 화려한 연애사업을 펼쳤다. 그의 사업에는 엄격한 원칙이 있었다. 순진한 여자와는 하지 않는다는 것. 순수하고 착한 여자를 다치게 하는 것은 ‘선수’의 도리가 아니다. 진정한 페어플레이어, 자유로운 코즈모폴리턴. 그 자체다.
치사하게 살지 않는 것. 그가 사는 방식이다. 그가 생각하는 치사하게 살지 않는 것이란,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것.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 것. 어떤 일이 있어도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 여유가 있을 때 아낌없이 쓰는 것. 여자한테는 얻어먹지 않는 것. 특히 어린 것한테는 절대 얻어먹지 않는 것이라 했다.
명건에게 산철쭉은 아픔이아 내가 많이 아프던 밤, 명건은 나만큼 아팠던 거다. 지나친 아픔은, 버거운 슬픔은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마음에 나는다. 습관처럼 내 몸을 맴돈다. 슬픈 시밖에 쓰지 못하는 명건. 사람들을 웃기는 명건의 슬픈 시가 나는 많이 아프다.
명건을 보내고 그날 저녁으로 남을 콜라를 마셨다. 김이 빠진 콜라는 들쩍지근한 냄새만 풍겼다. 탄산이 없어 오히려 내 입에는 맞았다. 명건이 내 몫으로 남기고 간 콜라를 한 모금 한 모금 천천히 마시며 나는 그 날도 거뜬히 밤새워 공부할 수 있었다.
콜라는 나에게 소중한 친구 명건을 떠올리게 한다. 남편이 미처 다 버리지 못한 콜라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음식창고에서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테이블 위 스탠드 밑에는 엄마 같은 내 친구의 손길이 한 땀 한 땀 묻어 있는 레이스 손뜨개가 깔려있다. 나중에 결혼하면 쓰라고 했던 당부는 지키지 않았다. 나는 결혼 전 서울 효자동 내방에서도, 로마의 내방에서도 그것을 사용했다. 동그랗고 새하얀 레이스 손뜨개는 밤하늘의 달처럼 어김없이 나를 따라 다닌다.
폼생폼사들의 기본은 꿈을 꾸는 거다. 꿈꾸는 사람은 반칙을 싫어한다. 반칙이 난무하는 현실이 찌질하게 느껴져 꿈을 꾸는지도 모른다. 반칙은 아무래도 치사하지 않는가? 폼 나게 살고 싶어 남을 밟고서라도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을 보면 나는 말하고 싶다. 진정한 폼생폼사는 꿈을 좇는 것이라고. 인정어리고 세심하게,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하면서 꿈을 꾸는 것이라고.
한국에 돌아와 한동안 힘들었다. 원래 내 것이었던 것들에 적응하는 것은 남의 것에 적응하는 것보다 더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적응 속도는 빠르고. 적응된 뒤에는 푸근하다. 모국에 산다는 것은 언제든 오랜된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식당에서 가격을 보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을 할 수 있는 것이며, 친구 같은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다.
작년 가은 4년 만에 한국에 다녀온 후 나는 우울함에서 멀어져 있었다. 평생 나를 쫓아다닐 것만 같던 우울한 감정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 주간 친구들을 만난 것밖에 없다. 친구라는 존재는 내가 누군가의 부수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는 존재다. 그들은 내게 ‘너는 정상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너는 특별해’라고 들리게 하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 친구들 한 명 한 명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 이것이 나에게 집요하고 고약한 우울함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준다. 프랑스 작가 몽테뉴의 말대로 ‘그것이 그였고, 그것이 나였기에’ 사랑할 수 있는 존재. 친구란 특별한 존재로 나를 인식해주는 내겐 특별한 존재이다. ‘비정상’이라 쓰고 ‘특별함’이라 읽는 것, ‘특별함’이라 쓰고 ‘친구’라고 읽는 것, 그것이 바로 ‘우정’이다.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 그리운 친구 지금은 뭘 하고 지낼까 궁금해지는 친구, 많이 보고 싶은 친국 있다. 우린 누구나 그런 친구가 있다. 왜 그럴까? 그 친구와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끝까지 연락하면, 연락이 끊기지 않는다는 것을, 그 단순한 것을 우리는 모르고 살고 있구나. 그것을 몰라서, 나는 그 많은 시간을 그리움으로 낭비하고, 슬프고, 억울해서 무기력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딸에게 엄마란 아낌없이 주고도 미안해하는, 한없이 양보하는, 늘 같이 웃고 같이 우는, 하지만 딸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나는, 결국 딸을 혼자 남겨두는, 끝없는 그리움을 남기고 떠나는 존재이다.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친구다.
털털해서 편안한 것. 지적이라서 존경스러운 것, 덜렁대서 유쾌한 것. 이 모든 것은 친구이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좋은 거다. 오늘도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최면을 건다. ‘저 인간은 내 남편이 아니다. 친구다. 친구!’
그해 가을, 우리는 결혼을 했다. 빵구 난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나타났던 프랑스 지각생이 내 남편이 되다니 신기하다. “알고 지내던 외국인 친구 무슈에두아르!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우리 좋은 친구로 지내요!” “하하하! 네! 그래요!”
친구와 닮아서 친구가 되고, 친구가 되어서 서로 닮아가고…. 친구란 나와 닮은 또 하나의 ‘나’이다. 그래서 만만하고 그래서 가끔은 지긋지긋하지만 포기하기 힘든 것, 나와 닮은 내 친구이다.
많은 사람드은 ‘힘든 시절을 함게 한 사람만이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대부부느이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착하고 따뜻하다. 주위 사람들의 불행을 접하게 될 때, 우리 대부분은 위를 하거나 도움을 주려 한다. 그렇다면 우리 주위 의 대부분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친구가 없다고 한다. 친구가 없는 것은 힘든 시절을 같이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무이 아니라. 본인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내게 친구는 그저 만만하고 편안한 존재이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본다. 친구 세상에는 차별이 없다. 조금 손해 봐도 친구니까 별로 속상하지 않다. 맘에 안 드는 면이 보이면 대놓고 맘에 안 든다고 말할 수 있는 편한 관계가 서로를 성장시킨다. 무엇보다 나에게 친구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열쇠이자 내가 갇힌 틀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였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헤맬 때마다 같이 미로를 걸어준 길동무였고 어리버리한 나를 위해 대책을 강구하며 길을 제시해준 네크워크였다. 나에게 친구는 살아 숨 쉬는 지도였다.
네기 찾지 못한 ‘우정’이 어딘가에 아직 숨어있을지 모른다. 앞으로도 나는 기꺼이 술래가 되어 그것을 계속 찾아나갈 생각이다. 내 미래에 무척 즐거운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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