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

[필사]『못 갖춘 마디』, 윤혜주, 북랜드, 2021

그루 터기 2022. 3. 4. 00:04

 

[필사를 끝내다]『못 갖춘 마디』, 윤혜주, 북랜드, 2021

 

갑자기 찾아온 감기 몸살에 온몸이 노곤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코로나가 아닐까. 걱정을 하면서 필사를 시작했다. 목표는 10시간이내였는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금 더 걸린 것 같다. 

 

책을 한 번 읽고 난 다음이었는데도 가슴이 저리다. 

문득 문득 행복이 찾아온다. 

 

 

한창 워드작업을 잘 할때는 금방 했던 것 같은데 뭔가 모르지만 자꾸 오탈자가 생긴다. 

그냥 자주 생기는 정도가 아니라 속도에 지장이 있을 만큼 많이 생긴다. 

나이탓이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조금 억울한 것 같다.  특히 '는' '을'에서 가장 많이 틀리고

쌍기역 쌍디긋 등 쌍자음에서 또 자주 틀린다. 

 

그래도 목표니까 끝까지 갔다. 

 

이제 한 번의 필사가 끝났다. 

마음 같아서는 열번의 필사를 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다. 워드가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모든 시간을 이 글의 필사에만 매달리다보면 

다른 것을 해야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필사를 한 번에 했다면 두 번째 필사부터는 특히 좋아하는 꼭지 위주로 중복해서 해야겠다. 

그런데 좋은 꼭지가 너무너무 많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할수가 없어 횟수는 정하지 않아야 겠다. 

한 꼭지라도 열번의 필사를 하고 싶다. 

 

 

필사한 몇 꼭지를 소개한다.

 

 

못 갖춘 마디

 

     그분이 오셨다. 섣달 열여드레 시린 달빛 받으며 오신 모양이다. 서걱대던 댓잎도 담든 시각, 제주가 위패에 지방을 봉하자 열린 대문 사이로 써늘한 기운 하나가 제사상 앞에 와 앉는다. 촛불은 병풍에 두 남자의 실루엣을 그리며 천장을 행해 솟는다. 허리가 꾸부정한 제주가 한 순배 술을 올리고 용서라는 절을 하자. 고개 숙이고 잇던 그의 아들은 신뢰라는 절을 한다. 망자의 아들과 그 아들의 업둥이가 지내는 내 아버지의 제삿날이다.

  아버지에게 큰오빠는 못갖춘마디 같은 자식이었다. 깨진 유리온실 속의 시들어 가는 화초 같은 아들이었다. 가슴 여미는 아픔으로 무섭게 스치거나, 소용돌이치다가 비워진 쉼표와 마지막 마디의 음표가 만나 후에야 환성되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자식 때문에 더 많이 아팠고 더 많이 내어두고 보듬었는지도 모른다.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린 자식들로 인해 아버지의 상심은 컸다. 대가 끊어질 일이라며 쫓겨난 어머니를 마지막을 찾아 나선 걸음에 얻은 자식이 큰오빠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태어나자마자 골골대며 잦은 병치레로 부모님의 애간장을 어지간히도 태웠다. 시오리 신작로 길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는 늘 콜록거리며 담요에 사여 병원을 오가는 큰오빠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아버지 생의 여린내기 음반 위에서 불안정하게 구르고 있는 선율처럼 위태로웠다.

  그 후 내리 아들딸 넷을 더 얻어 여린내기로 시작된 아버지의 삶은 음역을 넓혔다. 가난했지만 자식을 인해 마음만은 부자로 살았던 그때, 아버지의 인생연주라는 선율은 안정감 위에서 봄 아지랑이처럼 따뜻하게 피어올랐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무릎을 독차지하고 응석만 늘어가는 큰오빠로 인해, 형제간에 엄살과 정 투정이라는 나지막한 외침들로 아버지의 악보선율을 그리 매끄럽지 못했다.

  약해진 마음이 더 문제였다. 허약한 몸을 무기 삼아 큰오빠는 동생들의 내리사랑까지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형의 도움을 받아야 할 오빠들이 되레 그의 가방을 메고 먼 등하굣길을 오갔다. 나와 여동생도 노는 시간이면 큰오빠를 살피러 교실로 달려갔다. 또래들한테도 따돌림을 다해 외톨이가 되어가는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형제들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다.

  어쩌다 미처 그를 돌보지 못해 다치거나 앓아눕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이 날아들었다. 그에 상반되는 벌도 달게 받아야 했다. 보통빠르기의 4분의 3박자. 내림나장조인 아버지의 선율은 못갖춘마디로 인해 불안정했다. 자연스럽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로 인해 우리들은 일찍이 가족이란 청하지 않아도 내리는 눈비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거역할 수 없는 섭리 앞에 작은 나를 느끼며 순응하는 법부터 배워야만 했다.

 

(중략)

 

     그해 시월, 삶은 완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기에 맞잡을 두 손이 필요했을까. 누군가 대문 앞에 놓고 간 업둥이를 큰오빠는 숙명처럼 거두었다. 그리고 그 업둥이를 안고 온 사람이 바로 당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는 조금씩 변해갔다.

마지막에야 완성되는 삶이 있다. 그 무엇에 대해 절실한 결핍을 느끼면서 느리게 성숙했던 내 큰오빠가 그랬다. 똑똑하고 건강했던 형제들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힘이었다. 즉흥적으로 벌하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실수도 게으름마저도 껴안고 용서하며 기다려주었던 아버지. 헌신과 인내로 못갖춘마디의 빈틈을 아우르고 포용력을 보여줌으로써 사랑과 구원이라는 완성된 연주를 이끌어 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이다. 때론 놓친 삶이라도 되돌이표로 되돌려 살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다. 연주자들은 말한다. 못갖춘마디를 연주할 때는 마디의 쉬는 부분을 명확하게 느껴야 막판 셈여림의 조절이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놓친 박자도 한 번 더 믿어주고 보듬어 주면 마지막에는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진리를.

 

(중략)

 

    아버지가 보인다. 생각을 접어보면 아버지의 사랑과 좌절도 보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틀 속에 가둬 놓은 채 기대하거나 요구하기만 했던 지난날들. 이상하다. 아이 다섯을 키우고 이제 겨우 아버지를 이해했을 뿐인데 사랑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이, 놓친 못갖춘마디의 첫음절을 붙잡고 마디마디 넘어오던 아버지를 기억하면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꿈이 이러나 춤을 춘다. 그래서 아버지께 드리는 제사는 나 자신과의 교감이기도 하다.

 

 

 

 

닭장

 

     장닭이 암탉 한 마리를 집요하게 쫓고 있다. 정분난 암수의 사랑싸움도, 수컷이 열렬한 구애 작전도 아닌 듯 보인다. 암탉은 오랜 괴롭힘을 당한 듯 장닭이 사납게 쪼아댐에도 전혀 대항하려들지 않는다.

  산벚꽃이 드문드문 핀 고졸한 암자 옆의 닭장, 짧은 머리에 비스듬히 군용 배낭을 걸친 청년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제대를 하던 날 청년은 어머니의 암자를 향해 선걸음에 달려왔지만,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서성거리기를 반나절 째다.

털이 날리고 암탉의 신음소리도 잦아들 때쯤 암자의 문이 열리고 모이를 든 어머니가 나타났다. 청년은 등 위로 조용히 다가오는 어머니의 존재를 가슴부터 느꼈을까. 경직된 자세를 풀어 가다듭니다.

  “저 장닭 격리시킵시다.”

  나지막하니 그러나 단호하게 청년이 말했다. 그때였다. 잠깐 조는가 싶던 장닭이 다시 설치기 시작했다. 장닭은 목울대가 터져나가라 울음을 반복하며 쏟아내지 못한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갈피를 잡지 못한 털이 허공에 날린다. 닭장의 평화가 깨어지는 순간이다. 닭장 속의 공기마저 장닭의 눈빛에 숨을 죽인다. 겁에 질린 암탉이 비굴하게 엎드려 짝짓기를 유도해 보지만 모질게 대가리만 쪼였다. 놀라 구석지로 몰려간 병아리들이 떼창으로 울어댄다. 병아리들의 노란 털 사이로 어미의 털과 흙먼지가 엉켜 든다. 쫓고 쫓기는 닭과 털로 아수라장이 된 닭장 안에 장닭에 맞설 상대는 없어 보인다.

  암탉의 뒤를 병아리들이 숨 가쁘게 따라 다닌다. 영문도 모른 채 구석을 전전하는 어미를 쫓아 병아리들의 짧은 다리가 굴렁쇠 굴러가듯 한다. 장닭의 횡포가 극에 달했다고 느꼈을까 청년이 잠시 비틀거린다.

 

(중략)

 

     암탉이 모가지를 외로 꼬고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냈다. 미물일지라도 바라보며 느끼는 고통의 무게는 같았을까. 고개를 돌려 허공을 향하는 어머니의 눈가에 미세한 경련이 인다. 마침내 암탉의 탈출구를 열어주려는 지 어머니가 닭장 문을 열었다. 그날 밤 청년의 할머니가 가엾은 며느리를 위해 대문을 열어 놓았던 것처럼. 그러나 겁에 질린 병아리들을 감싸 안고 도망 다닐 뿐 끝내 암탉은 문을 나서지 않았다. 닭장 문을 잡은 어머니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떠나온 걸 후회하십니까.” 어린 삼 남매를 모질게 떼어내고 등 떠밀어 대문을 나서게 했던 건 청년의 할머니였다. 의처증에 시달리며 인간이기를 망각해가는 아들을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하던 날. 청년의 할머니는 해가 진 십리 길을 걸어 어미를 보내야 하는 어린 것의 분유와 젖병을 사왔다. 그리고 그 병에다 긴 이별을 담았다.

  서 있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떠날 채비를 마친 산벚꽃잎이 날렸다. 긴 겨울을 이겨낸 가지에 잠깐 피었다 떠나가는 벚꽃잎. 청년과 그의 어머니도 그러했다.

  암탉이 등을 돌리고 구석에서 병아리들을 품고 있다. 장닭에 쪼인 모가지의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구덕하게 말라가고 있다. 그러나 눈물을 담고 파고드는 병아리들을 살뜰히 보살필 뿐이다. 오직 닭장의 안녕을 책임진다는 미명하에 끝내 장닭의 격리를 거부하는 어머니를 향해 아버지를 이해하시는 군요.” 청년의 어깨가 들썩이는 가 싶더니 맥없이 주저앉는다.

  “아버지를 위한 선택이었다.” 청년이 움찔했다. 뜻밖이었다. 이십 년이란 세월 그가 바라던 말은 아니었다. 먹먹했던 가슴이 조여 오는지 움켜잡는다. 어머니를 향해 다져 쌓았던 원망이 한순간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이윽고 청년이 돌아서 어머니를 바라본다. 향기마저 내뿜을 수 없었던 수묵화 속의 한 송이 목련꽃 같은 어머니, 청년이 나직이 소리 내어 부른다.

 

(중략)

 

     어머니는 해거름 그림자를 길게 끌며 청년이 사라져간 곳을 향해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리고 마침내 파르스름한 머리 위로 어스름이 내리자 미완으로 남아 있던 그림을 꺼내 그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라는 이름의 그림을.

  산벚꽃을 보려고 올랐던 암자에서 비구니의 눈물을 보았다. 산중이라고 혈연의 그리움과 이별이 없었을까. 돌아누운 남편의 등판에 식은 사랑이 느껴질 때, 서둘러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에 무지근해지는 날이면 나는 그 비구니가 흘리던 눈물의 의미를 생각한다.

 

 

 

 

 

 

자유로운 영혼의 추억 여행

전정구 - 전북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1.

인간은 운명처럼 부여된 생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기만의 삶을 펼쳐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혼의 자유를 누려보려는 꿈을 포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한 그 일을 윤혜주는 신중년의 나이에 당당하게 실현하고 있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생의 곡절과 간난을 겪으며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이 글쓰기에 있다는 것을 그는 늦은 나이에 깨달았다. 글감을 찾아 그것을 언어예술로 완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분노와 좌절, 허무와 고독을 치유하는 희열을 경험했다. 글쓰기는 자기성찰의 과정이며 그것이 삶의 동반자가 되어 많은 고통과 기쁨을 함께하며 그의 인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슬픔과 기쁨이 섞여 피어오르는”(노천명, <남사당>)인생길에서 혼란스러운 감정을 조화롭게 만드는 힐링이 일어났음을 작가는, 첫 작품집 못갖춘마디(북랜드, 2020)에서 암묵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봄날이 무르익어가는 사월의 만개한 꽃을 보며 그는 생의 경이와 삶의 존엄을 숙고한다. 그러면서 내가 먼저 꽃 피워 보는 것은 어떨까”(<사월의 꽃>) 자신을 되돌아본다.

 

2.

내가 먼저 꽃 피워 보려는그 마음가짐으로 작가는 미래의 희망을 상상하며 한 발기 전진”(<먼 곳>)하는 삶을 추구해 왔다. 우리는 이러한 대목에서 두렵고 불안하고 무서운 마음을 다독이며 안식과 위로를 얻는 윤혜주 스타일의 긍정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이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일 가운데 4퍼센트만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걱정이라고 한다.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안식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평온함의 근원이 긍정의 힘이다. (<먼 곳>)

 

긍정의 힘이 평온함의 근원이다. 그것은 미래의 희망을 생각하며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생을 포기하지 않는 적극적인 마음가짐이다. 첫 창작집의 여러 곳에 <먼 곳>과 유사한 대목이 발견된다. 아름다운 삶의 이면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이야기한 <가을, 자드락길에서> 가 그러한 예이다. 음과 양, 환과 비가 교차하고 고가 있은 후에 감이 오는 것이 인생이다. 아름답고 맑은 삶을 살아가는 지혜, 즉 삶의 고통이 내 존재를 맑게 한다는 깊은 통찰이 이 작품에 나타나 있다.

 

고통이 종소리가 울려 퍼져야 산사가 아름답듯, 내 인생길에 울렸을 수많은 종소리는 무엇을 위해 울렸을까. 내 삶에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내 존재의 맑은 종소리를 위함이 아니었을까. 타종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해야 할 일이다. 오늘도 누군가 종 메로 강하고 거칠게 친다 해도 머리 숙여 감사할 일이다. 저 종소리처럼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위해. 그리고 이 가을 자드락길에서 만난 모든 것을 위해서 나는 달린다. (<가을, 자드락길에서>)

 

고통의 소리가 울려 퍼지기 때문에 깊은 산속의 절이 아름다운 것이다. 누군가 나를 때린다 해도 머리 숙여 감사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산사의 맑고 아름다운 종소리처럼 내 인생을 아름답고 맑게 가꿀 수 있는 비결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시련을 받아들이면서 자드락길에서 조우한 모든 것들을 위해서 내가 달려야 하는이유도 이러한 점과 무관하지 않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최악의 상활에서도 긍정의 힘으로 그 상황을 바람직한 미래로 전환하려는 의지가 작가의 인생관을 낙관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그러한 인생관을 형성해준 것이 글쓰기였다. 그것은 일상에서 짓눌린 마음을 다독이고 달래주는 위안의 양식이었고, 무료한 듯 허무한 듯 덧없이 흘러가는 일상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활력소였다.

 

보따리를 푼다. 오방색 저고리에 물빛 고운 본견치마 한 벌, 그리고 복숭앗빛 명주두루마기 수의가 누런 담뱃잎에 싸여 있다. 행여 좀이 슬세라 세심하게 갈무리한 덕분일까. 견의 색과 광택도 그대로 살아있다. 마지막 가는 길 마음껏 호사를 누려보고 싶었던 어머니가 이승에서 손수 준비한 갈음옷이 화려하다. /……/ 시집와서 쌀 서 말을 먹지 못하고 죽었다는 깡촌이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낡은 손재봉틀 하나를 보물처럼 끼고 살았다. 어머니의 먼 친척이 이사 가면서 불려준 귀한 재봉틀이었다./……/ 재봉틀 앞에 앉은 어머니에겐 어떤 경건함이 뿜어내는 여인의 향기마저 났다. /……/ 어머니의 손끝을 거치고 간 옷은 이승의 옷보다 저승의 옷이 더 많았다. 근동의 많은 사람들이 만든 이승에서의 마지막 갈음옷을 입고 갔다. 벼를 벤 들판도 휴식에 들어간 시간. 어머니는 건조한 시간을 뭉개려 부탁받은 수의를 만들었다.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그림자 길게 문풍지에 일렁이며 한 땀 한 땀 내세에서의 평안함을 기원하며 밤새워 만들었다. 맑고 경건했던 그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어머니의 이타적인 모습을 엿보기도 했다. (<갈음옷>)

 

아쉽고 아련한 그리움을 자리 잡고 있는 어머니에 관한 기억을 푸러내면서 작가는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전통사회의 어머니상으로 각인된 모친은 재봉틀 하나로 집안 경제를 떠받쳤다. 그녀는 어떤 경건함이 뿜어내는 향기를 풍기는 여성으로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어머니를 회상하는 대목이 성격이나 모습이 아니라 향기-후각적 이미지로 변용시킨 참신함이 돋보인다. 그의 문장이 지닌 미덕은 참신한 표현과 역동적인 이미지의 활용이다.

 

이맘때면 유년의 내 고향 들녘은 파랗게 뿌리 내린 벼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시원한 바람은 가을 향해 솟아오르는 벼의 머리채를 잡고 희롱하듯 흔들어 댔다. ‘일렁일렁파란 바람꽃을 피우며 어깨를 들썩였다. ‘쏴아 쏴아소나기가 한 차례 분탕질하고 간 풀숲은 숨어든 곤충들의 가쁜 숨소리만 들리고 들녘은 숨고르기에 든다. ‘찰랑찰랑수문이 열린 도랑에 물이 가득하면 아버지는 논에 물꼬를 트기 위해 이른 아침 들녘으로 나갔다. /……/ 여름 강은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조금 더 깊어졌는지도 모른다. 그 잔물결이 간지러운 스침과 강변의 갈대 몸 비비는 소리는 달콤 싹싹했다. (<여름 소리>)

 

촉각- 간지러운 스침, 청각-몸 비비는 소리, 미각-달콤 싹싹으로 표현한 여름 강에 대한 묘사 장면은 다섯 가지 감각으로 경험했던 유년의 그 시절로 우리를 안내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희롱하듯 병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대며, 일렁일렁 파란 꽃을 피우는 바람 또한 그때의 감정을 되살려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한차례 분탕질하는 소나기와 숨 고르기에 든 들녘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생생하게 현현(顯現)한다. 사물에 운동의 기능을 부여하여 그 사물을 살아 숨 쉬는 움직임 - 행위로 그림 그린 듯 명료하게 제시한다. 실제 상황처럼 사물들 하나하나의 동작으로 여름을 실감나게 총체적으로 묘사하면서, 알기 쉬운 비유어를 동원하여 작가는 유년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뒤 숲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쌀 씻는 소리를 낸다. 문을 여니 먼 산봉우리 위로 달이 떠 있다. 고무신 코 같은 그믐달이 구름을 비켜 가고 솔잎의 향이 코끝을 스친다.(<하연>)

 

코끝을 스치는 솔잎 향과 고무신 코 같은 그믐달과 쌀 씨는 소리 등의 비유어들이 표현력을 풍부하게 하는 요인이며 글의 내용에 활기를 부여한다. “스피커 음악소리는 어르신들의 웃음소리에 밀려 바닥으로 털썩 떨어져 흩어진다.”(<낮은 시선>), “물큰하고 알싸한 것들이 가슴에 밀려왔다 밀려갔다.”(<하현>), “풀벌레 소리 자욱한”(<무인 찻집 손님>)귀때기 새파래진 찬바람부지깽이도 바빠진다는 모내기 때”(<거기, 섬안이 있었네>), 그리고 봄볕에 나른한 전신을 드러내놓고 조는 듯한 평상”(<3의 공간>)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다. 작가는 무엇을 의도했는가를 알 수 있도록 적절한 단어들을 선별하여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문장을 구성해 낸다.

윤혜주는 표현대상의 본질을 단숨에 전달하는 수사 기법의 중요성을 인식한 작가이다. <사월의 꽃>에서 이팝나무의 하얀 꽃은 우우우 합창하듯 돋아난다. 봄빛은 천지 사방에서 넘실거리고, 철쭉과 산동백은 폭죽처럼터져 오른다. 다양한 이미지와 여러 사물들의 활기찬 움직임이 화창한 어느 봄날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이 표현내용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효과를 발위하면서 현장에서 느끼는 사실적 감정보다 더 핍진한 느낌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가을은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 깊숙이 들어왔다. 어머니는 밥솥 뚜껑을 열고 잘 여문 강낭콩 한 주먹 휘익 던져 올린 뒤 풀무를 돌렸다. 돌확에 으깬 들깨와 시래기를 품은 무쇠 솥뚜껑이 들썩 거릴 때마다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 강이 깊어질 때>)

 

표현대상의 동작성을 강화하여 그것을 인간화하는 기법에 힘입어 가을은 어머니와 대등한 인물로 부각되면서 스스로 액션을 취한다.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깊숙이 들어온 가을의 역동적인 행동은 계절이 깊어졌다는 의미 내용을 함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