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 (박완서산문집 3), 문학동네, 2015
도시에서 대학을 나왔거나 또 다니는 걸로 농촌에 가서 우월감을 갖고 뭘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이 그들이 자연에서 땀 흘려 얻어낸 지혜보다 어째서 우월하냐 말이다. 쌀 나무가 어째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무식쟁이가. 외국 사람과는 의사소통도 안 되는 외국어 몇 마디를 농민보다 더 안다고 해서 농민보다 유식한 척 할 수가 있느냐 말이다.
친구들한테 당뇨병 이야기하면 그 병은 고급 병이라고 한다. 아마 그게 어떤 위로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위로 받지 못한다. 한 번도 고급의 옷이나, 고급의 집이나. 고급의 시계, 고급의 취미를 탐낸 바 없이 다만 털털한 그가 하필 병만 고급 병을 앓을 건 뭐란 말인가. 모든 고급이 그로부터 썩 물러갔으면 참 좋겠다.
한겨울에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한겨울에 돌아오기 위해 한겨울에 떠났던 것이다.
삶의 가을과 계절의 가을의 만남
예전에 인천에서 새우젓 배가 마포 강으로 들어왔답니다. 그래서 마포엔 새우젓 도갓집도 많았고 새우젓 장수들도 많이 살았죠. 요샌 인천까지 새우젓을 사러 가는 게 알뜰 주부지만 그땐 마포 강으로 새우젓을 사러 가면 굉장한 극성 부인이었답니다. 요새가 새우철 이거든요. 문득 그때 생각이 나서요
인생의 가을과 계절의 가을이 만나는 시간에 듣는 귀뚜라미 소리처럼 처량한 게 또 있을까. 남자 여자 만나서 사랑하고, 아이 낳고 살고, 늙어간다는 게 한없이 아름답게도 슬프게도 느껴졌다.
나에게서 젊음이 아주 가고, 아이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해 모조리 떠나고 나서도 아무쪼록 그와 함께 가을을 맞을 수 있기를, 나에게도 그에게도 혼자 맞는 봄은 있어도, 혼자 맞는 여름은 있어도, 혼자 맞는 가을만은 없기를 간절히 기도드리고 싶은 시간이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고 나서 혼자 돌아올 때면 왜 그렇게 허전하고 쓸쓸한지, 거의 울어버릴 것 같아진다. 하나의 소설이나 잡문을 탈하고 나서도 허전하고 쓸쓸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약간의 희열과 충족감이 있기 마련인데 입으로 말마디를 하고 나면 슬픔밖에 남는 게 없다.
조금치의 감미로움이나 도취감도 섞이지 않은 슬픔이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이런 고약한 슬픔이 싫어서 갖은 핑계, 엄살, 거짓말까지 해가며 말하는 자리라면 죽어라고 피했건만 올해도 두 번이나 그런 자리에 서고 말았다.
나는 작가가 갓 되고 나서, 앞으로 작가는 될지언정 결코 여류작가는 안 될 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작가도 일종의 직업이라고 생각할 때 여자가 가정에서 살림하면서 가질 수 있는 직업으로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늘 식구들과 같이 있으면서, 살림하면서, 그 틈틈이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몸은 같이 있고, 또 살림하면서도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시간이 가장 많은 직업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지업의 아내나 어마를 가진 식구들이야말로 불행할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밖에서 하는 일 갖고, 그 일은 기계적으로 건성하면서 마음은 집에만 있어 틈틈이 집에 전화질이나 할 수 있는 집업을 가진 주부가 식구들에게 안정감을 줄 것 같다.
우리의 자손들이 다시는, 다시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조상을 한 때 노예로 만들었던 외부 세력의 정체는 무엇이고 자체 내에 도사린 노예근성은 무엇이었던가를 보다 정확하고 정직하게 아이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다시 그날이 돌아온다. 요새로 부쩍 심해진 건망증 탓인지 몇 달 전 일도 아득하건만 28년 전 그때 일만은 아직도 어제련 듯 생생하다. 이것 또한 건망증 못지않은 병이나 아닐는지.
공돈이란 일해서 번 정당한 돈이 아니다. 수고하지 않고 돈이 생겼다는 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남이 수고해서 번 걸 빼앗았기 때문이지 결코 하늘에서 떨어진 돈이 아니다. 이런 공돈이란 조금이라도 도덕심이 있는 사람이 탐낼 게 못 된다. 돈벌이 중에도 가장 염치없고 옳지 못한 돈벌이다.
애초부터 권력이나 벼슬아치가 정직해야 된다고는 생각도 안했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잊어버릴 수가 있다 . 정말로 슬퍼해야하고 근심해야 할 일은 벼슬아치의 부정이 아니라 벼슬아치의 정직을 요구할 줄 모르는 백성의 마음일 것이다. (중략) 화내거나 욕하지 말고, 앙심 먹지도 말되 다만 잊어버리지만 말자. 우리를 업신여기는 상습적인 새치기들과 거간꾼들의 얼굴을. 우리는 벼슬아치들에게 정직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잊어버리지 말자. 거듭 안 당하기 위해선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른 새벽 계곡의 물소리가 귀에 시리고, 산골짜기마다 안개가 피어오를 때, 여관 촌 반찬 가게에 내려와 파나 두부, 감자, 당근 등을 사가지고 올라가는 청년이나 젊은 남편의 모습은 유난히 싱그러웠다.
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교사가 움직이는 행사 말고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학부형도 같이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
짜다든가 싱겁다든가 고기가 먹고 싶다든가 과일이 먹고 싶다든가 하는 불평이나 소망하곤 달라서, “예전 맛이 아니다”는 분명히 타박은 타박인데 고칠 수도 새롭게 할 수도 없으니 난감한 일이다. 그렇다고 어떻게 해달라는 소망도 아니다. 그냥 한탄일 뿐이다.
음식에 예전 멋을 빼앗는데 막중한 역할을 한 것으로 화학조미료를 안 들 수가 없다.(중략) 양념이란 음식에 따라 다르게 쳐야 하고, 음식의 제 맛을 가장 잘 살리도록 선택된다. 식초를 쳐야 제맛이 나는 음식이 있고, 꼭 생강이 들어가야 제 맛이 나는 음식이 있다. 그러나 화학조미료는 모든 음식에 덮어놓고 끼어든다. 그래서 모든 음식 맛을 획일화 시켰다. (중략) 화학조미료는 모든 음식에 덮어놓고 끼어든다. 열무김치는 씁쓸한 게 열무김치의 제맛이다. 그러나 요새 열무김치는 들척지근하다. 모든 음식이 들척지근하고 느글느글하다. 우선 어느 틈에 음식이 제 맛을 낼 때 가장 맛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들척지근하고 느글느글한 걸 맛있는 걸로 착각하도록 길들어져버린 것이다.
수많은 먹을 것들이 각기의 제 맛을 지녔다는 자연의 축복조차 우린 제대로 못 누리고 있다. 노인들이 그리는 음식의 예전 맛이 음식의 제 맛일 진대, 노망으로만 덮어버릴 일이 아니다.
효가 전통적인 도덕이라고 해서 반드시 옛말에서 그 규범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효라는 구호에 너무 아부하느라, 효란 결국 부모님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거라는 단순 소박한 뜻마저 잊어버리질 않길 바란다.
어머니의 풍부한 상상력을 거친 이야기는 본래의 이야기 보다 상당히 보태지고 가미됐음직하다. 서울 올 때까지 그림책 한 권 못 보고 자랐지만 꿈 많고 정서적으로 풍요한 어린 시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을, 지금도 뛰어난 이야기꾼이신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건전한 가풍이란 자식들이 자라 제각기 헤어진 후에도 한 가족으로 이어주는 맥락이요, 동시에 자식들의 탈선을 소리 없이 막아줄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뒤를 따라간 남자에게 우리가, 살아 있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남의 죽음에 대해 옳고 그르니 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두통이나 치통도 겪어보지 않으면 그 아픔의 진짜 모습을 모른다. 우린 아무도 아직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보지 않았거늘 어찌 목숨을 끊기까지의 고통을 안다 할 수 있으랴. 다만 죽은 사람인들 오죽해야 죽었을까 하는 심심한 애도와 함께 그런 죽음에 대해 잊어버리는 게 그런 죽음을 곱게 하는 산 사람의 도리인 줄 안다.
여자가 자기만의 일을 가졌을 때 여자에게 어떤 신기한 변화가 오나를 얘기하고 싶다. 자유로워진다. 여자를 자유롭게 하는 건 법도, 여성해방운동도 아닌 스스로가 찾아낸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남편과의 관계가 달라진다. 지배당하고 소유당하는 대상으로서의 아내가 아닐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내가 된다. 그것은 남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건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원고 한 자의 값은 그의 구두 수선 세 켤레 값의 세배 내지 다섯 배가 된다. 그럼 나는 원고 한 장으로 그의 구두 수선 세 켤레 내지 다섯 켤레만큼의 이익을 남에게 주었을까. 또 관여 그의 세 배 내지 다섯 배의 성의 한 장의 원고를 썼을까?
사춘기란 나이 먹은 사람 눈엔 꿈과 낭만의 시절로 보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겐 꿈과 낭만이 가장 심한 억압을 받는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자선 남비에 선듯 작은 액수의 돈도 못 내는 나는) 쓰고 남은 푼돈으로 천당을 사려는 심보야말로 야바위꾼 심보하고 무엇이 다를까. 그렇지 않아도 자선은 까딱 잘못하면 야바위하고 통하는 일이 많다. 고아를 핑계로 모아들인 구제품을 팔아 사욕을 채우고 피둥피둥 살이 찌면서 고아들을 헐벗고 굶주리게 방치한 야바위꾼 자선가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부자는 빵 한 조각을 희사하면 그것으로 천당의 문이 열리는 줄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서 베풀어주는 것이지 가엾게 여겨서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고등학교의 평준화는 학력저하라는 과를 남겼다. 그러나 평준화의 목적을 잘 달성돼 이제 아무도 1류 2류를 따지지 않는다. 그 대신 본인이나 학부형이나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학교에 배정되기만을 바란다. (중략) 중고등학교의 평준화는 교통지옥 완화라는 훌륭한 공을 남길 것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말의 폭력에 약하다. 단 한 펀치에 뻗는 약골이 되어, 내 앞의 위대한 폭력자 앞에 무릎을 꺾고 두 손을 번쩍 든다. 그리고 절망한다. 가슴을 칠 기력조차 없이 완벽하게 절망한다.
장미의 기억
길을 가다가 문득 발을 멈춘다.
바람이 뺨을 아리고 벌거벗은 나무는 구슬픈 소리를 내며 몸을 떨고, 눈에 뵈는 모든 것은 회색빛으로 얼어붙은 겨울날, 느닷없이 눈앞에 잎사귀 우거지고 백화가 난만한 별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그 세계는 얼어붙은 도시와 유리벽 하나를 격하고 있고, 그 유리벽은 땀을 흘리고 있어서 더군다나 비현실적인 몽환의 세계 같다.
그 몽환의 세계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유리벽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민다. 안개가 걷히듯이 난만한 꽃의 빛깔과 모양이 선명해지면서 향기가 어지럽도록 짙다.
“무슨 꽃을 드릴까요?”
장사꾼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이끈다.
“네, 장미꽃을, 장미꽃을 주세요.”
그러나 나는 사지 않는다. 어찌 돈 주고 샤랴. 그 오만을. 그 가시를. 그 절대의 아름다움을. 그러나 장미를 두고 어찌 딴 꽃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보냐. 이윽고 다시 거리로 나온 나에게 장미꽃에 빰을 댓던 기억이 한 마리 나비가 됐던 기억처럼 환상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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