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규, 『책숲마실』(책밭을 거릴고픈 숲사람), 스토리닷, 2020
나라밖에서 나온 클림트 책을 곰곰이 살피다가 문득 느낍니다. 좋은 노래라 한다면 우리말로 흐르는 노래든 일본말로 흐르는 노래이든, 늘 좋은 노래예요. 좋은 사진이라한다면 헝가리 사람이 찍었던 우리나라 사람이 찍었든, 언제나 좋은 사진이예요. 그림이라 한다면 스리랑카 사람이 그렸든 이웃날 사람이 그렸든, 노상 좋은 그림입니다. 저 좋은 노래, 좋은 사진, 좋은 그림을 사귀면서 이 삶을 좋은 넋으로 보듬고 싶습니다.
책을 만나는 일이란, 책에 깃든 사람들 숨결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손으로 이 숨결을 만나고, 두 눈으로 이 숨결을 읽고, 두 다리로 이 숨결하고 이어집니다. 책을 읽는 일이란, 책을 짓고 엮은 사람들 손길을 마주하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책집에 들러 책을 장만할 적에는 책을 내놓고 다루는 사람들 사랑을 나누고요.
잘 찍은 사진이라서 좋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잘 못 찍은 사진이라서 나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멋스러운 사진을 모으기에 좋은 사진책이 되지 않습니다. 멋이 안 나는 사진을 모으기에 나쁜 사진책이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담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를 엮기에 사진책입니다 사진을 직은 한 사람 이야기만 담을 수 있고, 사진을 찍은 사람하고 만난 숱한 사람들 이야기를 골고루 담을 수 있습니다.
버릴 책이 있을까요. 버릴 책이 없다기보다는, 저마다 다르게 아름다이 빛나는 책이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와 손자취가 서린 책이 있습니다. 1938년에 태어나 스물을 갓 넘긴 1960년대 첫무렵에 샛장수로 책을 처음 만진 발걸음은 2011년 4월 5일로 마감합니다. 숱한 책을 나르던 짐자전거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언제나 아름다운 책을 만날 수 있도록 두 손에 굳은살 박히며, 책 먼지 흠씬 뒤집어쓰신 땀 내음을 고이 건사하겠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책을 읽습니다. 마음을 갈고 닦아 삶을 읽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며 책을 읽습니다. 마음을 추스르며 사랑을 읽습니다. 가을비는 가을을 부르고, 겨울비는 겨울을 노래합니다. 봄비는 봄을 속살이고, 여름비는 여름을 빛냅니다. 빗물은 철마다 싱그러운 마음으로 흙에 깃듭니다.
알맹이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알맹이를 읽고, 껍데기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은 껍데기를 읽는다.
헌책방 초록 지기님이 우리 아이들더러 “여기에서는 마음껏 뛰놀아도 돼요.” 하고 얘기해 줍니다. 아이들은 널따란 책집을 이리저리 달리고 기고 구르면서 놉니다. 조그마한 걸상을 서로 들면서 놀고, 잡기놀이를 합니다. 이 아이들이 도서관에 마실을 간다든지 새책집에 나들이를 간다면 이렇게 못 놀지요. 가만히 생각하니, 아이들은 어느 헌책집에서라도 이리 달리고 저리 뛰며 노는구나 싶어요.
처음쓰기는 오래되었지만 처음 만나고 읽으며 느끼고 생각하기로는 바로 오늘이다. 오늘 읽은 책이기에 모든 책은 새책이 됩니다.
책이 있는 골목이 환합니다. 책이 있는 마을이 어여쁩니다. 책이 있는 삶터가 따사롭습니다. 마음 가득 “따뜻해, 따뜻해.” 하고 생각하니 참말로 따뜻합니다. 책이 있는 마음이 넉넉합니다. 책은 삶이고 사랑이며 꿈이기에, 조그마한 책 한 자락으로 얼마든지 이 눈바람이며 칼추위를 녹일 만하지 싶습니다.
그래도 어느 분이 알아보고 기쁘게 읽은 책이 헌책집이란 징검다리를 거쳐 저한테 흘러왔습니다. 앞으로 제 손을 거쳐 흐른 글은 어디로 나아갈까요.
책에 적힌 글을 읽자면 눈을 써야 할 테지만, 책에 담긴 줄거리를 살피는 곳은 머리지요. 책에 깃든 넋을 헤아리는 곳은 가슴이리라 생각해요.
꿀벌이 꽃을 대하듯 책을 대하라. 벌은 달고도 향기로운 꿀을 마시되 그 꽃은 조금도 상함이 없느니라.
이제 ‘시골 작은 오락실’ 구실이 한결 크구나 싶은데 이곳에 놓은 오락기계를 두들기러 찾아오는 아이들이 “아, 이곳에 책이 있구나? 오늘은 책을 읽어 볼까?” 하는 마음이 싹틀 날을 그려 봅니다. 마을책집은 마을을 새롭게 지피는 텃밭이자 마당이자 풀숲입니다.
헌책집에 있는 책은 헌책이면서 새책입니다. 조금 낡았거나 다른 사람 손을 탔으니 헌책일 뿐입니다. 묵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오늘 처음 만나는 이야기라면 언제나 새책입니다.
조그마한 책집에 조그마한 책이 모여 조그마한 책빛이 반짝입니다. 작은 책집이 마을을 살리는 셈입니다. 작은 가게와 작은 마을이 이 나라를 살리는 샘입니다. 작은 마음이 모여 책빛이 되고, 자은 사랑이 어우러져 삶 노래가 되어요.
“딱히 뭐를 사려하지 말고, 참하니 돌아보면, 쪽지에 뭘 써서 이것 있느냐 물어보지 말고, 천천히 살피면, 종류가 수백만인데 뭘 하나 찾으려고 하면 못 찾아요. 여기에 와서 둘러보고 여기에 있는 책을 사야지요.”
선 채로 책집에서 다 읽고 장만하는 책이 있고, 이레에 걸쳐 읽는 책이 있으며, 보름이나 달포에 걸쳐, 여섯 달이나 두어 해에 걸쳐 읽기도 해요.
책을 손에 쥘 적에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으면, 이 책을 가슴에 품으면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날 테고, 책을 손으로 살살 넘기면서 두 눈에 웃음이 터지면, 이 책을 마음밭에 씨앗으로 심으면서 밝은 무지개가 뜨리라 생각합니다.
두 가지를 살피며 여러모로 실마리를 풉니다. “진짜 아깝네요”처럼 ‘眞짜’ 같은 아리송한 말씨를 굳이 쓸 일이 없고, ‘필요’ 같은 일본 한자말을 딱히 안 써도 돼요.
젊은이라면 생각을 가꾸는 힘을 얻으려고 책을 손에 쥘 테고, 어르신이라면 마음을 젊게 북돋우려고 책을 손에 잡을 테지요.
책에는 지식을 담는다고 합니다. 학문이나 철학을 하려는 지식일 수 있고, 사회나 역사를 밝히려는 지식일 수 있습니다.
모두 책입니다. 구름 같은 책이요, 빗물 같은 책입니다. 뭉게구름이나 매지구름 같은 책이요, 소나기나 벼락을 품을 듯한 책이며, 땡볕을 가려 그늘을 내주는 구름 같은 책입니다. 가랑비처럼 가만히 적시는 책이고, 장대비처럼 좍좍 내리 꽂으면서 크게 깨우치도록 이끄는 책입니다.
어린이한테 말하듯 글을 쓴다면 이 나라 책살림이 얼마나 곱게 피어나려나 하고 생각합니다. 어린이하고 수다를 떨 듯 학문을 하고 책을 여민다면 이 나라 마을살림은 얼마나 눈부시게 자라나려나 하고 꿈꿉니다. 오늘도 책집마실을 잘 마칩니다.
요즈막에 ‘반려’란 한자말을 붙인 ‘반려견 ․ 반려묘 ․ 반려동물’이란 이름을 흔히 쓰는구나 싶은데 ‘반려’가 뜻이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어린이한테는 어렵습니다. ‘벗’이나 ‘동무’ 같은 쉬운 이름을, 또는 ‘곁’ 같은 살가운 이름을 붙이면 한 결 나으리라 생각해요. ‘벗개’ ‘동무냥이’나 ‘곁개’ ‘곁짐승’으로 삼을 만합니다.
새책도 책이요 헌책도 책입니다. 모든 책은 그저 책입니다. 우리는 새책을 장만하면서 ‘책’을 읽ㅇ르 뿐, 새책이나 헌책이라는 돈값으로 따지지 않아요. 책에 깃든 이야기를 아름답게 누리려고 책집마실을 하면서 책을 만나지요. 온누리의 모든 책은 사람이에요. 온누리 모든 사람은 책입니다. 사람이 책이요 책이 사람입니다. 모든 책에 깃든 이야기는 우리 숨결이면서 사랑입니다. 우리가 짓는 삶은 언제나 새로운 책으로 태어납니다.
어떤 눈을 보느냐로 모두 달라집니다. 아이들이 손수 빵을 굽겠다고 나서서 용을 썼는데 그만 태워먹을 적에, 하하 웃으면서 “어쩜 탄 빵이 이렇게 맛있을까?” 하고 맞아들이는 길이 있다면, “부판까지 다 태워먹었구나!” 하고 으르렁거리는 길이 있지요. “어라? 예전에 사서 읽은 듯한데? 아르다운 책이니 다시 살 만하지” 하고 여기는 길이 하나요. “칫, 돈을 날렸잖아!” 하고 툴툴거리는 길이 둘입니다.
씨앗 선생님. 풀씨가 앉아서 풀밭이 되고, 꽃씨가 않아서 꽃밭이 되며 나무씨가 앉아서 숲이 되니, 저마다 고운 마음씨가 고요히 앉아서 사랑이 됩니다.
이야기 한 자락 깃든 책을 만나면 즐겁습니다. 이야기 두 자락 확한 책을 만지면 웃습니다. 이야기 석 자락 고운 책을 읽으며 사랑을 떠 올립니다.
대수롭지 않은 말이란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말도 없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씨앗 한 톨이 우람한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듯이, 우리 입에서 흐르는 수수한 낱말 한 마디가 우리 마음에서 새로운 꿈으로 나아가는 생각을 지피는 씨앗이 됩니다.
말씨요 글씨입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글이 씨가 되고요. 또박또박 말합니다. 똑똑하고 정갈하게 글을 씁니다. 함께 웃음짓고 같이 노래합니다.
자동차를 달리자면 앞만 보면서 옆 거울ㅇ르 흘깃거릴 뿐, 하늘도 이웃도 마을도 쳐다보기 어렵습니다. 셈틀 ․ 손전화로 책을 장만하자면 ‘시킬 책’만 바구니에 담을 뿐, 우리를 둘러싼 숱한 책 바다에서 헤엄치기 어렵습니다. 마을을 걸으면서 마을을 봅니다. 숲을 거닐면서 숲을 봅니다. 아이하고 손을 잡고 걷기에 아이 손끝에서 옮는 따사로운 사랑을 누립니다. 걸으면서 바라보는 삶입니다.
책이라는 못은 깊습니다. 책이라는 냇물은 넓습니다. 책이라는 바다는 넉넉합니다. 깊고 넓으며 넉넉한 숨소리를 생각하는 하루입니다.
늘 생각하는 한 가지는, 제가 일 하면서 써야하고 봐야하는 책밭만 살피지는 말자는 마음이에요. 그러면 이곳저곳에서 제가 알던 책도 만나지만 여태 모르던 책을 잔뜩 만납니다. 이러면서 제가 좋아하는 밭부터 하나씩 훑어가면 저를 가르치고 이끌며 사랑하는 반가운 책이 한두 자락씩 슬슬 나타나더군요.
겨울에는 겨울을, 봄에는 봄을, 비오는 날에는 비를, 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는 바람을, 오롯이 기쁘게 맞아들일 새로운 풀벌레는 어떤 날개돋이를 할까요. 그리고 서울에서 새로운 서울벌레가 되어 책지기를 맡을 젊은 일꾼은 이곳을 어떤 꿈터이자 사랑터로 지펴 낼까요. 모두 즐겁게 웃는 길을 그려 봅니다. 다들 다 다른 자리에서 풀꽃이 되면 좋겠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스스로 ‘아직 못했네!’ 하고 생각하면 저는 늘 ‘아직 못한’ 사람이로구나 싶고, ‘앞으로 하려고’처럼 생각하면 늘 ‘앞으로 하려고’ 나아가는 사람이로구나 싶습니다.
헌책집은, 같은 책 하나가 돌고 돌면서 여러 사람 손길을 두고두고 타는 자리입니다. 어는 갈래를 깊이 파거나 널리 짚으면서 새롭게 배우고픈 이들이 찾아드는 책쉼터이자 책숲이라 할 헌책집이에요.
아장걸음일 적에는 아장걸음인 대로 신나는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콩콩 걸음으로 거듭날 적에는 콩콩걸음인 대로 신바람 노래가 자랍니다. 통통걸음으로 피어날 적에는 통통걸음인 대로 신명나는 춤사위가 흐드러집니다
사람은 지식으로 살지 않아요.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요. 글은 지식으로 못써요. 글은 사랑으로 써요 책은 지식으로 못 엮지요. 책은 사랑으로 엮습니다. 글쓰기도 사랑쓰기요. 책읽기도 사랑읽기입니다.
시나 소설을 이야기하는 판에서 ‘젊은 글님’이란 이름을 으레 내겁니다. 글님이 젊기에 목소리가 젊다는 뜻일까요? 우리 삶터에는 젊은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런데 몸 나이로만 젊다고 할 만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몸 나이 아닌 마음나이로, 또 넋 나이로, 생각나이랑 꿈 나이랑, 사랑나이로 젊음을 말할 적에 비로소 곱게 피어나는 눈부신 ‘젊은 노래’가 태어나리라 봅니다.
책 꽃 곁에 수다 꽃, 수다 꽃 곁에 마을 꽃을, 마을 꽃 곁에 노래 꽃을 놓는 꿈을 그립니다.
글은 누가 쓸까요? 손이 있는 사람만 쓸까요? 손 입 다리가 없어도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나무하고 글을 주고받을 수 있고, 마음으로 생각을 나눌 수 있습니다. 풀꽃을 비로해서 구름바람하고도 마음으로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어요.
글을 쓰는 분들이 ‘글 쓰는 손’을 ‘살림하는 손’으로도 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분들이 ‘그림 그리는 손’을 ‘살림을 사랑하는 손’으로도 이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는 분들이 ‘사진 찍는 손’을 ‘살림을 꿈으로 짓는 손’으로도 엮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온 누리 골골샅샅에서 이 일 저 일 하는 뭇 어른이 ‘일하는 손’을 ‘놀이하는 손’으로 잇고 ‘사랑스레 살림하는 손’으로 여미며 ‘숲을 고이 품는 손’으로 잇고 ‘사랑스레 살림하는 손’으로 여미며 ‘숲을 고이 품는 손’으로 가만가만 풀어낸다면 가없이 아름답겠네 하고도 생각해요
대통령이 장관을 뽑으면서 임명장 말고 그림책을 하나씩 건네면 어떨까요? 학교에서 졸업장을 아이마다 하나씩 주기보다는 동화책이나 동시집을 하나씩 건네면 어떨까요? 임명장이나 졸업장이나 표창장 같은 종잇조각을 모조리 없애고서, 서로서로 마음을 빛낼 책 하나를 가려내어 건네면 참으로 아름답겠지요.
왜 방송이나 신문이 있어야 할까요. 방송 ․ 신문은 무슨 구실을 할까요. 책은 어떤 몫을 맡는가요. 책은 왜 있어야하고, 책은 어떻게 누가 쓰며, 책은 누구한테 어떻게 읽히는가요.
선비는 낮에 땅을 짓고 밤에 글을 지었습니다. 선비는 한 손에 호미를 쥐고 다른 손에 붓을 쥐면서 삶과 꿈을 스스로 짓던 일꾼이자 살림꾼이자 글꾼이었습니다.
책도 글도 사진도 그림도 눈높이를 어디에 맞출 적에 한결 아름답게 빛나는가를 깨닫겠지요. 책을 읽는 사람들은 언제나 삶을 읽습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겉종이만 훑지 않습니다. 종이에 박힌 글씨를 이룬 마음을 읽어요. 누구나 언제나 마음으로 쓰고 읽는 책입니다.
아침밥을 거르고 마을 쉼터에 갑니다. 저는 하루 한 끼, 또는 이틀이나 사흘에 한 끼여도 좋습니다. 고무신이며 버선을 벗습니다. 맨발로 풀밭을 밟습니다. 나무한테 다가가 안깁니다. 나무한테 말을 걸면서 잎을 쓰다듬고, 풀한테 귀띔을 하면서 풀이 들려주고 싶은 말을 받아들입니다. 풀꽃은 새로운 책이고, 나무는 새삼스러운 노래라고 느껴요.
우리가 찾아가는 마을 책집이란 나무 곁에 있는 쉼터이지 싶어요. 이 책집으로 찾아오면서 숲을 느끼고, 이 숲을 느끼는 마음으로 우리 보금자리를 가꾸는 즐거운 눈망울로 자라나지요. 그냥 모여서 이루는 마을이 아닌 숲바람을 마시고 함께 노래하는 발걸음으로 보금자리가 하나둘 피어나서 태어나는 마을이라면 기쁘겠어요. 저 하늘에 별이 빛나고, 이 땅에 마을책집이 빛납니다.
따로 여행을 다니지 않아서 ‘여행에서 얻는 느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다만 초 ․ 중 ․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는 ‘이 깜깜한 나라에 앞날이 있을까’하고 물었고, 신문을 돌리던 즈음에는 ‘이 메마른 땅에 꽃이 필까’하고 물었으며, 아이를 낳아 살림을 꾸리는 오늘은 ‘이 매캐한 마을에 숲을 심자’하고 되새깁니다.
사전이라는 책을 씁니다만 제가 쓰는 글로 엮는 사전은“아이하고 뛰놀고 날아다니고 노래하고 춤추고 웃고 떠들면서 소꿉잔치 벌이는 동안 스스로 길어 올리거나 짓거나 찾아내는 사랑이라고 하는 빛살을 이야기로 여미는 꾸러미”가 되기를 바랍니다. 책마실을 다니는 길에는 늘 이 대목만을 생각합니다. 삶이 말로 되고, 말이 생각으로 되고, 생각이 이야기로 되니, 어느새 사전으로 그러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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