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유희경, 아침달, 2020
표지에 산문집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어색한 느낌. 산문일까? 에세일까? 어쩜 시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백한 글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머릿속에 콕콕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다. 읽는 속도도 느릿느릿해 졌다. 두어 번씩 읽어야 하는 문장이 늘어갔다. 아 역시 시인이셨다.
5백자 부근의 짧은 글들로 문득 생각의 방식을 바꿔 놓는 글들이었다. 사진을 보기 전까지 글도 이름도 여성작가로 오해할 만했다. (이 말은 성차별적 단어인가? 그런 뜻이 아니라 감성을 이야기 한 거다) 섬세한 단어와 문장들이 여성처럼 감성이 풍부하다.
독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나는 지금 그렇다. 내 수준이 아직은 그렇다.
작가 소개
유희경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다.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데뷔, 시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산문집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등을 펴냈다. 시 동인 ‘작란’의 한 사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시인이고, 시집서점 ‘위트 앤 시니컬’의 서점지기이다. 시집을 펼쳐 잠시 어딘가로 다녀오는 사람들을 마중한다. 종종 서점에 머무는 독자들에게 머그에 커피를 담아 건네곤 한다. 종일 이 작은 서점 일의 즐거움에 대해 궁리한다.
독서 메모
이 이야기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당신만이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요. 나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신호를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먼 별의 빛으로 여기와 거기 간의 거리를 재는 과학자처럼, 나는 이야기의 주인을 두고 적어가는 사람.
나는 당신이 보내준 이 이야기가 좋습니다. 너무 많기도 하고 아예 없이도 한 당신. 당신의 이야기. 나는 꽃으로 가득한 어떤 나무를 대하듯, 어디를 봐야할지 모르고 대신 황홀합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런 당신을 내가 좋아해도 괜찮을 까요.
다시 당신과 걷는 일, 마음의 숫자가 하나씩 떠올라 음악처럼 들리고, 잠시 돌아본 당신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가 없어서. 그래. 당신,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만큼 나를 좋아해주지 않아도 좋으니 그렇게 돌아봐 주길 바란다. 이따금
방금, 누가 속삭여준 대로 그는 세상이 재운 듯 깊이 잠들어 있다. 잠시 창밖에서 있었던 자그마한 소란에도 꼼짝하지 않고. 정말 오늘의 감정들이 만들어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어떤 간지러움이었기에 슬쩍 웃었을까.
어느 날 저녁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남은 생의 왼편이 지워져 버렸다. 어쩐지 지나간 날들의 왼쪽도 함께.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소리없이 공간이 지워지는 일이라는 것을 왼쪽 눈을 잃은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나는 자주 놀란다. 불쑥 나타나는 누군가의 뒷모습, 멈춰 서는 자동차나 자전거의 그런 아주 사소한 사건에도,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죽음이 왼쪽으로부터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 잡히곤 했다. (나도 요즈음 오른쪽 눈의 시력이 많이 나빠졌다. 오래전부터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땐 불편한 점을 몰랐다. 요즘 들어 오른쪽 시력이 갑자기 많이 나빠지고 나서는 많이 차이가 난다. 작가님도 이렇게 시작한 것일까? 나의 죽음도 오른 쪽으로부터 오게 될까?)
나의 기척은 당신 오른편에서 안녕한지. 아니, 이러한 나의 기척을 당신이 알고는 있는지. 그래서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여전히 나는 돌아보지 않았고 여전히 벚꽃 잎은 쏟아지고 있었고 당신은, 나의 왼편에 있을 거였다.
나는 여태 대답을 마련하지 못해 벚꽃이 피고 질 때 군색해 지곤 해 아픈가 괜찮은가 거기에 있나 또는 없나. 저렇게 만발하여 작별을 예비하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은데 당신을 생각하면, 그 봄은 짧았어. 너무.
벌써 십 년도 넘은 이야기. 대로 나는 궁금하지만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 나는 가끔 그 정류장에 간다. 여전히 그곳에는 버스가 도착해 우르르 사람들 태우고 떠난다. 그것이 정류장이 오래된 풍경이고 그 풍경이 풍습처럼 여러 사람을 울렷던 것을 알고 있다.
그 우산들은 나의 비 오는 날들을 알고 있다. 그들 아래서 나는 걸었고 서 있었고 어느 날은 울었다. 나는 그들을 버스나 지하철 안에 커피숍 의자 아래 도서관 우산곶이에 두고 잊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되찾으러 가지 않았다.
우산도 없이,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는 지금에 와서 나는 내가 잃어버린 푸른색 우산이 이번에는 어떤 구석을 찾아갈지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 부디 그 자리가 아늑하기를 젖을 걱정도 없이 잊혀져갈 그곳에서, 한 대의이야기를 한껏 펼칠 수 있기를 유월의 장대비를 보며 바라는 것이다.
어느 날 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나는 가방을 두고 내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전기 속 한 사람의 삶도. 이제 이렇게 버스를 타는 일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멀미가 찾아왔다. 그동안의 흔들림이 한꺼번에 찾아오기라도 한 듯. 마침내 그날이, 그날 이후의 삶이 덜컹이며 지나갔다.
당신은 여전히 혼자다. 화분을 구분해 놓지 않길 잘했어. 그러면서 다른 삶과 어울리는 일은 참 어렵고 자신은 그런 일과 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화분은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초록색이며 꽃은 피우지 않지만, 그래서 조금 슬퍼지고 마는 것이다.
내가 기다리는 중이다. 당신이 오고 있다. 내가 꾸벅꾸벅 기다리고 있는 것을 당신은 모르겠지. 몰랐으면 좋겠다. 가볍게 감긴 눈꺼풀 위로 빛들 아른거리고, 나무가 그림자를 흔드는 소리 낯선 사람이 지나가다 나를 훔쳐보는 기척. 그 모든 일이 당신이다. 모두 당신일 텐데, 나는 눈을 뜨지 않는다. 이렇게 따뜻한 졸음은 놓아줄 수가 없다.
어느 저녁 그러니까 퇴근 무렵 역 앞에서 사람과 사람사이 이어져 있는 가는 실 같은 것들을 건드려보았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너무 소란스러웠기 대문일까. 손가락 끝이 단단해진다. 그리고 여름밤은 비가 없이 시원해지기도 한다.
현관 앞에 서서 당황하고 말았다. 현관의 비밀번호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 망설였지만 여전히 숫자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한 손에 식빵과 커피 원두가 든 봉투를 구겨 쥐고 남은 한 손으로는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든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 집의 비밀번호를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막막은 먹먹이 되고 명명이 되고 이러한 밤길을 따라 걸어가는 일에 이제는 목적도 더할 생각이 없다. 숨이 마음에 닿을 때 걸음은 가벼워지고 사람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닌지. 어찌할 바 없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더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기차가 흔들린다. 옆에 앉은 사람과 나의 어깨가 닿는다. 눈을 감은 채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해 보려한다. 어쩌면 그 사람은 당신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의 마음이 흔들린다. 기차는 점점 빠르게 달려간다. 시간은 지나가게 마련이다. 나뿐 아니라 당신도 모르게. 어딘가로 향해서.
가게 밖에는 한 층 더 어두워진 골목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노란 꽃을 다발로 들고 서 나는 손에 있는 잔돈을 내려다보았다. 노란 꽃다발은 너무나 값쌌다. 여태 나는 그 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마침내 나는 당신의 연필을 가지게 되었으나 정말 가지고 싶게 된 것은 나를 앞에 두고 당신이 적어간 말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들을 달라고 하지도 못하였으므로 그때 당신이 적었던 말을 영영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나는 연필을 모으지 않는다.
바닥의 책들은 모두 책장에 꽂힌 저녁 즈음. 혼자가 되었다. 버린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이 감정일지라도, 여실하게 느끼고 있다. 새 가구가 책에 쌓여 있던 먼지를 천천히 껴안는 냄새가 난다. 진한 색으로 해가지고 있다. 방이 온통 붉게 변하고 나는 아프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가 찾고 있던 뒷모습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의 방 한쪽을 장식한 그 뒷 모습들은 실패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방의 작은 창문이 열려 있는 모양이다. 바람이 불어 사진들, 일제히 흔들린다. 무수한 뒷모습들이 움직여 떠나가고 있다. 차츰, 멀리, 그는 그런 사실을 모르겠지. 그중 하나가 떨어져 구석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마침내 숨었다는 사실도.
괜찮으냐는 질문은 괜찮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뒤늦게 생각이 드는 거였다. 괜찮다고 대답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괜찮은가 되물어보아야 했던 것이었네, 하는 후회가 찾아오기도 했다.
창밖은 더 어두워질 수 없을 때까지 어두워졌고 차들은 여전히 내달리는 중이었다. 옆방에서 누가 짧게 헛기침을 했을 뿐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나는 오래 눈을 감고 있었다. 움직이면 넘칠까 봐 겁내는 한 컵의 물처럼. 가만히.
그 긴 터널 끝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새벽의 달이었고 별은이미 보이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별을 일곡 길을 찾아낸 들짐승처럼 간신히 드러난 보도를 만났고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보도를 따라 걷는 것뿐이었다고 당신을 보고 싶은 마음이 그때와 닮았다는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나는 젖어가는 코트 주머니 속에서 무표정한 손을 꺼내 그 눈을 받아내려고 했다. 그 까마득한 시간을 견디려고 했던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당신을. 그래.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은 당신을. 매번 봐도 볼 때마다 기꺼운 눈 같은 당신을 손으로 받아낸 조용한 눈송이 몇 개를 쥐고 주머니 속에 넣으면 당신이 올 것 같았다. 당신을 위한 첫눈. 그 최초의 기억. 그렇게 눈은 점점 짙어졌지. 바람이 기척을 따라. 하지만, 바람을 거의 없었고 나는 그냥 폭설의 복판에 서서 당신의 모든 곳을 상상하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한 쪽으로 기울인 채.
하늘은 파랗다. 구름은 하얗다. 구름은 하늘이 아니다. 아닐 뿐만 아니라 일부도 아니다. 구름 스스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가볍다. 당신도 생각하지 않는다. 울고 있는 당신마저 부드럽게 온다. 있다. 당신은 구름처럼 가장 멀고 아득하려다가 흘러간다.
당신은 어느새 배가 부르다고 한다. 몇 수저 들지도 않고 습관처럼 배가 부른 당신이 있고 사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것은 애써 생각할 필요도 없이.
마음이라고 써놓고 지워버린다. 아무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서. 먼 달을 짚고 있는, 짚고 있다 믿고 싶은 손가락처럼 텅 비고 애처로운 시간이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는 동안, 어떤 것은 지워지지 않고 새겨진다. 어쩌면 내가 적고 싶은 것은 마음이라는 글자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몰라도 되는 일은 애써 몰라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따금 지우개를 찾아 서랍을 여는 기분, 열어놓은 서랍을 뒤적거리게 되는 기분, 어쩌면 마음속에는 그런 기분이 살고 다른 것은 없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는 스웨터가 아니라 다른 한 짝의 장감을 찾고 있다. 남은 것은 어디서 왔고 남지 않은 것은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헤집어보아도 다른 한 짝을 찾을 수 없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으면서도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옷장 앞을 떠나지 못했다.
하얀색 종이와 파란색 펜 끝이 서로를 속삭여, 당신의 이야기가 태어난다. 의심할 수 도, 그럴 여지도 없는 순백의 이야기. 그것은 창밖을 닮아간다. 반짝이는 모습으로 모두가 잠들어 버린 바로 그 시간의 하얗고 가벼운 서사. 아마 내일 혹은 모래쯤 나는 그것을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잠들어 버리기 전 아득한 빈종이 위에 적어놓은 그 이야기를. 손끝의 작은 열만으로도 녹아 사라져버릴 것이 분명한 그 이야기를.
생각에 잠겨 한참 서 있었습니다. 몸 구석구석 한기가 들어 떨렸지만 조금이라도 더 잘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사이 어둠에 적응한 눈은 더 작은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더 많은 것들이 보이면 그만큼 더 들을 수도 있는 거여서 나는 그것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깊어진 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들. 그들의 기척을 살피며 기억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 기억되고 또 어떤 것은 기억되지 않는지. 기억되지 않는 순간들은 어디로 사라져버리는 것인지. 또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기억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의 완결된 사건이 되지 않음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게 되는 그런 것들이 어째서 나의 삶에 간섭하게 되는 것인지 새삼 나는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달이 있었습니다. 어떤 형태라고 말할 수 없게 꼭 달처럼 거기 있었습니다.
나는 적요를 당신으로 여기곤 합니다. 세계의 첫 밤과 같이 당신도 그러합니다. 만난 적 없으면서, 누군지도 모르면서 분명히 거기 있을 당신. 어쩜 이토록 보고 싶을까요.
밤을 이루는, 밤을 떠돌고 밤을 만들고 마침내 밤 자체가 되는 낱말들. 그것은 어둠 속 빛과 같아서 어떤 온도, 그 온도의 색, 그 색이 드러내는 선과 그림자와 같은 신호. 내가 여기, 거기 당신이 잇을 거라는 예정. 이것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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