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이근화, 마음산책, 2020
처음에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쉽지 않았다. 난 아직 소양이 많이 부족한가보다. 오늘도 책 한 권을 읽고 나 자신을 돌아본다.
작가 소개
이근화
197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 『차가운 잠』,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동시집으로 『안녕, 외계인』, 『콧속의 작은 동물원』, 산문집으로 『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 『고독할 권리』 등이 있다. 김준성문학상, 현대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등에서 시론과 시 창작 등을 가르치고 있다. 월간 『현대문학』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독서 메모
어리고 약한 존재들을 향한 나직한 시선과 느긋한 마음속에는 어쩌지 못하는 감동 같은 것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려는 연미의 감정이 없다면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남편도 즐겨 새벽 수산시장을 간다. 자다가 스르르 나가면 아침에 검은 비닐봉지 가득 생선이나 조개 새우 등속을 들고 나타난다. 엥겔지수가 너무 높아서 시를 좀 더 부지런히 써야겠다. 원고료의 대부분을 먹어치우는 데 쓰니 글이 밥은 먹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이들은 도넛이라고 부르지 않고 치킨빵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니 닮았다. 커다란 가마솥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너무나 많은 반죽을 튀겨 대서 거무튀튀해진 도넛, 기름진 대다가 백설탕까지 잔뜩 묻혀서 너무 맛있다는 거다. 불금의 치킨처럼 말이다.
혼밥도 좋고, 가정식도 좋지만 가장 좋은 건 빈 접시다. 빈 접시를 보며 취할 수 있는 나른한 휴식의 자세가 좋고, 고민은 잠깐 미뤄두었다가 적절한 식사 후에 다시 생각해보면 된다. 입가심으로 먹는 차가운 맥주나 과일 한 의 풍요가 감사하다.
그런데 사진에 없는 희한한 구두들을 그리는 아이들을 보았다. 구두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마치 발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엄마가 쓴 엉망인 원고보다 훨씬 나았다. 아이들은 항상 나를 가르친다. 내가 모자라서 아이들을 겁도 없이 많이 낳을 것 같다.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망자의 입속에 쌀을 채워넣고, 주머니에 저승으로 가는 여비를 챙겨주는 장례 풍속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다 타버린 살을 뒤로 하고 몇 개의 으스러진 뼈와 치아 보철물들만 덩그마니 남은 화장대를 본 적이 있다. 곱게 빻아 유골함에 넣기 위해 빗자루로 쓸어 담는데 거기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이지 않았다. 선한 눈빛, 활짝 벌어지는 입술, 너무 큰 재채기 소리 같은 거 말이다.
중년에 들어서면 자신이 인생에 사기 당했음을 덜컥 알게 되는 것 같다. 어느 날 문득 공허함이 뒤통수를 가격하는 때를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안 아픈 척 고상하고 우아하게 버텨야 하는 것이겠지. 담요 속의 안락한 고양이도 아니고 자유롭고 배고픈 길고양이도 아닌 것. 굳이 비유하자면 더러운 가죽 가방 속에 든 힘없는 고양이랄까. 그런데 그 가방은 강물 속에 빠져 있다. 곧 목까지 물이 차오를 것이고. 손끝에만 닿아도 싫은 물이 자신의 온몸을 축축하게 적시기 시작할 것이다. 이 야옹 마지막 울음은 물고기에게 나 들릴까.
인정하기 싫어도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뼈아프게 보여주기 위해 아이들은 태어났나 보다. 아이들의 성장과 뜬금없는 질문, 답 없음은 ‘나’의 거대한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어쩌면 삶의 한가운데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다. 분열과 망상과 헛소리로서 나의 글쓰기는 어딘가를 헤매고, 무엇을 더듬고 있을 텐데 도대체 그게 뭐란 말인가.
식물은 말이 없어 좋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요하다. 식물의 내부에는 음악이 흐르는 것이 아닐까. 내게 필요한 건 고요한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탁자 위의 병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비어 있을 대인지도 모르겠다. ‘꽃’이 부재하는 병, 꽃을 잃었거나 혹은 기다리는 병 말이다. 빈 병의 현재는 그렇게 꽃이 꽂혀 있었을 과거의 시간과 어쩌면 꽃이 꽂히게 될지 모르는 미래의 시간으로 충만하다.
농촌에는 고요하고 한적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하루 종일 몸을 놀려야 한다. 일거리가 산적해 있고, 매일 반복된다. 고된 노동으로 밥을 산더미처럼 먹고, 심하게 코를 골며 주무시던 삼촌들을 어릴 적부터 봐왔다. 피부가 거의 다 갈색에 가까운 숙모들의 거친 손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도시인들과 피부의 두께와 촉감이 달랐다.
그녀에게 세 딸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나는 아르헤리치의 삶과 정신세계가 더 궁금해졌다. 아버지가 다른 딸들이 어머니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가족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성장해왔을까. 마르타와 딸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나는 사랑에 관해, 예술가의 나이 듦에 관해, 그리고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새롭게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게 되었다.
문득 반찬과 과일을 짊어지고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며 병원 입원실을 들어왔던 엄마가 생각난다. 첫딸 출산 직후 누워 있을 때였다. 한겨울 빙판길을 불편한 몸으로 무거운 짐을 들고 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엄마에게 싫은 내색을 했다. 엄마는 조용히 병실을 나갔고, 나는 병원 복도 끝 비상계단에서 울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년이 제 자식을 낳고도 나한테 그래, 엄마는 혼자 중얼거렸다. 부기도 빠지지 않은 몸으로 나도 울었다. 딸 되기도, 엄마되기도 힘든 나날들이었다.
“학교는 뭐하러 가니. 그 재미없는 곳을” 이라고 말하는 엄마였다. 한국 엄마들은 상상도 못할 이야기. 딸들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두고 연주회 투어를 다니는 예술가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딸들은 그런 삶에서 개성을 잘 지켜나간다. 삶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으므로 꼭 어떠해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 노인네의 고집스러운 생활 속에는 자기 철학에 충실한 예술가의 절도와 사랑이 있었다. 조금 다르게 살아가는 것. 혈연적 유대로 서로를 얽어매지 않는 것. 그것이 자연스럽게 허용되는 사회를 조심스럽게 꿈꿔본다.
마르타는 입버릇처럼 “삶은 이런 것이 아니야. 인생은 이런 것이 아니야”라고 중얼거리고는 한다. 사물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예술은 언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충만함과 아름다움은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 마르타가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고 그녀의 세 딸을 바라보는 것처럼 나도 내 아이들의 옆에 잘 있고 싶다. 곁을 내어주는 일은 예술에도, 가족에게도, 사랑에도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사람들은 보통 고통과 상처를 가리고 덮는다. 수치스럽고 아프기 때문에 잊으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스스로를 탓하기도 한다. 폭력에 노출된 후에는 거울조차 보기가 두려워지는 법인데 낸은 달랐다. 오히려 그녀는 심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붙잡아두는 방식을 취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듯 했다. 나는 그렇지 못했고 오랜 시간 우울감에 시달렸다.
(낸 골딘의) 노골적이고 거친 사진들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다. 계층과 성, 제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삶을 누릴 자유가 인간에게 있지 않냐는 질문이 그녀의 사진에는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나의 모습들이 있을 것이다. 여성 사진가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기존의 관념에 저항하며 스스로를 바라보고, 관찰하고, 창조하는 눈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때론 시선 그 자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는 사진들을 보며 편향되고 왜곡된 시선에 대해 반성할 수 있었다.
화끈한 욕은 어떤 희망보다도 인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추함은 통해 본능적인 부끄러움조차도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임을 인정하는 대담함이 욕기라는 사실을 그녀(안나 윌키)의 작품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저마다 자기 나름의 성장 환경과 교육 배경, 삶의 방식이 있는데 이를 한 가지 잣대로 재단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얼핏 수동적으로 보이는 여성들의 내면을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풀어낸 것은 작가의 주된 관심을 드러낸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그 사건’은 안정되고 쾌적하게 살지 못하는 여성들을 관통한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적 고통은 공평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약자, 소수자 들을 아우르려는 서사적 노력이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진수미 시인이 밤의 적막과 죽음의 심연에 이끌리더라도 날이 밝으면 또 잠깐 웃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건강한 모습으로 마음껏 출렁거리기를 “킥킥 웃어대는 유리창의 실금처럼” 말이다.
이제 가난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공기와 같아서 매 순간 호흡해야 하는 간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미래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공감을 기반으로 한 분배와 연대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 조건이라는 점을 다 같이 조금씩 배워야 할 때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급속한 전파로 팬데믹 사태가 벌어졌다. 인도와 중국 등의 생산 라인이 멈추자 지구의 대기 상태가 달라지고, 인간의 활동 반경이 줄어들자 멸종위기 야생동물들의 출현이 활발해졌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소비시장의 위축과 실업률 증가와 같은 경제적 난관만큼이나 기우 환경 변화로 인한 재해와 각종 재난의 위험성이 다른 어느 때보다 피부에 가까이 와 닿는 상황에 처해 있다.
‘나’는 ‘너’와 함께 존재하며 ‘너’의 고통과 피는 ‘나’의 것이기도 하여, ‘우리’의 목소리는 겹치게 된다. 기울기와 스며듦을 통해 목소리를 생산하고 인칭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야말로 시의 위의와 가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어긋난 시곗바늘을 통해 우리 모두가 결국 다른 시간을 힘겹게 짊어지고 각자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전쟁ㅇ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만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듯이 인간의 삶은 연민과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해 보인다.
최근에서야 난 내 목소리의 특이점을 알게 되었다. 낮은 목소리와 느린 말의 속도 때문에 외국인 학생들이 반가워했다. 방송 일을 오래하셨던 선생님 한 분은 내 목소리에 묘한 매력이 있다며 팟캐스트 진행을 맡기셨다. 시는 내 목소리를 다듬어 주었다.
어느 음악가는 책을 ‘스푼’에 비유 했다고 한다. 영혼의 양식을 떠먹여주는 도구로서 말이다. ‘스푼’으로서의 책은 맛있는 것이든 맛없는 것이든, 몸에 좋은 음식이든 나쁜 음식이든 머릿속에 뭔가를 넣어 주기는 하는 것 같다. 때때로 머릿속에 있는 것을 꺼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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