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시집)』, 정채봉, 샘터사, 2020

그루 터기 2022. 10. 11. 20:23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시집), 정채봉, 샘터사, 2020

 

이 책을 읽으면서 코끝이 찡함을 느낀다. 간암 투병을 하면서 쓴 시들을 읽을 때마다 시 하나 하나가 모두 명치를 시리게 한다.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갈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이며 축복이라고 한 이야기가 새삼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이 아름다운 가을을 몇 번이나 더 건강하게 만날 수 있을지 나도 장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한 방울의 눈물이 읽어가던 책 위로 뚝 떨어졌다. 정채봉 작가의 시를 읽으면서 남아 있는 인생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다짐해본다. 하늘나라에 계신 정채봉작가님의 명복을 빈다.

 

 

저자 소개

정채봉 동화작가

 

1946년 전남 승주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꽃다발이란 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후 대한민국문학상(1983), 새싹 문학상(1986), 한국 불교 아동문학상(1989), 동국문학상(1991), 세종아동문학상(1992), 소천아동문학상(2000)을 수상했다.

 

동화작가, 방송프로그램 진행자, 동국대 국문과 겸임교수로 열정적인 활동을 하던 1998년 말에 간암이 발병했다. 그가 겪은 고통, 삶에 대한 의지, 자기 성찰을 담은 에세이집 <눈을 감고 보는 길>을 펴냈으며 환경 문제를 다룬 동화집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 첫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를 펴내며 마지막 문학혼을 불살랐다.

 

독서 메모

 

길 들기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먼저 창을 열고 푸른 하늘빛으로

눈을 씻는다.

새 신발을 사면 교회나 사찰 가는 길에

첫 발자국을 찍는다.

새 호출기나 전화의 녹음은 웃음소리로 시작한다.

새 볼펜의 첫 낙서는 사랑하는이라는 글 다음에

자기 이름을 써본다.

새 안경을 처음 쓰고는 꽃과 오랫동안 눈맞춤을 한다.

 

 

 

길상사

 

다닥다닥 꽃눈 붙은 잔 나뭇가지를

길상사 스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퇴근하면서 무심히 화병에 꽂았더니

길상사가 진달래로 피어났습니다.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5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어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릭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지금

 

내가 있는 나인가

내가 없는 나인가

 

 

 

행복

 

행복의 열쇠는

금고를 여는 구멍과 맞지 않고

마음을 여는 구멍과 맞는다.

 

 

 

그땐 왜 몰랐을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었던 것을

그땐 애 몰랐을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내 세상이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절대 보낼 수 없다고

붙들어야 했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무지개

 

첫눈이 듣던 날

받아먹자고 입 벌리고 쫓아다녀도

하나도 입 안에 듣지 않아

울음 터뜨렸을 때

얘야,

아름다운 것은 쫓아다닐수록

잡히지 않는 것이란다

무지개처럼

한자리에 서서

입을 벌리고 있어 보렴

쉽게 들어올 테니까

나이 오십이 되어

왜 그날의 할머니의 타이름이

새삼 들리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