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김승옥, 『뜬 세상에 살기에』. 위즈덤하우스, 2017

그루 터기 2021. 10. 14. 07:34

김승옥, 뜬 세상에 살기에. 위즈덤하우스, 2017

 

작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노출증을 심하게 앓아야 한다.

 

어용교수 축출 운동

너희가 부정선거 원흉으로 몰아낸 장경근 (교수) 같은 사람도 너희만 했을 때는 동경제대 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제라고 했다. 그런 사람도 나이가 들어 세상 때에 물드니 그런 짓을 했는데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정치가나 된 듯 우쭐대는 너희들이 다음에 장경근의 나이가 되면 무슨 짓을 할지 기가막힌다. - 이상백 교수

그 때 그시절 데모하던 학생들이 오늘에는 정치권에서 영웅 행세를 하고 있다.

 

소설은 문학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가면서 하나둘씩 써질 것이지 문학 강의를 듣는다고 더 잘 써지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어차피 문학이 일생 가기고 다닐 취미라면 아까운 대학 시절에는 앞으로 읽고 싶거나 알고 싶을 때 큰 곤란 당하지 않도록 갖가지 전문 분야의 입문 지식이나 공부해 두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필사

<고향의 봄>

순천의 겨울은 바람의 계절이다. 눈도 그다지 많이 내리지 않고 얼음도 두껍게 얼 줄 모르는 순천의 겨울은 멀리 지리산 쪽에서 불어 내려치는 찬바람만으로 황량하다. ‘오리정 아이들오리정 바람속에서, ‘장대 아이들장대 바람속에서 연날리기를 하거나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북데기 싸움을 하며 겨울을 난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어린이 잡지에 예쁘게 인쇄된 눈사람이나 스케이팅하는 모습은 순천의 아이들에게는 먼 나라의 동화 같다. 밤새도록 문풍지를 울리는 세찬 바람뿐인 겨울은 순천의 아이들에게 인생의 가없는 허망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문득 어느 날 동천의 겨우내 메말랐던 자갈밭에 물기가 어리고 이윽고 북쪽 산간지방에서 눈 녹은 물이 유리처럼 맑게 흐르고 그 물가에서 어머니들의 빨랫방망이 소리가 산뜻하게 울려오고, 탱자나무 골목길이 질퍽거리고, ‘해창넒은 들 너머에서 소녀의 입김 같은 바람이 간들대며 불어오고, 장날 모여드는 두멧사람들의 짐 위에 진달래가 만발하고……

또 이윽고 동천 방죽, 죽두봉산, 수원지, ‘순고順高’ ‘농전農專’ ‘여고女高의 교정 벚꽃이 꿈 바로 그것의 빛깔인 듯 아련히 번져가고 매산梅山 숲이 해맑은 연둣빛으로 살랑대고, 한 뼘쯤 자람 보리밭의 기나긴 이랑들이 술 취한 아버지처럼 후끈후끈 단내를 뿜어내고 그 하늘 구름 속에서 종달새들이 장난칠 때면, 그래 그렇다. 순천은 바야흐로 다시 봄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순천의 인생은 봄철의 밥상에 오르는 정어리 찌개처럼 비린내 나지만 참 맛있는 것이다. (P163)

 

 

명절이란 게 대체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명절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명절이듯 내 고향 추석도 제사 지내고 성묘 다니기가 바쁘다.

 

서울 생활을 실패로 만드는 나의 지방인적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것이 대답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특히 싫다거나 못 하겠다는 거절의 대답을 야박한 것 같아서못 하는 것이다.(중략)

그렇다. 이번 봄부터 서울에서 살게 된 착하고 착한 지방 출신 젊은이들이여, 그 착함 때문에 자기가 나쁜 역할을 맡기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서울에서의 선이란 자기의견을 솔직히 말하는 것이다. 상대편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 자신도 피해를 보지 않는 최선의 미덕은 싫을 때 싫다고 말하는 것임을 이 못난 선배는 당부한다.

 

양장점 안에서 약해지는 여자의 마음이란 술집 안에서 헤퍼지는 남자의 마음과 같다.

 

사태를 분석해 놓았다고 해서 사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악화된 감정을 이성의 차가운 힘으로 달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이미 남의 충고나 위로가 필요 없는 구제 받는 사람이다.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지금의 처지를 수정해보려는 욕망일야말로 인간의 욕망 중의 욕망, 가장 강력하고, 그 자체로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가장 순수한 욕망으로서, 이 욕망만큼은 예수님도 부처님도 공자님도 결코 뛰어넘지 못했다.

 

게임의 법칙은 극히 적은 사람만이 따고 많은 사람은 잃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