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책에서 한 달 살기』, 하지희, 엑스북스, 2021

그루 터기 2022. 1. 12. 00:10

책에서 한 달 살기, 하지희, 엑스북스, 2021

 

요즈음 내가 선택한 독서 방법은 다독이었다. 내가 다독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한 동안 책과 가까이 하지 못하고 몇 년을 흘려 버렸다. 그 몇 년이 흐른 후 인생2막이 시작되었다.  문득' 나도 글쓰기를 좀 해 볼까 '하고 생각하니, 남들은 어떻게 글을 썼는가가 궁금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다독이 되었다. 지난해 10개월 동안 350여권의 책을 읽었다. 그러나 아직도 읽어야 하고 읽고 싶은 책들이 무궁무진하다. 아마도 그 책들은 읽고 싶은 책들의 1%도 읽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새해들어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독만이 꼭 좋은 것이 아니듯이 지금 내게 다독이 꼭 맞는 것일까하는 거다.

ㅇㅇㅇ 한 달 살기검색에서 엉뚱하게도 책에서 한 달 살기가 검색되었다. 정독이 필요한 이 시점에서 내 궁금증을 풀어줄 책이라 생각되어 표지만 보고 빌려왔다.(물론 또 다른 제주도 한 달 살기 책도 빌려왔다.) 한 권의 책을 한 달 읽으면서 일어났던 일들을 쓴 책이라기보다는 여러권의 책을 한 달씩 여러 번 읽으면서 남긴 서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한 권을 정독한 내용을 적은 글이 아니라 여러 권을 정독하고 쓴 글들이다. 정독하는 방법을 아르켜 줄거라는 기대와 달리, 스스로 느껴야 하는 책이었다.  정독하지 않고 한 번 읽고서는 충분히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이 책이야 말로 한 달 살기를 해야 할 책이 아닐까. 다 시 한 번 책을 들쳐 본다.

 

 

 

저자 소개

하지희

대한민국 거제에서 프랑스 오베르뉴까지 열한 번이 넘는 이사를 거치고도 부족해 매일 이사하는 집에 살게 된 사람. 요리도 유학도 다들 만류했지만 좋아하는 마음 하나 믿고 프랑스로 떠난 사람. 인터넷이 되지 않는 곳에서 며칠이고 지낼 수 있고, 대로변 주차장에서도 편히 잘 수 있는 사람. (브런치 @jeeheeha)

 

 

독서 메모

 

 

과연 이 한 달 살기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싶은 불안감을 안은 채 펼친 첫 책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일단 시작하라고. 미련한 일일 수는 있어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라고. 의미 유무를 떠나 그저 경험할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데 집중하라고 말이다.

 

책은 참 신기하다. 읽을 때마다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을 여러 번 읽는 게 고역인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알고 있어도 좋아 하는 부분을 자꾸 반복해서 접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시 일기, 그건 반복하기가 아니라. ‘지티지 않는 사랑에 대해 새로운 증거를 주는 것이다.

 

출판하는 마음에 수록된 문학동네 시인선 시리즈를 론칭한 김민정 시인의 인터뷰 중에서, 일부러 쉽게 읽히지 않는 폰트로 시집을 만들었다는 말에 감탄한 적이 있다. 소란도 그런 의도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책에 쓰이는 폰트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책의 모양처럼 조금 더 얇고, 자그마하고, 살짝 날카롭다. 일반적인 폰트에 익숙해져 있는 나는 정말 글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용이 어렵다기 보단, 빠르게 읽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주 뒷걸음질 쳤고, 덕분에 숨은 의미나 시인만의 섬세한 표현을 한 번 더 되새겨 볼 수 있게 되었다.

 

종종 이렇게 계절이 지나는 모습을 자세히 지켜보고는 이름을 붙여 주고 싶다. 슬픔이 어울리는 봄, 거리 둠을 배우는 여름, 아쉬움을 붙잡는 가을, 흩어지는 소리들을 시의 언어로 붙잡아 두듯, 뒤늦게 알아채기 전에 계절들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나도 시간을 잘 대접해서보내는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 달의 절반 정도가 지났을 즈음 이제 거의 외울 정도가 되었겠지싶었지만 읽다보면 또 처음 보는 것 같은 문장이 새로 튀어 나왔다.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간간이 보이는 낯설고 좋은 문장들을 짚었고 또 필사했다.

 

내가 정말 얻은 건 삶을 바라보는 태도였다. 어린 시절이 중요하긴 하지만,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속담이 순 거짓말이라는 클로드 퐁티의 말처럼 늘 변화하는 게 사람이라는 믿음. 키티 크라우더의 말처럼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 말고도 다른 우주와 질서가 있다고 여기는 태도. 벵자맹 쇼의 자신의 결점과 함께하는마음.

 

읽자마자 나를 비건이 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역할이 끝났을 수도 있지만 내가 이 책에서 한 달을 살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나는 혼자 밥을 먹으며 살아가지 않는다. 보통 남편과 함께 먹고, 가족이나 지인들과 식사를 하기도 한다. 게다가 나는 고기와 유제품을 숨 쉬듯 먹는 프랑스에 산다.

 

동물 복지 인증’, ‘풀어놓고 기른 닭같은 상술은 문제의 본질을 희석하고, 동물을 착취할 수 있는 제3의 선한 방법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더 위험하다. 나아가서 그러한 프리미엄 인증이 붙은 값비싼 식품을 사 먹을 수 있는 계층과 그럴 수 없는 계층 간의 위화감을 조성하고, 과거처럼 돈 있는 귀족만 고기와 달걀과 치즈를 먹던 봉건 시대로 퇴행하는 듯한 결과까지 가져올 수 있다. (비건이 화두로 떠오른 건 내가 통풍에 걸리고 나서다. 나 의지와 관계없이 완전한 비건은 아니지만 단백질이 많은 육식을 먹을 수 없게 되어 저절로 유사비건이 되었었다. 지금은 꾸준히 약을 먹으면서 부족한 단백질 보충을 위해 일정부분 먹고 있어서 유사비건도 포기한 상태이긴 하다.)

 

함께 싸워 나갈 동료라고 생각했던 이가 의 입장을 대변해 나를 몰아세웠던 그 말들은 아직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터로 돌아가 다른 동료와 이야기해 보니 그도 스트레스로 꽤나 예민해져 있던 모양이라고, 내게 모른 척 이해해 주길 권했다. 그의 스트레스로 생긴 분노가 같은 을이 아닌 갑에게로 향했다면, 함께 싸워 나가길 원했다면, 내가 그때 조금은 덜 외로웠을 것이라고, 책 속 문장이 알려 주었다.

 

티 나는 노동과 티 나지 않는 노동으로 나누어 볼 수도 있겠다. 그 티라는 것은 돈도 될 수 있고 시간도 될 수 있겠다. 일반적인 노동의 세계에서 돈을 티가 나는 걸 선호 한다. 월급을 많이 받으면 일하는 티가 팍팍 나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 같은 창작은 노동했다는 티가 거의 나지 않는 편이라 조금 속상하기도 하다. 특히 여성 작가는 표면적인 인정이나 보상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집안일과 육아,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떤 책을 좋아하더라도 그 책을 쓴 작가에 대해선 무관심했던 난 최근에야 누구에게 빠져드는 일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맛보았다. 책 속 작가의 세계관에 반하면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모조리 찾아 읽었고, 그 중 가장 마음을 내준 책은 이렇게 한 달이고 붙잡고 있다. 그렇게 요즘은 이 작가를 사랑하는 중이다라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 아쉽다. 이 수줍은 사랑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싶다.

 

오랜만에 프랑스 문학을 원어로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한국어로 읽을 때보다 속도도 느리고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작가의 언어로 작가의 생각을 더듬을 수 있다는 데 감탄하며 한 장 한 장 넘겨 나간다. 작가가 의도한 여백의 자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한국어로는 바로 떠오르지 않는 표현들을 알아들을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글쓰기란 무엇인가. 밥벌이란 무엇인가. 심신단련을 읽으면서 내 고민도 깊어진다. 글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이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일 같기도 하고 또 안 될 건 무엇인가 싶기도 하다.

(나도 이 책을 읽었다. 작가는 매번 읽을 때 마다 다른 부분을 찾고 해석을 하듯이 내가 느꼈던 부분과 공통된 부분 보다는 더 많은 걸 느끼고 말한다. 내가 봤던 책을 한달 읽기를 한다는데 묘한 감정이 흐른다.)

 

나무의 아픔을 감지하고 마음을 내주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엔 어떤 힘이 있다. 바라는 것 없이 그저 한 대상을 사랑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만들어 내는 힘. 상을 아직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힘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런 힘을 가진 이야기들을 만날 때마다 난 책을 읽으며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긴다. 타인의 인생 이야기를 깊이 들어 볼 기회가 많지 않은 환경엣 살면서도, 이렇게 다양한 사연들을 실컷 마주할 수 잇게 해 준 책들. 책이 아니었다면 이들의 이야기가 나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그러니 이번 책도 한 달을 살아가기에 넘치도록 좋은 책이라고 안심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머릿속을 흐릿하게 맴돌던 생각들이 책 속 구절에 가 내려앉았다. 자신을 위해 살며 동시에 주변을 이롭게 하는 삶. 나와 남편이 한동안 꿈꿔 온 삶의 모습이 명확하게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나무처럼 아낌없이 줄 수 있다면. 아니, 아낌없이 살 수 있다면.

 

그래서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있다면, 순간순간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았으면 좋겠다. ‘그 사람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는가?’ 아니, 어쩌면 그보다 이렇게 먼저 물어야 할 것 같다. ‘그 사람은 나로 인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가?’() ‘당신은 나로 인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가요?’ 단 한 사람이라도 그렇다고 단해 준다면 뛸 듯이 기쁠 것이다. 내년엔,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당장 읽을 책이 부족하니 일단 가지고 있는 책을 더 깊게 읽어 보면 어떨까 해서 시작한 책에서 한 달 살기. 나는 이제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하는 것만큼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일은 없다는 것은 안다. 그걸 내 사랑하는 책들이 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