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여자공감(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아프게)』, 안은영, 해냄출판사, 2010

그루 터기 2022. 1. 11. 00:15

여자공감(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아프게), 안은영, 해냄출판사, 2010

 

발행한지 꽤 오래된 책인데 우연한 기회에 입수하게 되어 읽었다. 

여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여 공히 해당하는 이야기 인데 여성공감이라서인가 남성 공감에는 조금 부족한듯 느껴지는 건 내가 남성이라서일까? 나이먹은 아저씨라서일까?

 

 

 

저자 소개

안은영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메트로신문사에서 생활유통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여성들의 사랑과 연애, 직장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한 상큼발랄한 조언서 여자생활백서40만 독자를 사로잡으며 2030 여성들의 멘토로 자리잡았고 남자와 연애에 관한 지침서 여자생활백서 시즌2로 헷갈리는 사랑을 명쾌하게 풀어냈다. 최근에는 같은 이름으로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두 여성의 삶을 그린 장편소설 이지연과 이지연으로 이 시대를 함께하는 여자들의 갈등과 소망을 대변해 호평을 받았다.

 

 

독서 메모

 

새벽녘.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을 걸 뻔히 알면서도 위풍당당 내게 전화를 했을 땐 분명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너는 허깨비처럼 웃기만 하더라. 한 시간 남짓 긴 통화를 마치고 났더니 어둠 사이로 동이 터오기 시작했어. (중략) “잠 깨울까 봐 안 하려고 했는데 전화할 사람이 선배밖에 없었어.” 막판에 이런 말은 안 해도 돼. 이해한다. 나는 이런 짓 곧잘 하걸랑. 근데 J. 외로워서 하는 전화는 언제든지 오케이, 하지만 단순히 잠이 안 오는 거라면 일단 전화기는 가방에 넣어두고, 이불 홑청을 뜯거나 옷장 정리를 하는 것도 방법이란다.

 

사람마다 말머리에 다는 입버릇이 있다. 그 가운데 유독 솔직히’, ‘사실은’, ‘실은’, ‘있잖아로 서두를 시작하는 사람의 얘기는 부담스러워. 그냥 얘기해도 될 것을 굳이 사실임을 강조하는 바람에 순수한 의미가 사라져버리거든. 별것 아닌 습관 가지고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다고? 맞아. 예민했지. 하지만 별것 아닌 것은 아니란다. 습관은 무의식의 결과니까.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대화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싶을 때, 자신의 얘기가 의심받을까 봐 솔직을 강조하거든. 이러한 습관은 과거에 거짓말로 인해 한두 번의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낀 사람에게서 나타난다더라. 그리고 나 역시 그렇다고 믿는다.

 

강조해서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치고 인생이 솔직한 것은 아니더라고. 그래서 나는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보다 정직한 사람이 좋다. 나도 의도적으로 솔직을 강조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 솔직해야 한다는 강박이 이성을 짓누를 땐 차라리 침묵해버리는 편이다. 당장은 힘들어도 결과적으론 나나 상대방이나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 제로섬(zero sum)만 남으니까.

 

뉘앙스의 사전적 의미는 미묘한 차이’, ‘사소한 간극이락 돼 있어 뉘앙스라는 건 작정하고 속이려면 당장은 속여지겠지만 결국 드러나 버리고 마는 또 다른 진실이기도 해, 보는 시각에 따라 그것은 진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옳은 것이기도 하고 그른 것이기도 하잖니. 그래서 어떤 사안을 두고 뉘앙스의 차이라고 하면 때로 수긍이 되기도 하지.

 

눈치는 타고나는 것이라서, 배운다고 익혀지지 않아. 그래서 입사 초년병의 무릎을 가장 쉽게 꺾는 말이 눈치껏 하라는 주문이야. 눈치라곤 배워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눈치껏 하라는 걸까. ‘직선속전속결로 배우고 정진하느라 우회하고 능치는 법을 모르는 20대 직딩들 에겐 다소 어려운 예기일 수 있겠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가 뭔지 아니? 진짜 쉬워. 들어주기만 하면 돼. 잘 들어주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카운슬러야. 상대방이 숨을 고르는 순간과 격앙된 순간을 파악해서 적절한 맞장구를 쳐준다면 최고의 리스너로 등극할 수 있지. 그런데 듣고만 있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없으면 불가능해, 그래서 들어만주는 게 어려운 거란다.

 

사람은 참 안 변해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고, 경험하지 않은 것은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멋대로 예단해. 그러다가 꼭 뭔가 사단이 일어나고, 그제야 갸우뚱하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하지

 

하루 한 잔 정도는 커피를 마셔도 되는 약을 함께 처방해주세요라고 말했더니 의사가 별수 없다는 듯 나지막이 귀띔하더라. 의사가 사는 낙을 막아서야 되겠냐고, 커피를 하루에 한 잔만 마시는 대신 커피 마시는 날엔 밀가루 음식을 먹지 말라고, 밀가루 음식 먹은 날엔 커피 대신 밀크티 마시라고, 꽤 괜찮은 처방 아니니? 모든 실수엔 협의가 가능해. 그리고 즉각적인 현실적인 협의일수록 실수 발생 빈도는 현저히 줄게 돼 있단다.

 

워커홀릭은 일종의 도취고 습관이야. 마라톤 선수의 심폐 기능이 한계치에 도달하면 육체의 고통이 사라지고 마약 성분과 같은 신경물질이 뇌에 전달되는데 그것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부른다지. 그게 지속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격렬한 도취 상태가 일순 사라지면서 심장을 움켜쥐며 땅에 무릎을 꺾고 마는 거야. 인생의 레이스에서 잘 달리는 일은 중요하지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 네 나이였을 때 나는 어땠을 것 같니. 꽤 계획적으로 영민하게 보냈을까, 과연?

 

오후에 바짝 매달리면 끝낼 수 있는 일인데도 밤새 일하는 맛에 신명을 내던 당시의 나는 퇴근 무렵까지 슬렁슬렁 일하다 저녁을 먹고 늘 그렇듯 야근을 하게 됐어. 원래 일 못하는 사람이 야근하고, 밤새우고 그러는 거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으니까. 아무튼 그때 회사 분위기는 젊었고, 젊었기에 상식을 벗어난 면도 있어서, 야근하다 회사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시스템이었지(심지어 침대가 있었다고!). 잔 것 같지도 않은 토막잠을 깨운 건 오전 8시 집으로부터 걸려온 아버지의 부음 소식이었어. 집에 가려면 갈 수 있었던 그때, 나는 습관적으로 밤을 새는 당시의 일 중독증 때문에 아버지의 임종을 놓쳐버린 몹쓸 딸이 됐단다.

 

언젠가 내가 말했지. 안테나를 절대 접지 말라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특히 누가 네 편이고 누가 네 반대편에 서 있는지 파악하라고 말이야. 그런데 여기엔 오류가 있다. 네 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네 등에 칼을 꽂는 수가 있고, 반대편에서 너를 불편하게 했던 사람이 어느 날 응어리를 털고 네 곁에서 든든한 응원군을 자처하는 경우가 있어. 이럴 때를 위해 안테나를 세우라는 얘기야.

 

오래된 동네에서 마나는 삼겹살 주인아주머니나 후미진 골목에서 만난 새싹처럼 네 양 날갯죽지를 잡고 부드럽게 너를 일으켜 세우는 존재들을 뜻밖에 만나기도 한단다. 그러니 인생은 변수의 연속이라는 거 아니겠니.

 

좀 더 걷다가 노부부를 만났어. 두 분의 짧은 대화를 들었지. 앞서가는 할아버지에게 할머니가 천천히 좀 가소, 청춘인 줄 아는 갑네.” 하니까 할아버지가 청춘이 밸 건가라고 대꾸하셨고 다시할머니가 만날 팔다리 쑤신다고 해쌓드만 거짓말이요하니까 잠시 뜸들이던 할아버지가 허허 웃으며 잔소리할 기운이 남았나? 할망구가 나보다 오래 살겠네.” 하시더라. 아 어른에게 귀엽다는 표현은 버릇없고, 정말 귀여운 어르신을 만났을 때 그 의미는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해야 할까.

 

미친년 속곳처럼 마음이 찢어지던 그 밤 나도 모르게 행로를 이탈한 것은 내 의지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낸들 내가 느닷없이 전주행 티켓을 끊게 될 줄 알았겠니. 늘 남의 시선을 신경 써가며 궤도 안에서 꼼지락거리느라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참아왔던 거지.

 

흔한 말로 사는 게 재미없다싶을 땐 고정적으로 만나는 멤버들이 내겐 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번 만나줘야 할 때 아냐?”, “너무 안 봤다, 우리라는 말을 하면 당일로 부킹이 이뤄지고 일상에 찌든 얼굴을 하고 약속 장소에 등장하는데, 이때 우리의 모습은 흡사 한 사발의 피를 얻기 위해 다리를 질질 끌고 벌판으로 향하는 뱀파이어 같아.

 

나는 수다가 좋아. 아까 말했던 섹시한 얘기는 언제든 오케이고, 발전적인 주제도 좋고, 하릴없는 뒷담화도 적당한 범위에선 재밌어. 삶의 언저리에 외로움이 짙어져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면 적극적으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눠라. 주절주절 네 얘기만 털어놓는 고해성사 말고 상대방과 탁구 치듯 얘기하는 재미를 느껴봐. 그런 사람을 늘 주변에 두는 게 좋아. 나중엔 네가 그런 사람이 돼 있을 거야. , 그리고 유머 감각은 유머백과사전같은 것을 보면서라도 익혀두는 게 좋아. ‘이 사람과 얘기를 더 하고 싶다, 헤어지기 싫다라는 기분이 드는 사람이 돼보렴. 웬만한 트로피보다 더 기분 좋아질 거다.

 

결국우리는 나비나 구름이나 치타가 아니라 다 같은 사람이니까. 사람이니까 당연히 서로의 마음은 알게 되지. 그 단순한 진리를 이번에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물 끓는 소리르 듣다가 와락 설움이 북받치는 건 무슨 경우냐고, 새벽에 무슨 청승이냐고 따지지는 말아주라. 급기야 주전자 뚜껑이 제 몸을 움직이며 여봐란 듯 씩씩하게 울어대는 동안 나도 기운을 얻어 더 힘차게 울 수 있었어. 울고 싶은 나를 찻주전자가 고맙게도 자극해 준 격인데, 함께 끓어 올라준 찻주전자 덕분에 덜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인생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필요하다. 쫓기듯 사는 생활 중에서 정작 너를 쫓는 것은 상사와 프로젝트와 동료와의 경쟁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임을 명심해라. 네 인생을 가꿀 자유도 있지만 네 인생을 소모할 자유도 분명 너한테 있다는 걸 알아둬. 뭔가 결단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우선, 아무것도 강박하지 말고 뇌를 비워봐. 다음 순서가 천천히 떠오를 거야. 재촉하지 말고 기다려. 그리고 머리를, 가슴을 비워봐. 새로운 에너지가 가득 차오를 거다.

 

그 시간 동안 나를 감싸고 있는 정서가 뭔지 아니? 외로움이었어. 근데 그 외로움은 언제나 내 몫으로 남겨진 파이 한 조각 같은 거란다. 한 잎에 터렁 넣고 나면 그만일 삼각뿔 모양의 파이. 먹고 나면 더 갈급하게 될 것을 알기에 선뜻 먹어치우지는 못하고, 고소한 캐러멜향과 희고 부드러운 휘핑크림의 자태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차마 외면하지도 못하는 상황, 난감한 달콤함. 말하자면 그런 거지.

 

과거의 망령에 매여서 현실에 발목 잡히지마. 새로운 클라이언트는 지난해 네가 맡았던 클라이언트처럼 지랄맞지 않을 거고, 네게 다가오는 뉴 페이스는 헤어진 남자친구와 똑 같은 취미를 가졌을지는 몰라도 성격은 전혀 다를지도 모르잖아.

 

대학 강단에 서는 교수나 연단에 서는 정치인도 그 자체로는 우아할 수 없어. 그저 지성미와 논리를 갖췄을 뿐, 고로 나는 우아함은 섹시함과 친밀함, 여성스러움과 당당함을 아우르는, 여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며 최상의 선이라고 생각해.

 

나는 겸손한 예스맨보다 오만한 실력파가 좋아. 그런데 사회생활에서 이렇게 행도하고도 살아남기란 정말 어려워. 상사의 얘기에 일단 예스하고 보는 게 맞는 거라고 늘 상 얘기하더니,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 조직 내 상하관계에선 예스 앤 와이 가 맞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죠?”라는 거지 토를 달더라도 일단은 여유 있게 인정하고 나서 다른 게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순서야.

 

2030 커리우먼이 가장 취약한 것이 뭔지 아니? 사람을 파악할 줄 모른다는 점이야. 나도 그랬다. 당연하다 세상에 나와 정신없이 쫓아가기 바쁜데 타인을 파악해가며 산다는 건 그 나이엔 사치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네가 다져온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마. 발전을 위해 삽을 들이대는 과정일 뿐, 그 땅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너만의 영토니까. 네 용기 부족과 외로움의 문제점이 뭔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이란다. 고집스럽게 외면했던 네 한계에 삽을 들이대고 물어봐. 너 자신도 몰랐던 네 안의 옥토가 세상에 드러날 거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건너고 있는 너에게 나는 불투명한 미래를 지례 두려워하기보다 현재에 눌러 붙어 있는 군살을 빼라고 말하고 싶다. 이를테면 불안함, 공포, 자신 없음 따위 말이다.

 

산이건 바다건, 남자건 일이건 괜히 주변만 빙빙 도는 건 바보짓이야. 적어도 나처럼 요상한 자기애에 빠져 허우적대느라 시간 낭비는 하지 마라. 세상 누구도 너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은 없어. 목표가 생기면 주저하지 마. 정면으로 마주 섰을 때 비로소 네 미래도 너에게 찬란한 속살을 보여 줄 거야.

 

나처럼 살아라.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의 인생이 남의 본보기가 될 수 없듯, 누구의 인생 역시 남을 흉내 내라고 있는 게 아니다. 스스럼없는 후배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지만 실은 미안하고 민망한 게 많고, 그럼에도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한다고, 너처럼 나도 그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지나보니 허전하다고, 내 손을 잡아 달라고 말하고도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