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자유』, 김인환, 난다, 2020
저자 소개
김인환
194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현대문학』으로 평단에 나왔다. 지은 책으로 『언어학과 문학』 『비평의 원리』 『상상력과 원근법』 『형식의 심연』 『한국고대시가론』 『문학교육론』 『문학과 문학사상』 『다른 미래를 위하여』 『기억의 계단』 『의미의 위기』 『현대시란 무엇인가』 『The Grammer of Fiction』 『과학과 문학』, 옮긴 책으로 『에로스와 문명』 『주역』 『고려 한시 삼백 수』 『수운선집』 등이 있다. 2001년 김환태평론문학상, 2003년 팔봉비평문학상, 2006년 현대불교문학상, 2008년 대산문학상, 2012년 김준오시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이다
독서 메모
대학에 들어가기 위하여 공부하고, 회사에 들어가기 위하여 공부하고, 결혼하기 위하여 일하고, 아들딸 키우기 위하여 일하고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모든 중요한 것은 미래에 있게 되고 현재는 다만 미래로 가는 다리거나 미래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고 만다. 미래의 끝은 죽음이므로 현재보다 미래가 중요하다는 말은 결국 삶보다 죽음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되고 말 것이다. 청년은 청년대로 절대적인 존재이고 노년은 노년대로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는 파시즘을 피할 수 없다. 아이는 아이로서 최고이고, 어른은 어른으로서 최고이며, 남자는 남자로서 최고이고, 여자는 여자로서 최고라는 믿음이 민주주의의 기초이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딛고 미래를 설계하며 현재의 과제를 수행하지만 그는 동시에 동시성과 완전성을 지닌 영원에 참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현재는 영원과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책의 내용은 유한하고 현실의 계기는 무한하기 때문에, 책은 현실이 아니며 현실이 될 수 없다. 책은 현실에 대하여 진술한 언어이다. 언어는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책은 현실을 남김없이 드러낼 수 없다. 책벌레가 되지 말라는 말은 책만 읽지 말고 자연을 관찰하고 사회를 경험해야 한다는 권고이다. 현실은 현실에 대한 어떠한 표현보다도 더 크다. 그러나 경험이 독서보다 반드시 삶에 더 유효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데에 독서의 신비가 있다. 우리는 우리 삶에 필요 없는 것을 분명하게 한정할 수 없다. 장자는 필요 없는 것은 배제하고 필요한 것만 포섭하려는 혜자의 견해에 대하여, 발을 딛고 있는 땅은 서는 데 필요하고, 그 이외의 땅은 서는 데 필요 없다고 하여 나머지 땅을 다 잘라버린다면 땅을 딛고 서 있을 수도 없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한 권 한 권의 책을 공들여 천천히 읽는 것이 독서의 유일한 방법이다. 천천히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은 대부분의 경우에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일 것이다. (···)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한 권의 책만 두고두고 읽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독서란 책을 하나씩 읽어나가면서 맥락을 짐작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고, 먼저 맥락을 짐작하고 그것에 비추어 책을 읽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거나 자기가 읽은 여러 책을 한 자리에 모아서 그것들의 관계와 차이를 머릿속으로 그림 그려보고, 그 그림을 더 확대함으로써 문화의 맥락을 어렴풋이라도 머리에 떠올릴 수 없다면 독서는 산 경험의 일부가 될 수 없다.
한 권의 책을 정밀하게 읽어서 그것의 밑바닥에 있는 의미를 해석하는 방법은 책의 다양한 의미를 제한하게 된다. 의미는 책의 밑에 있는 것이 아니 라 책들이 다른 책들과 맺는 무수한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책들과 들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들의 곁을 파악하려면 깊이의 비전 대신에 옆으로 보는 비전을 따라가야 한다. 측면의 독서만이 맥락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관계와 차이의 놀이 속으로 들어가는 독서는 계속해서 줄기를 뻗어나가는 칡덩굴을 헤치는 것처럼 끝이 없는 작업이다. 맥락의 독서는 미완성의 독서이고, 중도에 있는 독서이고, 항상 중요한 무엇인가를 남겨놓는 잉여의 독서이다.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관계의 회로를 따라가면서 독자는 책들의 의미를 재조정하고 재분배해야 한다. 맥락은 닫힌 창고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형되는 광장이기 때문에, 맥락의 정체는 언제나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맥락이 항상 열려 있기 때문에 맥락의 독서는 시작에서 시작으로 이어지는 놀이가 된다. 독서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창조적 놀이이다. 맥락을 완성하여 고정된 한계 안에 가두겠다는 욕심은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는 인색과 게으름의 표시일 뿐이다. 모든 방면으로 흘러넘치는 맥락의 홍수 앞에서, 인색한 독자는 유일한 의미를 장악하려고 하면서 맥락의 풍부한 광장을 죽은 상품의 창고로 만들고 만다. 무한한 맥락에 대하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겸손이다.
맥락의 궁극적 의미를 파악했다는 오만이나 맥락을 장악하고 고정시키겠다는 환상을 벗어나, 독자는 읽을 때마다 발견되는 관계들의 새로운 매듭들 가운데서 극히 적은 몫을 선택하고 자기가 읽은 본문들이 교차되는 자리를 한정하여 그 책들을 관통하는 맥락의 줄거리를 구성해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무의식적으로 개입하는 그전에 읽은 책들의 간섭을 의식의 지평에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영원한 눈이 없다. 인간은 현재의 순간에 그때그때 보편적이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결단하지 않을 수 없다. 참이 미래시제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에는 진리의 결여하는 고통이 수반된다. 백만 년 후에도 인간은 제가 아는 것은 넘어서 참을 찾고 있을 것이다.
색(루파)은 파괴되는 것이고 공(수냐타)은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색도 존중하고 공도 존중해야 한다는 평등 공리가 색즉시공의 의미이다.
시민의 언어는 지껄임이고 시인의 언어는 얼말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고 스님은 시를 사는 사람이고 평론가는 시인과 스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사람이다.
예수를 신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는 것이 그 두 종교의 유일한 차이인데, 이슬람교에서는 동정 잉태를 사실로인정하고 신은 부모를 통하여 인간을 만들 수도 있고 부모 없이 인간(아담)을 만들 수도 있고 아버지 없이 인간(예수)을 만들 수도 있으므로 동정 잉태는 신이라는 증거로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기하학의 진정한 의미를 해명하는 작업은 최초의 근원적 명성에 소급하여 기하학의 역사성에 대해 반성하는 작업이 된다. (..) 대상의 객관성은 공 통의 언어를 지닌 인간을 전제한다. 우리는 언어의 보편성에 의해서 세계를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으로 이해한다. 기하학의 이념성은 대상 자체 의 이념성이다. 이념성은 현실의 우연성에 연루되어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한다. 전통의 가능성과 하나가 되는 번역의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다" 언어는 공동주관적 동일성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학문적 사유에서 이미 획득한 결과들은 새로운 것들을 획득할 수 있는 토대 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획득물들을 다시 침전되어 다음 작업의 재료가 된다. 역사성은 의미 형성과 의미 침전의 상호 작용이다.
기하학은 환경에서 직관적으로 경험하는 물체를 극한적인 형태로 추상한다. 직관으로 파악된 물체들은 유형적 관련성을 가지고 보편적 패턴을 드러 낸다. 이 보편적 패턴이 의미 생성의 장으로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구성하는 근거가 된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는 현존재의 본성을 구성하고 다른 것들과 의 관계는 현존재의 상태를 구성한다. 본성과 상태의 모순이 바로 혀논재의 본질이다. 현존재는 모순을 극복하고 상태를 본성에 통합하면서 변화한다.
언어에는 정식 계약과 이면 계약이 있는데 문학이란 정식 계약의 불충분한 성질을 파괴하고 이면 계약으로 정식 계약을 보충하려는 실험이므로 정 식 계약에 대한 이의제기가 들어 있지 않은 글은 문학이 아니라는 것이 황현산의 믿음이다. (...)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모호 한 것이 되며 어떤 언어로는 절실한 진실이 되는 감정에 다른 언어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언어가 서로 만날 때 이 불확실한 것들이 솟아올라와 산과 들을 사랑과 증오를 새롭게 고찰하고 새롭게 정의하게 한다. "
평생토록 완강하게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는 것은 엄청난 힘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그러므로 황현산은 "시가 아름답다는 것은 무정하다는 것이다" <<우물에서 하늘 보기> 271쪽)라고 단언하였다(..) 근접 유사 연속 폐쇄는 기억들이 상호작용하여 이미지를 만드는 방법이다. 익숙한 이 미지들을 끊고 잇고 뒤집는 동안 사물들의 밀도와 깊이가 바뀌며 기억 속에 묻혀 있던 몽상들이 처음으로 얼굴을 들고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 로운 이미지는 존재의 고유성에 침투하여 낱말들의 의미론적 깊이를 복원해준다.
시의 유일한 목적은 새로운 이미지이다. 구원이나 해방이 시와 연관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들은 구태여 말하자면 목적 건너편의 목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새로운 이미지가 아니라면 구원이나 해방은 시를 수사적인 장식으로 타락시키 ㅔ 될 것이다. 시는 이미지들의 융해이지 개념의 교환이 아니 다. 생각에 빠져드는 것은 시쓰기와 무관하다. 시쓰기는 감각 활동이지 사유 활동이 아니다
황현산의 일생은 오디세이의 활을 당기려는 고투의 연속이었다. 이 활시위의 한쪽 끝에는 현대시가 있고 다른 쪽 끝에는 민주주의가 있다. 그는 초인적인 정성으로 이 활시위의 양쪽 끝을 가깝게 끌어당겼다.
욕망은 언제나 공백과 싸우고 있으며 시는 이 공백에 이름을 지어주려는 욕망의 실험이다. 욕망은 어떻게 작동하고 고장 나는가? 욕망은 어떻게 한 신체로부터 다른 신체로 옮아가는가? 어떠한 욕망이 어떻게 흥분하는가? 욕망이 편력하는 환경은 어떠한가? 문제는 거창한 지식이 아니라 정직한 욕망이다. 욕망만이 인간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자신을 개방하는 용기를 선사한다. 욕망은 있음이 아니라 넘어서서 있음이고 욕망의 본질은 타자의 부름에 있다.
욕망은 모든 한계를 꿰뚫고 분열과 모순을 자체 내에 보존하는 끝없는 의욕이며 깊은 정열에 의하여 특별하게 충격된 심적 운동의 끊임없는 충실성이다. 환상을 좇는 즐거움, 추억에 갇힌 우수는 진정한 의미의 욕망이라고 할 수 없다. 욕망은 객관적으로 관찰되지 않는다. 움직이는 감정을 속속들이 반영하는 눈길, 내면의 율동을 드러내는 높고 낮은 목소리, 피가 통하는 따뜻한 손길-이런 것들이 욕망의 집이다. 욕망은 거부인 동시에 개방이고 부정인 동시에 사랑이다. 욕망은 악을 정당화하지 않으면서도 악을 받아들이고 악에 대하여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투쟁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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