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넋 』, (오정희 소설집), 오정희, 문학과지성사, 2017
모처럼 잡은 소설책. 주로 수필, 산문집 좋아하지만 가끔은 소설책을 읽는데 이번엔 꽤오래간만에 소설책을 들었다. 시골의사 박경철님의 책에서 소개한 오정희 작가님의 소설. 필사하기 좋은 책이라는 소개가 나를 이끌었다. 작가님의 소설을 처음 접해본다. 오정희 작가님의 컬렉션 5권 중 첫 번째 소설집 『바람의 넋 』을 읽고 다음 순서를 기다린다. 바로 읽지 않고 기다린다는 건 그 사이에 읽어야 할 책이, 읽고 싶어 선택해 놓은 책이 아직 여러 권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어설픈 핑계를 대면 도서관에서 두 번째 책인 불꽃놀이가 지금 대출중이라는 이유도 있다. 독자들 마다 책을 보는 속도가 달라서 언제 돌아올지 잘 모르지만 순서대로 읽고 싶기도 하다. (순서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단편소설인데도 괜히 순서가 바뀌면 어색하다.)
『바람의 넋 』에는 야회를 비롯하여 10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1982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동경(銅鏡)」도 여기에 있다.
디테일한 묘사가 내가 쓰는 글과 비교되어 다시 읽고 또 읽어본다. 글은 간결하게 쓰라고 배웠다. 자세한 묘사가 자칫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될 수 있고, 독자에게 불편함으로 다가 올 수 있다고 하는데 작가님의 글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고, 그림을 그리듯 자연스럽다. 가끔 표현한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기 위해 멈칫거리는 표현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저자 소개
오정희
저자 오정희(吳貞姬)는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0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1979년 「저녁의 게임」으로 이상문학상을, 1982년 「동경(銅鏡)」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동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독일어로 번역 출간된 장편소설 『새』로 독일 리베라투르 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로서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사에서 매우 뜻 깊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저서로 소설집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짧은소설집 『돼지꿈』 『가을 여자』, 장편소설 『새』, 동화집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를 비롯해 『내 마음의 무늬』 등 다수의 수필집을 펴냈다.
독서 노트
탁자를 등지고 서서,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는 비대한 중년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길모는 꺼칠학 낯설어 보였다. 명혜는 집 밖의, 전혀 우연한 장소에서 가족을 볼 때의 슬픔과 순간적으로 외면하고 싶은 감정을 예외 없이 맛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언젠가 번잡한 거리에서 뜻하지 않게 길모와 맞닥뜨렸을 때도 명혜는 그가 그녀를 발견하기 전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지나쳐 버린 적이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가 귓바퀴에서 웅웅대다가 술렁술렁 흘러가는 것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정답게 느껴지는 것이 이미 취기가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는 신호임을 알면서도 명혜는 또 술을 따라 찔끔찔끔 마셨다. 이 낯설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분위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긴장이 아무리 술을 마셔댔자 더 이사의 취기를 자신에게 어용치 않으리라는.
명혜는 유리컵에 눈을 댄 채 멍하니 서서 자신의 내부에 괴롭게 끓고 있는 욕망을 형상화시킬 하찮은 실마리를 찾아 헤매인 시간과 길복들을 생각했다. 한나절을 도수장의 뜰에 서서, 이끌려 들어가는 가축들과 함석지붕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보았다. 또 기를 잃은 타락한 백정을 보기도 했다. 일부러 배를 빌려 찾아간 강 가운데의 섬, 선사 시대의 유적지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발밑에 굴러다니는 어느 돌멩이 하나 옛날로부터 있어오지 않은 것이 있으랴.
민자는 대답없는 그를 남겨둔 채 조제실로 들어갔다. 불행한 사람은 위로 받을 권리가 있는거야 중얼거렸지만 손이 자꾸 떨렸다. 캐비닛이 열리는 삐꺽 소리, 열쇠가 맞물리는 작은 음향을 은폐하기 위해, 그리고 결코 주명이나 수경이 나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의 기척에 나카롭게 귀를 세우며 짐짓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흰 파도와 해변을 따라 달리는 순영의 흰 옷자락을 구별할 수 없었다. 점점이 멀어져가는 순영을 보며 순영아, 순영아, 안타깝게 외쳤으나 그 소리는 외침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첫 시간에 젊은 강사는 말했다- 고고학적 발굴자는 유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발굴하는 것입니다-. 시간적 간격이 오백 년이든 오십만 년이든 간에 시대를 통관하는 궁극적인 호소는 마음을 지적 마음으로, 인간을 감지력 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입니다.
뒤로 뒤로 느리게 움직이는 버스는 마치 거꾸로 돌리는 시계바늘 같다고 혜순을 생각 했다. 이대로 한없이 간다면 머나먼 옛날에 이를 수 있을까. 후진하는 차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사람들은 화석처럼 조용히 눈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저마다 얕은 수면, 불가능한 환상, 편안치 않은 꿈속으로 피신해버렸으므로. 아이들은 아마 곤히 잠들어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맨발인 채 둘이 손잡고 자신들도 모를 길을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부엌과 마루 사이의 튀어나온 흰 벽에는 아이들의 키 높이가 연필로 표시되어 있었다. 남편이 없는 일 년 사이 아이들은 각각 십 센티가 넘게 자랐다. 그 여자는 손톱으로 문질러 그 연필 자국에 깊게 홈을 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여자의 마음속에 새겨진 홈일 뿐이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었다. 문하나 건너 자고 있는 아이들이 비현실적인 존재로 아득히 떠올랐다. 물컵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자신에 대해 그러하듯.
돌담길, 꿈에는 기리도 익숙하게 자주 가는 길, 길이 끝나는 곳에는 꿈 깨인 쓸쓸한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면서도 혜자는 꽃처럼 피어나는 취기가 영원히 그 길을 이어주리라는 기대로 더 깊은 어둠을 향해 한 걸음씩 옮겨 놓았다.
땀이 배어 미끈 거리는 가슴에 무겁게 얹힌 손을 밀어내고 연희는 일어난다. 멀어진 불도저 소리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일어선 그대로 연희는 잠깐 헝클린 머리칼 속에 두 손을 쑤셔 넣는다. 아이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신은 아이가 미쳐버린 말을 타고 달아나기보다 오히려 무너지는 흙더미 속에 갇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검은색 가구에는 워낙 그래요. 당할 도리가 없어요. 걸레질하고 뒤돌아보면 금방 부옇게 내려앉는걸요.” "난 회사에 나가 있으면서도 가끔 빈집에 소리 없이 내리는 먼지를 생각하면 섬뜩해져. 먼지라는 건 무언가 삭아가고 낡아간다는 흔적 아냐?" 경해는 거울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미 뜰은 그늘에 잠겨 있고 땅에서 피어오르는 엷은 어둠에 꽃은 짙은 빛으로 잎을 오므리기 시작했지만 피어 있던 꽃의 공간이 침묵과 심연으로 가라앉기까지의 보이지 않는 흐름은 얼마나 길고 오랠 것인가.
이제는 울음을 감추려 하지 않는 아내에게 그는 무언가 위무의 말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내에게는 다정한 말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소년 같은 수줍음과 약간의 두려움으로 입을 열었으나 아내는 어눌하게 새어나오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내는 유언이라도 듣는 시늉으로 그의 입에 바짝 귀를 갖다 대며 안타깝게 되물었다. 뭐라구요? 뭐라고 하셨어요?
일주일이란, 육 개월 동안의 생활을 무산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인가.
나는 아내의 가출 때마다 아내의 눈에 비친 우리의 생활, 보잘것없이 초라한 내 모습 따위에 살 맞은 늙은 짐승처럼 무력하게 괴로워했다. 아내가 돌아오고 그전과 다름없는 생활이 계속되는 사이 일견 나은 듯하던 상처가 아내의 가출로 다시금 더 깊고 생생하게 입을 벌렸다. 상처는 나은 것이 아니었다. 표면상의 무마였으며 속임수였을 뿐이었다. 마치 조금씩 새어 나와 스미는 물이 어느 결엔가 지반을 무너트리는 다른 형태로 우리 생활에 배어들어 꿈이라든가, 소망, 신뢰들을 잠식해가는 것이었다.
은수로서는 세중이 선언한 ‘잠정적 별거’ 상태가 시간에 으해 해결될 어떤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시간의 부산물로 얻어지는 것은 망각과 체념뿐일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고 쉽게 말한다. 세중도 역시 돈 봉투를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돈 봉투는 그에게 일종의 유예가 아니었을까.
당신이 내세우는 이유는 한 부분에 불과할지 몰라요. 몇 해를 함께 산 부부란 편안히 몸에 맞게 낡은 헌 옷과 같은 거라더군요. 사람들은 때때로 낡고 헐거워진 헌 옷을 새 옷으로 바꿔 입고 싶어 하지요. 또한 사람들은 화합과 조화를 으뜸의 덕목, 으뜸의 행복이라고 하면서 지극히 예사로운 생활 속에 때때로 혼자 있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을 숨기고 있지요.
한동안 망설이다가 그 여자는 판자를 대고 못질을 한 창문의 한 쪽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문 앞에서 조그만 계집애가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거리에는 개미 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벌어지는 시가전은 느닷없고 예고 없는 것이었기에 미처 피란을 못가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듯 기철을 죽이고 안에 숨어 밖에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얗고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줄곧 땀이 흘러내리는데도 자꾸만 춥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를 아이는 알지 못한다. 다만 길이 자꾸 자꾸 걷노라면 기억의 끝머리쯤에서 작은 목조 이층집이 나타나더랬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 빈집의 무성히 자란 잡초 속에서 날아오는 흰나비 한 마리 팔랑이며 앞서 날고 아이는 그것을 잡으려는 손짓으로 잠깐 두 팔을 내젓다가 다시 걷는다. 오라, 나의 어린 넋이여, 바람 되어 떠도는 넋이여, 하염없는 그리움 잠재우고 이제는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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