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결혼 뒤에 오는 것들』, 영주, 푸른숲, 2020

그루 터기 2022. 1. 25. 05:13

결혼 뒤에 오는 것들, 영주, 푸른숲, 2020

 

 

행복한 결혼은 과연 어떤 것일까? 기울어진 부부 관계란 어떤 것인가? 기울어진 부부 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은 또 어떤 방법이 있을까. 60을 훌쩍 넘긴 우리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 만나면 하나 같이 부부 관계가 남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들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옛날 신혼 때처럼은 아니더라도 알콩달콩 행복하던 시절의 반이라도 되돌아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 책을 보면서 조금은 방법을 알 것도 같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그런데 작가가 말하는 지침을 실천하면 행복한 삶이 되는 건가?

 

나는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 위해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스스로 주인으로 살기 위해 나만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라는 글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화장하는 여자는 이쁨을 자랑하기 위해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한 걸음 더 나가서 생각해보니 결국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라니..... 아내가 아닌 남편의 입장에서 본 내 생각이 이렇게 다르다니 반성의 마음과 함께 괜히 슬퍼진다.

 

아내의 입장에서 며느리의 입장에서 바라본 가족과 반대편에서 바라본 아내와 며느리가 새삼 다름을 느낀다. 나도 나름대로 많은 걸 내려놓고(이 말이 맞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며느리와의 관계설정에 고민을 하는 편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한 발 더 나아간 모습니다. 그 말은 아직도 나에게도 고쳐야 할 부분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기득권(?)을 내려놓는다는 건 겁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경험하거나 상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 다워야 한다.’라는 것이 있다. 매사에 자기 자리에 걸 맞는 생각과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뜻 일진데. 시아버지 다워야하고, 남편다워야 하고, 아들, 며느리 다워야 한다. ‘다워야 한다말에는 오랜 관습으로부터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지금 그 기준이 달라졌다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나는 그렇게 변하고자 노력한다.

 

저자 소개

영주

장녀로 태어나 착해야 사랑 받는다고 주입받으며 성장했다. 대가족 장남과 결혼한 이후 수십 년간 줄곧 며느리로 불리었다. 바쁜 남편의 부재와 무관심 속에서 그저 두 아이의 엄마로 사는 것이 전부인 줄만 알던 삶이었다. 그러던 결혼 23년 차, 명절을 이틀 앞둔 어느 날 시부모님께 며느리를 그만 두겠습니다말하고 며느리 사표라고 쓴 봉투를 내밀었다. 개인에게 일어난 작은 혁명이었다. 이 과정을 책으로 썼더니, 이후 각종 신문사의 인터뷰 면을 장식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패널로 참여하고, 독자들이 그를 따라 줄지어 며느리 사표를 내는 등 큰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며느리 사표 이슈의 중심에 선 저자의 두 번째 에세이다. 시부모에게 며느리 사표를 건넨 자신에게 수많은 이들이 물어본, ‘온전한 1인분의 삶을 위한 실질적인 지침을 담았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이 땅의 여성들이 슬픈 결혼을 대물림하지 않기를, 혼자여도 행복하고 함께여도 불행하지 않은 결혼을 이어갈 수 있기를 응원한다.

2004년부터 부모 교육 강사를 시작으로 가족꿈심리작업소를 운영하고 있고, 꿈 작업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며느리 사표가 있다.

 

 

 

 

독서 메모

 

며느리, 아내, 엄마, 역할 모두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종신제인 줄 알았습니다. 모든 일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무엇을 해도 끝이 없다는 생각은 삶르 고달프고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결혼하면서 내 삶의 운전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 것, 그것이 제 결혼의 비극이 시작된 이유였습니다.

 

시부모에게 며느리를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선언했고, 딸 아들에게 엄마 역할을 졸업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저 자신으로 살아가는 문이 열렸습니다. 변화된 것은 저뿐이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딸, 아들, 시부모도 모두 자신으로 살아갈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며느리를 그만두고 아내와 엄마 역할도 사라졌지만, 저는 여전히 며느리로서 시부모를 만나고, 아내로서 존재하며, 엄마로서 딸 아들을 만납니다. 예전과 다른 점은 이 모든 관계가 저의 선택에 따라 맺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과거에는 가족 때문에 고달팠다면 지금은 그들 덕분에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스스로 찾아가지 않으면 배울 수 없다. 직접 부딪히면서 배워야만 내 삶이 된다. 앞으로의 삶은 마치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처럼 질문하려고 한다. 부모의 자식으로 살아온 그동안의 나는 죽고, 온전한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교양 있는 여자의 삶이 선영 씨에게도 몸과 마음 기이 배어 있었다. 선영 씨는 자신의 몸에 밴 습성을 몹쓸 교양이라고 표현했다. 그 몹쓸 교양 때문에 맏며느리 역할, 시가의 집안일과 제사는 물론 경제적으로 원조하고, 시동생의 사고까지 뒷감당하면서도 불평불만이 없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합리하고 부당한 문제들을 살피고, 좋은 며느리이기보다는 자신에게 먼저 최선을 다하려는 여성인 우리는 이상하지 않다.

 

어떤 집단이나 모임에서든 서로 평등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잇을 것이다. 며느리가 시부모를 존중하듯이, 시부모 역시 결혼한 아들과 며느리를 존중해야 한다.

 

나만 사랑해 주는 남편만 있으면 별문제 없을 것 같았고, 설사 문제가 생기더라도 남편과 잘 헤쳐나가리라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남편만을 보고 한 결혼인데, 결혼식이 끝나자 남편도 사라졌다. () 부모에게 의존하던 삼을 그대로 남편에게 내맡겨졌다. 나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남편에게 넘긴 격이었다. 결혼식에서 아버지 손을 잡고 들어간 신부를 남편의 손에 건네주던 의미처럼 말이다. 부부의 결혼에 나는 없었다.

 

좋은 며느리의 문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다는 데 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상대를 먼저 배려하느라 자신을 배려하기 어려워진다. 자기 생각과 의견 때문에 상대 마음이 불편해질까 봐 신경이 쓰인다. 매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다시 삼킬 때가 많아진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어느새 자신의 목소리는 없어진다. 잇따라 소중한 나만의 색깔·매력·생기까지 잃어간다.

 

우리는 이제 두 번째 인생을 넘어 세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것이 필수인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의존하다가 서로를 망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거리 두기는 각자 자기만의 울타리를 세우는 것과 같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의사의 휴식 요법을 거부하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19세기에 여성이 이혼을 요구하는 일은 이례적이었다고 한다. 길먼은 아내뿐 아니라 엄마 역할까지 거부했다.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제야 신경쇠약과 우울증에서 벗어낫다고 한다.

 

딸이 사춘기 때였다. 친정어머니 탓을 했던 내가 품고 있던 말을 딸이 내게 건넸다. “엄마가 나를 이렇게 키웠잖아?” 당시에는 당황해서 대꾸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언제라도 다시 이말을 듣는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해 줄 것이다. 그런 엄마를 네가 선택했잖아! 그러니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너 자신이 져야지.”

 

엄마니까, 부부니까, 가족이니까라는 이유로 희생하고 책임질 이유가 없다. 각자 자기만 잘 책임진다면 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겠는가. 이는 무조건 뿔뿔이 집을 떠나고 이혼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집을 떠나지 않고서도 각자 1인분의 책임을 다할 수 있다. 오히려 모두가 주인인 가족 공동체가 된다면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다.

 

외부에 착하게 굴려다가 정작 자신에게 가장 잔인해 진다는 사실을, 그 끝은 스스로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착한 여자들에게 오는 복 같은 것은 없었다. 착한 콩쥐로 살았던 친구에게 다가온 암은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신념을 깨뜨리라는 초대장이었다. () 친구 안에 살던 착한 여자는 이제 죽었다. 지금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매력이 있는지 아는 당당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연애할 때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상대를 위해 죽을 수도 있지만, 결혼하면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관계가 또 부부다. 애쓰며 가꾸어 온 가정을 순식간에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내가 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남편이나 가족 등 타인도 나를 소중하게 대하지 않는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만큼 스스로를 대접해주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니 남편으로부터 소중히 대접받는다고 느낄 만한 행동을 끌어내지 못했다. ()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맡겨버리면 배려는 일어나기 어렵다.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은 상대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실천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과 같다. () 소중한 존재가 되려면 스스로 먼저 소중히 여기며, 대접 받으려면 자신에게 먼저 대접해야 한다. 내가 나에게 행하는 대로 상대도 나를 대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30년을 같이 살아도 서로에 대해 모르기도 하고, 1년만 함께해도 많은 것을 알 수도 있다. 그 차이는 서로 얼마나 자주 속 깊은 대화를 주고받는가에 따른다. 기본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다.’라고 알려주는 책임은 각자에게 있다.

 

결혼하면 부부는 배우자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배우자는 선택할 수 있지만 새로 맺는 시가, 처가는 선택이 불가능하다. 양쪽 집안의 의견도 제각각이다.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는 평소의 불만과 함께 쌓인 분노 또한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분노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면 불길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태워버리고 재가 될 수 있다. 이는 스스로에게도 엄청난 손해로 돌아온다. 마치 독화살을 맞아 고통스럽다며 그 화살을 자신과 모두에게 또 다시 쏘아대는 것과 같다.

 

삶은 연습이 없으므로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실수가 반복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잘못이다. 게다가 외도는 치명적이다. () 처음부터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방법을 적극 찾아야 했다. 한번 발생했던 일이라면 특정 조건이 갖추어지면 언제든 또다시 일어난다는 것이 마음의 특성이라고 한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할 수 있고, 거짓말했던 사람은 거듭 거짓말할 수 있으며, 외도했던 사람은 다시 외도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절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굳건한 다짐 같은 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 행동은 무의식에 저장된 마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초고를 단숨에 마쳤다 그리고 1여 년의 퇴고 시간이 거렸다. 스스로 겪었던 내용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해서 다듬는 작업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치유 과정과도 같았다. 글을 다듬을 때마다 사건들 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까. 이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분노와 후회, 상처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졌다. 울분이 가라앉고 분노가 탄식으로 바뀌며 상처가 아물어갔다.

 

결혼 초반에는 부부 갈등의 원인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했다. ‘최선을 다하는 나는 옳고, 이기적으로 사는 당신은 틀렸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남편은 공격하고 쪼아대는 나의 태도를 피해 집 밖에서 위안을 얻으려 했는지 모른다. () 자기 밖에 모르는 남편이 내게 드러나게 상처를 주었다면 남편밖에 몰랐던 나는 드러나지 않게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남편과의 관계는 시작도 내 예상과 달랐지만, 다시 살아가는 지금 세월 또한 예상과 다르다. 우리의 겨울은 봄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의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한다. 불교에서는 악업의 힘보다 선업의 힘이 더 크다고 한다.

 

시대는 우리 인식보다 더 빠르게 변해간다. 부부로 가는 길의 첫 번째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과거의 아내는 죽었고, 과거의 남편 또한 죽어야 할 것이다. () 평등한 관계로서 둘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유쾌하게 오늘을 살아가고 싶다.

 

나는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 위해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스스로 주인으로 살기 위해 나만의 시간을 보내야 할 때다.

 

20대 여자인 조카가 예쁜 외모는 여자의 권력이라고 말했다. 조카에게 여자의 외모가 권력이라면 그 수명이 얼마나 되겠냐고 질문했다. 조카는 잠시 생각하더니 “20라고 대답했다. 여자의 권력은 기껏 해야 10년밖에 안 된다는 것이냐, 그렇게 짧게 사라질 권력이라면 그것이 대체 얼마나 중요하겠냐고 되물은 적이 있다.

 

시가 전체를 놓고 보면 며느리로서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 같았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존재의 작은 용기가 시가 전체의 문화를 바꾸어갈 수 있었다. 그들이 먼저 바뀌어야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변화된 행동을 보일 때, 가족 구성원들도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족은 모빌처럼 연결된 존재다. 모빌의 줄 하나를 당기면 나머지도 흔들리는 것처럼, 며느리, 엄마, 아내가 흔들리면 가족 모두가 흔들린다. 한 사람이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나머지 가족이 행복할 수 없다. 며느리로서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남편의 부당하고 폭력적인 행동에 참아주고, 열심히 아이들에게 헌신한다고 해서 남편과 아이들이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편안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편안함은 행복이 아니다.

 

하루 24시간을 초로 바꾸면 86400초다. 이를 흔히 통장에 비유한다. 우리에게 매일 86400원씩 들어온다고 생각해보자. 이돈(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다. 매일 입금되는 이 돈을 어떻게 분배해서 사용할까? 이를 어떻게 쓸 것인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적어도 75세까지는 할 수 있는 일, 80세 이후에는 일하지 않아도 수입이 들어올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 가슴 안에 존재하던 무거운 돌 하나를 내려놓으면 자신의 잘못을 책임질 힘이 나온다. 이것이 스스로 어른이 되는 길이다. 비로소 우리는 살아남은 어른으로서 책임지며 살아갈 것이다.

 

나를 짓눌렀던 역할에 사표를 내듯이, 이제 나를 괴롭히는 고통에 사표를 내 본다. 더는 스스로를 울리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흔히 좋은 일만 기억하자고, 나쁜 일은 다 잊고 살자고 말한다. 문제는 나쁜 일들을 다 지워버리고 나면 그다지 기억할 만한 일들이 없다는 데 있다. 내게는 살아온 대부분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뿐이었다. 그렇다면 내 삶은 다 어디로 사라져야 한다는 말인가? 다시 살펴보아야 했다. 나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 정말 나쁘기만 한가? ‘나쁜 일을 끄집어냈더니, 그것의 진짜 의미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빨리 잊어야 할 나쁜 일이란 없었다.

 

이렇듯 우리네 인생살이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세상에 좋다고 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나쁜 일일 수 있고, 나쁘다고 여기는 일이 좋은 쪽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러니 무엇을 좋은 일, 나쁜 일이라고 분병하고 싫다.’ ‘좋다한정할 일이 아니다. 그저 다 살아보고 나서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기적은 더욱 그러했다. 죽을 각오로 내밀었던 며느리 사표한 자이 시가 전체에 변화를 가져왔으니까.

 

이 실험을 통해 우리는 살면서 보고 싶은 것, 필요한 것만 보고, 삶의 옆면, 뒷면 등 다른 면들을 놓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리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아왔을까 .그중 하나가. ‘고통을 대하는 태도였다. 힘든 일, 고통스러운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지 않고 도망갔다.

 

스스로에 대해 쓸모없다.’, ‘부족하다.’, ‘가치가 없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나등의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럴 대마다. ‘내가 나를 폭력적으로 비난하고 있구나.’,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구나라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려 했다. () ‘나를 관찰한다.’는 말은 한편으로 나의 부족함도 그대로 바라본다는 의미다.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르 인정하고, 거부해왔던 가장 고통스러운 감정인 자기혐오를 만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도 예전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데 힘이 되어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매일 밤 거울처럼 나를 비추어주고 길을 잃었을 때 나침반이 되어주는 이고, 다른 하나는 글을 쓰는 노트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