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글을 책을보고 느낀점과 독서를 하면서 메모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내용을 적었습니다
이 글은 저의 주관적인 이야기이므로 건전한 반론의 댓글은 환영하지만 악성 댓글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여기는 가족의 호칭에 대한 토론장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저는 불편한 댓글(거의 없었지만) 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는데
이번에는 악성 댓글의 경우 허락없이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토론장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논리정연한 반론 환영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배윤민정, 푸른숲, 2019
요즈음 자주 보는 책 중에 하나가 남녀평등에 관련된 책이나 사회소수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수자에는 성소수자도 있고, 비건 같은 식소수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소수자가 있다. 그렇다고 그런 책들만 골라 본다는 것은 아니고, 여러 권의 책을 빌려보는 중에 한 권씩 빌려오는 거다.
나는 옛날 유교 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래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예의범절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배우며 살아왔다. 먹는 다는 것은 생존을 의미한다. 그만큼 엄한 집안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고, 가치관이 변했다. 나이가 먹었다고 내 기준대로만 살수는 없다. 이젠 내가 변해야 한다. 변하기 위해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 책을 본다. 그동안 내 스스로 다른 사람들 보다 앞서 변하려 노력했다고 생각하고 있다.(이 책 작가의 시부모님처럼)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베어있던 유교사상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데도 말이다.
나에게 처가나 친가 쪽 호칭이 별로 불편하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는 서열이 어긋나지 않은데 있다.(작가는 서열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정말 신기하게도 우리 집에는 6남매가 결혼을 해도 나이 순서가 하나도 어긋나지 않았다. 하물며 나보다 손아래의 나이 많은 삼촌이나 오촌, 7촌도 없고, 나이 적은 손위 삼촌, 오촌 7촌도 없다. 그러다 보니 호칭에 불편한 것을 별로 못 느꼈었다. 처가 쪽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열이 꼭 존재해야하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또 ‘나이가 많다고 꼭 높은 사람으로 살아야 하나’ 등등 새로운 명제를 안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작가님이 말씀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이름에 ‘님’자를 붙여서 불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든 일은 상대가 있는 거다. 이제 내가 집안에서 제일 어른이라고 하지만 밖에는 나보다 더 어른들이 많다. 그리고 집안에서도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똑같이 나하고 일치하지도 않는다. 참 어려운 문제다.
작가는 며느리와 올케에 대해서 첫 번째로 문제를 삼았지만 나는 내심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결혼식날 며느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새아가’라고 썼는데 이 호칭도 며느리를 애기 취급해서 쓰는 호칭이라고 했다. 물론 작가의 의견이 모두 참일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사용했던 ‘새아가’라는 단어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니 가슴이 뜨끔하다.
사실 나는 ‘새아가’라는 단어를 며느리에게 먼저 물어봤었다.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단어가 '새아가'라는 단어였고, 남들이 하는 그 호칭이 부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결혼 상견례 때 양가 부모님과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불러보고 싶다고 했었다. 그때 예비며느리가 예비시아버지 앞에서 안 된다고 말하기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흔쾌히 "저도 그 말이 좋아요 아버님!" 하던 며느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이후로 새아가라는 단어를 적당히 쓸 기회가 없어서 써보지 못했지만 지금도 그 단어가 참 좋고 써보고 싶다. 작가가 이야기한 ‘며느리는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도 아니다. 특별히 생각을 해서 사용한 호칭이 아니라 귀엽고 사랑스워서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난 딸이 없다. 그러나 딸이라고 말하기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사돈내외분이 계시는 그곳에서 내 딸이라니.) 이젠 새아가란 단어도 어색해서 쓸 일이 있을까 모르겠다.
며느리란 단어를 국립국어원 대백과 사전을 찾아봤다. 어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인터넷 ‘나무위키’에서 며느리란 중세 국어의 '기생한다'는 뜻의 '며늘'과 '아이'가 합쳐진 말로, '내 아들에 딸려 기생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근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새아가'라는 단어는 ‘시부모가 새 며느리를 정답게 부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의 해석은 많이 다르다.
요즈음 대통령 선거철이라 예비후보들이 온갖 공약을 내놓는다. 만약 대선 공약으로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서로들 이름에 ‘님’자만 붙이자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될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은 아직도 내가 말만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건지 마음속에는 거부반응이 많이 일어난다는 이야길까? 어렵다. 참 어려운 문제다.
작가는 가족 간 호칭 문제를 폭력이라고 표현했다. 성폭력과 같은 맥락으로 표현하고 성폭력의 원인의 하나로 표현했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내 논리가 없지만 선 듯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글을 읽으면서 두현아버지(시아버지를 그렇게 불렀다.)의 말 중에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은 없으며, 다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시아버지를 두현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면, ‘두 사람이 결혼했는데 그의 부모나 형제들은 왜 끼어들었는가’. ‘두 사람의 부부 관계만 유지하고 부모나 형제들은 남들처럼 대하면 시아주버님, 처제 등 가족 간의 호칭도 필요 없지 않을까?’ 라는 우문을 해 보게 된다. (이 말 때문에 악성 댓글이 달릴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TV 뉴스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던 것을 본적이 있다. 그 때는 참 신선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이 책을 보면서는 왜 자꾸만 불편함을 느끼게 될까? 뉴스에서는 국립어학원이나 여성가족부에서 새로운 단어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호칭이란 불리어지는 쪽에서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당연히 바꿔져야한다. 그런 의미에서만 보더라도 빨리 만족할 만한 단어가 나왔으면 좋겠다. 새로운 호칭이 나오더라도 우리들 생활에 녹아들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은 ‘입을 열며’라는 책 머리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이 글은 내가 2018년 한 해 동안 한국사회의 차별적인 가족 호칭을 바꾸려고 싸워온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내가 많이 싫어하는 단어가 있다. ‘싸움’ ‘싸워온 과정’. 이 책에서 작가는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읽는 나는 싸움으로 보여 졌다. '싸우다'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말, 힘, 무기 따위를 가지고 서로 이기려고 다투다.' 라고 되어있다. 여기서는 말이 해당될 것 같다. 물론 힘도 작용한다. 과연 어떤 힘일까? 시부모님이나 형과 형수는 서열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서열이 제일 낮다고 표현한 작가는 무슨 힘일까? 싸움은 작가가 하고 있다면 그 힘이 궁금하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서열이라는 힘에 저항하는 힘. 물리 시간에 배운 작용반작용의 힘이 아닐까라는 생각정도 해본다.
가족 호칭의 개선이 가족 간 불평등을 전재로 시작됐다면 싸움은 어떤 당위성으로 시작된 걸까?
작가의 주장이 백번 옳다는 전제하에 ‘글을 쓰면서 펜을 잡은 자의 권력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라고 말한 것처럼 또 다른 권력이나 차별을 만드는 건 아닌지. 이 아침에 마음이 사사롭다.
이렇게 길게 여러 가지 구실을 달았다는 것이 벌써 나에겐 선 듯 수용하지 못하는 오랜 고집과 나쁜 습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 책,
오늘도 이 책에서 한 수를 배웠다. 그런데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다른 작가의 의견을 존중한다. 진심으로.
(책을 잃고 이렇게 긴 감상을 적은 경우가 처음이다. 그 만큼 내게 충격이었을까? 내가 만약 아내와 아들 며느리 들을 모아 놓고 “아버님, 어머님, ㅇㅇ아!, 호칭 대신 이름에 ’님‘자를 붙여서 불러보면 어떨까?”라고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이 올까? 지금 내가 상상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 발생할까?)
작가 소개
배윤민정
1985년 부산에서 태어나 김해에서 자라고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결혼한 다음 점자 도서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며 책에 실린 그림을 문장으로 설명하는 일을 했다. 이미지를 언어로 옮길 때 대상에 대한 사회의 가치판단이 들어간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가족 호칭, 직업 명칭, 반말과 존댓말 등에 있는 한국어의 차별적인 속성을 민감하게 의식하게 됐다.
2018년에 시가 구성원들에게 가족 호칭을 바꿔보자고 했다가 격렬한 반대에 부닥쳤다. 가족 집단 안에서 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야만 ‘가정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무력감에 빠졌다가, 여성차별적인 사회의 관습을 직접 바꿔보기로 결심했다. 이후 광장에 나가 가족 호칭 개정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홍보물을 통한 캠페인을 펼쳤다. 이때의 경험을 글로 엮어서 한국여성민우회 누리집과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다.
성역할에 얽매이지 않는 결혼 관계, 구성원들이 동등한 발언권과 결정권을 가지는 민주적인 가족 문화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질문을 던지며 살고 있다.
독서 메모
“우리 모두 ‘아주버님’, ‘형님’ ‘도련님’이라는 호칭 대신 이름에 ‘님’자를 붙여서 불러보면 어떨까요?” 모든 것은 나의 이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상대보다 내가 더 많은 권리를 지녔다는 생각. 따라서 나는 상대방에게 예우를 받아야 하며 상대방은 나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 이것이 당연하다는 생각.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많아질수록 폭력은 사회의 자연스러운 질서가 된다.
이 사람들과 가족이 된다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하면 고용한 바다를 나아가는 적은 뗏목이 떠올랐다. 한 장의 널빤지에 불과했던 내가 이제는 뗏목의 일부가 되는 것 같았다.
‘도련님’과 ‘형수님’의 경우 모두 끝에 ‘님’이 붙는다고 대등하게 볼 수는 없다. “‘형수님’이라는 호칭에는 형의 아내를 높여 이른다는 것 말고는 어떤 의미도 없는 반면, ‘도련님’에는 과거 신분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사용했던 호칭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쪽에서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쓴다면, 상대편은 ‘마님’이라는 호칭 정도는 써야 형평성에 맞지 않을까? 게다가 아내의 형제자매에 대한 호칭으로 말하자면, 남편은 그저 ‘처형’, ‘처남’, ‘처제’라고 부르면 그만이다.
시가 모임에서 오직 남편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경향도, 남편의 나이를 기준으로 구성원들과의 관계가 정해지는 부계 중심적인 질서와 무관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가슴속에 떠돌던 기분은 점점 구체적인 질문으로 떠올랐다. 나는 두현의 가족들과 평등한 관계로 만나고 있는 걸까?
다수의 기혼 여성들은 가족 호칭이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면서도 쉽사리 시도하지 못한다. 그들 중 일부는 호칭을 “‘책상’이나 ‘의자’ 같은 이름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못 부를 것도 없다” 말한다. “하지만 가뜩이나 각종 경칭으로 상대방과 나의 위계를 엄격하게 따지는 한국어의 구조에서, 그것도 가족 관계의 호칭이 아무런 가치 판단도 들어 있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하기란 힘들다. 사물의 명칭과는 달리, 사람을 부르는 호칭에는 관계에 대한 인식이 들어 있지 않은가.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 것은 2년 뒤 인터넷 뉴스 기사를 봤을 때였다. 기사에는 나처럼 ‘아니요’에 체크를 했다가 아기를 낳은 뒤 자신의 성을 붙이려 했다는 한 여자의 사연이 실려 있었다. 여자가 출산을 앞두고 가정법원에 성 변경 문의를 하자, 이미 ‘아니요’ 박스에 표시를 했다면 어쩔 수 없다며, 정 바꾸고 싶으면 이혼한 다음 다시 혼인신고를 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왜 이 사람들이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지 않고, 자기 행동의 뜻을 남이 헤아려주기를 바라는 걸까?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해놓고 뒤돌아서서 달래주려는 태도를 좋은 뜻으로 해석할 수는 없었다.
두현 아버지의 메일에서 ‘새아가’라는 낯선 호칭을 보고, 나는 한국 사회가 원하는 며느리상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두현은 내 부모님에게 ‘새아기’로 불리지 않는데, 애 나는 시가에서 ‘새아기’가 되는 걸까? 이 말에는 며느리는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어른이 가르치고 품어줘야 한다는 정서가 깔려 있었다. 며느리는 아이가 부모를 따르듯 시어른을 따라야 한다. 는 의미도 엿보인다. 자애로운 시어른과 순종하는 며느리. 이것은 한국 사회에 강력한 규범으로 존재하는 고부 관계의 모델이었다. 나 역시도 이 규범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서만큼은 동의 할 수가 없다. 나도 며느리에게 ‘새아가’라는 단어를 사용 했었다. 그러나 작가가 주장하는 그런 내용만 가진 있는 것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주장대로 시어른이 가르치고 품어줘야 한다는 정서가 나쁜 정서도 아닐뿐더러 시부모와 며느리 관계 외에도 사회경험이 많은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조금은 부족한 며느리에게 가르치고 품어줘야지. 매사에 잘 잘못을 따지고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 부모가 볼 때 자식은 평생 어린애 같고, 걱정스러운 존재라는 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아흔의 노모가 칠순의 아들에게 차 조심하고, 밥 잘 먹고 다니라고 하지 않는가?)
“일상에서 그렇게 따져 들어가는 게 무슨 소용이야?” “ 자격지심 아니야?” 이 말이 아팠던 이유는, 아마도 살아오는 동안 이런 말이 수없이 내 안에서 되풀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여자들이 살아가면서 어느 한순간은 자신에게 저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 마다. 내가 한번 눈 감고 지나가면 아무 문제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았을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건 아니라고 외치는 작은 목소리를 지워버리지 않았을까.
우리가 호칭을 그저 단순히 관습적인 문화라고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호칭이라는 언어가 그 집단에 속한 각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고 사고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구분된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면서 위계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고, 그 인식은 곧 가족의 서열 구조를 지탱하는 뼈대가 된다. 이 수직적인 구조 안에서 아랫사람의 말은 얼마든지 무시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도전’으로까지 여겨진다. 심지어 윗사람은 아랫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것을 ‘대화’가 아니라, 자신들이 ‘말을 붙여주는’ 시혜적인 행위로 인식하곤 한다.”
살면서 불쾌하고 싫은 일을 맞닥뜨릴 때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 내 자격지심이나 피해 의식인지, 지나치게 따지는 건지, 누구보다 자신에게 먼저 물었습니다. 그런 자기 검열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던 많은 순간들이 떠올라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 저는 그 침묵이 결국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는지 생각합니다.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는 사람들도 '시가'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순간 관계가 기이하게 왜곡되는 것은 바로 이 높낮이 때문이었다. 한쪽은 '네가 감히?', 한쪽은 '네가 뭔데?'라는 질문을 품게 되는 이 관계. 서로에 대한 괘씸함과 모멸감으로 무장한 채 마주하게 되는 이 계단. 내가 호칭이 차별적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재현이 '일도 안 시켰는데 뭐가 문제냐'며 버럭 했던 이유는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은 자신의 계단에 서 있었을 뿐이라는 억울함. 이 계단에서는 누구도 평등한 개인으로 만날 수 없었다. 모두가 행복한 호칭을 찾아보자는 제안마저도 각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도발이자 도전으로 여겨졌다.
이 웃음바다가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 것인지 알기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가족 서열에서 가장 말단에 있는 자가 나도 ‘님’자를 넣어서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것만으로도, 사랑과 웃음이 넘치는 가족이라는 허상은 순식간에 증발했다.
전통이라서 바꿀 수 없다고 하기엔 우리가 모든 전통을 보존하면서 사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애초에 전통이라는 것을 결정하는 집단이 누구인지도 의문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것과 그러지 않을 것을 선택할 힘이 이는 자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지금까지 그 선택에 여자들의 목소리는 얼마나 반영되어 왔을까?
무엇이 사회문제인지 결정할 권한조차 남자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결은 고사하고 가족 호칭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부터가 여자들에게는 지난한 싸움이었다.
가족 호칭 문제는 비단 가족 내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반에서 풀어야 할 거대한 숙제임에도 정부 차원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은 아직도 미미하다. “국립국어원은 언중에게 책임을 돌리고, 언중은 사전에 책임을 돌리고, 국가는 민간에 책임을 돌리는 동안, 여자들이 감내해왔고 여전히 감내하고 있는 모욕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에서 여자들에게 울려 퍼지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가족 호칭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하는 국어학자들은 대화의 장에 참여해서 합의점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 문제를 판단하고 거부할 권한이 있다고 믿는다. 저자의 시가 구성원들 모두 저자가 입을 다물기를 바라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폭력에 대해 항의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당신이 나에게 한 행동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상대방의 1차적 반응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말했다는 사실 자체가 없는 것처럼. 내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가해자의 무반응, 목격자들의 외면, 내가 겪은 일은 '사소한 일'이라는 분위기에 눌려서 나는 늘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물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외쳐도 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가닿을 수 없다고. 그렇게 내가 침묵하고 나면, 나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다시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왔다. 인간 사회를 서열 구조로 보는 사람들에게 약자의 목소리는 가벼운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강자는 침묵을 행사할 수도 있고, 명령할 수도 있다. 사소한 것과 사소하지 않은 것을 결정할 힘이 있다.
성폭력이 불균형한 권력관계에서 일어나듯이, 호칭 차별 역시 가족 안에서의 권력 차이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차별적인 언어는 차별적인 인식을 만든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성폭력은 가정에서 언어를 통해 형성된 여남 관계에 대한 인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작가의 이 말이 꽤 오랫동안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성폭력의 원인을 가족 간의 호칭에서 출발한다는 생각. 표현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라고 표현했지만 직역하면 ‘그것도 원인 중에 하나다.’라는 것이 아닌가? 비약해서 생각한다면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남자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성폭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데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헷갈린다. 내가 비약하는 것일까?)
"당신은 가족들을 모두 '님'이라고 부르는데, 어째서 당신이 '님'이라고 불리고 싶다는 건 무례한 일이 되는 걸까?
“한국에서는 이 권력자의 질서가 문화라는 이름으로, 예의범절이나 도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곤 한다. 자식은 부모의 말을, 제자는 선생님의 말을, 나이가 어린 사람은 연장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 규범으로 정해져 있다. ‘아랫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을 ‘윗사람’은 할 수 있고, ‘아랫사람’이 요구할 수 없는 것을 ‘윗사람’은 할 수 있다는 관념이 온 사회에 팽배하다. 이런 위계 구조 안에서 폭력이 발생할 것인가 아닌가는, 오직 서열의 위에 자리한 자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호칭이 정말 아무 의미 없는 기호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바꾸자고 했을 때 이토록 격렬하게 거부하는 이유는 뭘까? 이런 반응은 현재의 호칭 체계에서 자신들이 기득권이며 수혜자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
“호칭이 변하면 가족이 해체된다고 주장하는 말의 이면에는 ‘윗사람-아랫사람’이라는 수직적인 질서가 아닌 관계로 타인을 대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공포가 깔려 있다. 여남을 막론하고 자신과 나이가 같은 사람만을 대등한 타인, 즉 ‘친구’라는 관계로 만나온 것이 한국인의 보편적인 경험이다. 특히 가족이라는 사적인 집단에서 우리는 한 번도 대등한 타자를 만난 적이 없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 집단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수직적인 서열로 인식한다. 이 가족 집단에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면, 구성원들은 기존의 서열 구조에 그를 필사적으로 집어넣으려고 한다. 그 구조를 벗어나서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과 관계 맺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아가’도 아니고 ‘형수님’이나 ‘제수씨’도 아니라면, 이 여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우리 가족 안에서 개인으로서의 ‘나’를 주장하는 여자. 가부장의 질서에 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하 여자. 그는 ‘남’도 아니고 ‘우리’도 아니, 불편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고작 호칭 하나 바꾸자는 것뿐인데 사회가 통째로 흔들릴까 봐 걱정하다니, 그 ‘부계 사회’라는 관념이 얼마나 나약한 토대 위에 세워진 망상인지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두현의 아버지는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은 없으며, 다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일 뿐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현의 어머니는 우리만 만나면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며 눈가를 훔쳤다.
“두현이 형 고소할 겁니다.” “왜? 도대체 또 무슨 일인데?” “오늘 얘기 들었어요. 저보고 또 아랫사람이라고 했다죠? 저는 그런 얘기 용납 못합니다.” 전화기 너머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이어졌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영국의 관습법이 생각이 났다. 또 우리나라 법에 아랫사람이라고 표현을 했다고 죄를 물을 수 있는 법이 있을까? 명예훼손죄? 잘 모르겠다. 다행스럽게 고소까지는 가지 않은 것 같다.)
“윗사람 아랫사람이 문제라면 내가 제일 아랫사람 할게. 그러면 된 거 아니야…” “지금 제가 윗사람 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세요? 제가 겪은 일이 차별이고 폭력이기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요.”
나는 이 싸움을 통해 한국 사회의 환부를 들여다 볼 기회를 얻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개인에 대한 미움에 사로잡혀 진짜 싸움의 대상에서 눈을 돌리게 되지 않기를 바랐다. 내 분노의 대상은 시가 구성원들을 이렇게 대결 구도로 몰아넣는 한국 가족의 질서 그 자체였다. 가부장의 질서, 위계와 서열이라는 야만. 시가 구성원들이 모두 사과를 한 뒤에도, 나는 내 안에서 똑 같은 강도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나를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 힘을 잘 다루고 싶었고, 싸움의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가부장제의 기만적인 평화를 부숴버릴 목소리를 가지고 싶었다. 자동차 거울에 우리들의 모습이 비쳤다. 바로 이 자리가 내 싸움의 출발점이었다.
(섬득함을 느끼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내가 이 모든 일을 누구를 위해서 한다고 생각해?” “나를 위해서 한다고? 하지 마. 그런 시혜적인 마음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마. (…) 이건 내 일이 아니야. 너의 일이야. 사회의 차별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인간 앞에서 네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 인지라는, 네 삶의 문제라고!" "나도 알아 아는데 .. 나도 할 수 있는 만큼 했는데 , 그래도 내가 당신 삶을 착취하는 사람이고 가해자일 뿐이라면 ... 이제 나는 뭘 더 할 수 있는 거지?”
어느 날 두현 어머니가 두 달 동안 여행을 떠난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출국하기 전에 두현의 어머니는 나에게 편지를 썼다. (…) "민정 님! 민정이가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아 펜을 들었다. 네 글을 읽고 우리 부부가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구나. 민정이 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인지는 느끼게 되었고, 공감도 되고.…."
우리 집에 시집올 여자들은 정말 편할 거다. 부모님도 좋은 분들이지, 제사도 안 지내지 …,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몰라요. 저는 이번에 호칭을 놓고 벌어진 갈등이 우리들의 오만함에 대한 대가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 일상을 가꾸어 가길 원한다. 동반자와 관계를 법과 제도를 통해 보호받고 지원받길 원한다. 동시에 여자의 삶을 착취하며 유지되는 가부장제가 사라지길 원한다.
“나는 내 마음에 맞는 사람과 함께 일상을 가꾸어가길 원한다. 동반자와의 관계를 법과 제도를 통해 보호받고 지원받길 원한다. 동시에 여자의 삶을 착취하며 유지되는 가부장제가 사라지길 원한다. 나는 사랑을 원하고, 내 관계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제도적 보호를 원하며, 여성 인권의 향상을 원한다. 이 모든 것이 내 욕망이고, 동시에 내가 시민으로서 보장받아야 하는 삶의 권리다. 나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한 가지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얻기 위해 싸우고 싶다.”
나는 결혼한 여자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 '갈등을 최소화하며 현명하게 변화를 끌어내라'는 목소리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런 말들은 변화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간 동안 여자에게 차별을 감내하라는 주문과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이 '가정의 평화'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평화 밑에는 여자, 특히 '며느리'의 인내가 깔려 있다. 나는 약자의 침묵으로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보다, 구성원들이 부딪치고 갈등하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 더 건강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민주주의가 그러하듯이.
한국 사회의 여자와 남자라는 자리, 며느리와 사위라는 자리, 동서와 도련님이라는 자리, 그리고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나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울 고 있는 너, 이토록 울퉁불퉁한 지형 위에서 너와 내가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많은 사람이 ‘가정의 평화’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평화 밑에는 여자, 특히‘며느리’의 인내가 깔려 있다. 나는 약자의 침묵으로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보다. 구성원들이 부딪치고 갈등하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 더 건강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민주주의가 그러하듯이.
우리는 자주 '일상에서 시시콜콜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야?'라고 질문을 던진다. 문제는 자신이 따지는 일상의 문제는 시시콜콜하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개는 상대가 따지는 문제는 시시콜콜하고, 내가 따지는 문제는 시시콜콜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불균형의 인식을 특히 '윗사람'이라고 자리 매김되는 사람들에게서 더 자주 보게 된다. 윗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논쟁은 '도전'의 의도가 있다고 해석하는 태도는 우리의 일상을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하게 만들어서 다양한 참사를 초래한다. 그리고 그 참사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지 못하게 마비시킨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려 돌아온다.
피하고 도망치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삶이었다면, 이제는 달리기를 멈춰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칠 곳이 없다면 뒤를 돌아보자 나를 쫓아오는 것들의 멱살을 잡고 맞붙어보자. 가족 호칭을 놓고 한 해 동안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서러움이나 억울함이 없는 투명한 시선으로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싶었다.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가부장제의 논리를 파악하고 싶었고, 약점을 찾아서 무너뜨리고 싶었다.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저보다 먼저 책을 빌려보신분이 메모한 내용이다.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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