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문득 새떼가 되어』, 유헌, 해드림출판사, 2020

그루 터기 2022. 1. 26. 00:03

문득 새떼가 되어, 유헌, 해드림출판사, 2020

 

천천히 가자나의 요즈음 화두 중에 하나다. 천천히 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의 시간을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목포 MBC 아나운서와 보고제작국장을 지내고 강진달빛 한옥마을로 정착하신 작가의 경험을 이야기 한 책이다. 인생 2막을 시작하신 작가님의 멋진 다음 책을 기대해 본다.

 

 

 

저자 소개

유헌

전남 장흥 회진포구 선학동에서 태어나 강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목포 MBC 아나운서와 PD,

보도제작국장을 지내는 등 근 반세기 객지로 떠돌다. 다시 월출산 자락 강진달빛한옥마을로 귀향했다. 2011한국수필신인상, 月刊文學시조부문 신인상, 201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시조 떠도는 섬이 당선됐다.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 한국문학사편찬위원,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세계시조시인포럼, 율격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전남수필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시조집으로는 받침 없는 편지』 『노을치마가 있다

 

 

 

독서노트

 

나는 무지하게도 수석은 빼어날 수()의 수석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전을 찾아보니 수석(壽石)이었다. 목숨을 갖고 있는 돌이었던 것이다.

 

마음의 담장만은 쌓지 않았으면 좋겠다. 허물면 눈에 들어온다. 저편도 보인다. 앞으로 더 열고 살 작정이다. 생각이 열려 있었다면 새들 편에서도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사발처럼 하얗고 번지르르한 것보다는 키 작고 거칠거칠한 접시가 때론 더 쓸모 있다는 것도 미리 알았을 것이다. 이번 사기 사건은 욕심만 앞섰지. 근본적으로 상애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생긴 일이었다. 그랬다. 내가 새떼가 되어 보니 눈에 보였다. 역지사지, 입장을 바꿔 바라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얄팍한 입술에 갇힌 속 좋은 물보다는 경계를 짓지 않은 접시 물이 낫다는 걸. 나 문득 새 떼가 되어 깨우친 그런 여름 한낮이었다.

 

귀한 고구마 꽃을 볼 수 있어 좋긴 한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섬뜩하다. 고구마 꽃이 우리 인간에게 보내는 무서운 경고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 경고음을 소홀히 들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지구가 뜨거워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욕심 없이 느리게 살고 싶다. 민들레 씨앗은 바람을 타고 이사를 간다는데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버리고 비우고 느리게 살고 싶다. 너무 한가한 얘기로 들릴지는 몰라도 은퇴를 앞둔 지금부터는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다.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언덕을 넘으며 200년 전 한 여인의 애틋한 마음을 읽는다. 산 높고 물 선 귀양지에서 하릴없는 일생을 보내고 있을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보낸 깊은 뜻은 무엇이었을까. 병이 들어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노을치마를 보냈을지 궁금증이 더해진다. 한때나마 행복했던 신혼의 단ㄲㅁ을 기억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마음을 전하려 했음일까 어떤 생각이었든 간에 백 마디 말보다 훨씬 더 깊고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의 안타까운 표현이었으리라.

 

대결보다 함께 갈 때 더 멀리 갈 수 있다. 적당히 져 주면서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겠다. 지금 소나무 가지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저 까치를 이해하고, 마당의 참새들과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살아갈 때 나의 산골 생활 재미는 더 쏠쏠해질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는 일, 늦었지만 다시 지금부터다.

 

둘레길 때문에 생긴 그늘은 없는 것일까. 양지뿐일까? 둘레 길을 처음 낼 때 주민들의 건강을 챙긴다는 명분 때문인지 의견 수렴 같은 절차는 아예 생략하고 그냥 밀어붙이는 것 같다. 그래서 산의 허리는 잘려 나가고 , 등짝에는 포클레인이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 길을 걸을 때면 짓뭉개진 풀잎들이 피를 흘리고, 잘려 나간 생목들의 고통 소리가 들리는 듯해 불편해질 때도 있다.

 

내 친구의 기억에 부러움으로 남아 계신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세상을 뜨셨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아쉬움을 넘어 절절한 뉘우침마저 포개진다.

 

어머니, 당신은 참 왜소하셨습니다. 키가 큰 아버지가 저에게 내리친 회초리 대쪽을 맨손으로 막으시다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하셨지만 아들은 그때 당신의 그 아픔을 알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험한 세상을 건너오셨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였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멀리서 저를 보고 계십니다. ‘괜찮다. 괜찮다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 모든 게 후회로 남습니다. () 어젯밤 큰아들 내외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어버이날 찾아뵙지도 못해 죄송하다면서요. 당신의 아들은 괜찮다. 괜찮다.’했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이 이제 당신을 닮아가나 봅니다. (어느 어머니가 작가님의 어머니와 다르리요. 어느 어머니가 그립지 않으리요. 코끝이 시큰합니다.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

 

그 중심에 고부 갈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구부(舅婦) 갈등이라는 말도 있기는 하다. 시아버지 구(), 며느리 부()를 쓰니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갈등을 의미하는 말일 게다. 사실 구부갈등이라는 건 그 말 자체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 하겠다.

 

밤길과 동심, 왜일까? 낮에는 학교에 있거나 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고생한 기억들이 대부분이라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그때 이미 밤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던 탓일까.

어쨌든 시골에서 밤샘하며 보냈던 일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책갈피에 오래도록 묻어있다. 빛이 바랠수록 더 새록새록 떠오른다. 듣는 사람은 식상할지 모르겠으나 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당사자는 옛 생각에 가슴이 촉촉해진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옆 동네 신풍리 마을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흉내 냈던 일도 기억에서 떠나질 않는다. 서로 원수진 일도 없었고, 서로의 땅을 뺏는다고 내 땅이 되는 것도 아닌데, 죽기 살기 돌팔매 싸움질로 밤을 지새웠는지 알 수가 없다. 밭둑을 오르고 논둑을 달리고, 언덕을 기어올라 통쾌한 기습공격으로 그들을 우리의 영역에서 몰아내며 고래고래 질러댔던 함성들이 귓전을 맴돈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생전에 가장 듣기 좋아했다는 소리 중의 하나가 소 풀 뜯는 소리라고 했다던가. 우리 인간에게 모든 걸 다 내주고 흙으로 돌아가는 소의 그 순하디순한 눈동자를 항상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그 동심을 닮은 순수를 가까이 느끼며 살고 싶다.

 

애 저녁 초승달이 용마루에 걸터앉아 기우뚱 허리 굽혀 수묵화를 그리는 밤 달빛을 줍고 있는 나 그림 속을 걷고 있네.

 

이제는 우리 수필문학도 이런 고정관념의 틀에서 조금은 벗어났으면 한다. 과감히 5매 수필로 압축해보는 형식실험은 물론이고 과거의 이야기보다는 미래의 소재를 가지고도 요리조리 요리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갈수록 명절 선물의 많고 적음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더 많이 가진 사람, 보통 사람보다 더 큰 혜택을 누리고 사는 사람의 집 앞에 놓이는 선물 보따리는 항상 더 크고 무겁다. 이제부터라도 누군가에게 두 개 할 걸 하나만 하고, 그 나머지는 주변의 소외된 이웃에게 나눠주고 싶다. 전하는 사람도 기분 좋고, 받는 사람도 진심을 부담 없이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선물을..

 

목포이 대표적인 달동네인 온금동은 바람 때문에 온 동네가 눈물바다가 된 적도 있었다. 한겨울 높새바람이 어선을 덮쳐 마을 어민 수십 명이 떼죽음을 당했었고 지금도 그 아픈 기억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온금동은 한 때 지아비를 파도에 묻은 홀로된 여인들의 슬픈 이야기가 한으로 가득 찼고 제삿날이 같아 동네 고샅고샅 마다 서러운 겨울바람이 문풍지를 흔들던 시절도 있었다.

 

나는 박기동 시인의 누이 박영애의 무덤을 찾고 있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지나갔다. 소나기는 폭우로 변했고 부용산 기슭엔 먹구름이 내려와 있었다. 무서웠다. 벌교 읍내가 비안개 틈새로 나타났지만 나는 혼자였다. 주변엔 잡품 무성한 무덤뿐. () 무더위 때문에 차창을 모두 활짝 열어두고 떠나 자동차 안은 빗물이 넘쳤고, 아내와 아들의 몰골은 볼만했다. 주변에 인가도 없고 자동차 안은 홍수가 나 있었다. 이런 부용산으로 나는 제 26회 한국방송대상 우수작품상 수상에 이어 MBC 다큐멘터리 경연대회 대상까지 거머쥐었다.

 

유달산 숙직실 창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아니 모두가 열어 놓고 잠을 잔다. 지난 20여 년 동안 유달산 방송국 숙직실은 잠을 자는 곳이라기보다 달빛을 따라 별빛을 쫓아 추억을 만들어 가는 곳이라는 표현이 맞을 게다.

 

사람 좋은 최호길 씨, 내연발전소장인 최 씨는 발전소일보다 가거도를 찾은 사람들을 안내하고 가거도를 알리는 데 더 열심이다. 최호길 소장을 만나면 가거도 여행의 절반을 이룬 셈이다.

 

그때 주모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언제까지 허송세월할 거냐. 후학이라도 가르쳐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주모의 간절한 충고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 주모는 200년 전 그 주막을 나왔다. 사의재 뒷마당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오늘 그 길고 긴 주모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금서당 언덕에 서니 저 멀리 구강포구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강지만의 파도 소리가 철썩 처얼썩 들리는 듯하다. 그 위로 조금 전 보았던 완향 선생의 1991년 작 구강조망이 겹쳐 보인다. 그렇게 구강포구에 그리움 짙은 붉은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탕헤르항을 향해 버스가 달린다. 차창 너머로 버스와 함께 달리는 젊은이들이 보인다. 한 명 또는 두 명이. 처음엔 무심코 봤는데 그만한 나이 또래 아이들의 달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궁금해 누군가 가이드에게 묻는다. 왜 저 애들은 더운데 한낮에 한결 같이 뛰고 있느냐고.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유러피언 드림을 좇아 아프리카 고향을 떠나온 아이들이었다. 밤낮으로 뛰고 또 뛰고 심지어는 쓰레기통을 뒤져 먹거리를 해결하면서 탕헤르를 향해 달린다고 했다. ()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관광버스의 바닥에 매달려 유럽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아프리카 아이들, 그들의 무모함을 나무라기에 앞서 그들이 처한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