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잘 살았습니다. 』, 류승희, 생각정원, 2020
이 책은 만화책이다. 만화 에세이. 본문은 물론이고 프롤로그나 에필로그도 만화로 그렸다. 그동안 만화에세이를 몇 권 본 적이 있는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만화로 그런 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잔잔한 생각으로 풀어나간 만화다.
저자 소개
류승희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고, 서른이 다 되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두 아이의 엄마로, 밤에는 만화가로 분주히 살고 있습니다. 매일 책상에 앉아 끼적이길 좋아하고, 한낮의 요가와 산책을 즐깁니다. 누군가의 책장에 꽂혀 있는 작가의 책을 상상하며, 오늘도 느릿느릿 연필로 세상을 그립니다. 첫 책 《나라의 숲에는》으로 ‘2013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녀들의 방》은 ‘2019 우수만화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밖에 《나리나리 고나리 1~3》등 아이들을 위한 책도 꾸준히 내고 있습니다.
독서 메모
밤의 아파트는 수많은 칸이 그려진 종이처럼 보인다. 15층까지 직사각형 칸이 나란히 놓여 있지만 칸 안에 그려진 그림은 제 각각이다. 어떤 칸은 밝은 노란색으로, 어떤 칸은 까만 잉크로 혹은 옅은 회색으로 칠해져 있다. 또 어떤 칸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떤 칸에는 나란히 놓인 화분의 향기가. 어떤 칸에는 기름진 음식 냄새가 묻어난다. 멀리서 바라보는 밤의 아파트는 한 장의 모자이크 그림처럼 보이기도하고, 여러 장의 만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권의 책을 읽듯 아파트 창문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의 마음속 찌꺼기도 털어낸다. (작가의 말 중에서)
어느 누구도 옷장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마법처럼 엄마가 된 게 아니다. 매일매일 아이와 부대끼며 서로 밀치고 끌어안으며, 그렇게 엄마가 되어가는 것이다.
일주일에 세 번, 아이를 봐주러 엄마가 집에 온다. 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엄마가 집에 와서 산후조리를 해줬다. 그 후로도 모른 게 서툰 딸이 불안했는지, 아니면 처 손주가 너무 예뻤는지 일주일에 몇 번씩 와서 요리, 청소, 빨래 같은 집안이도 해주고 아이도 봐줬다. 그런 엄마 덕분에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벌써 6년째 엄마는 우리 집으로 출근 중이다.
살짝 열린 베란다 창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온다. 닫힌 블라인드 위로 화단에 서 있는 나무 그림자가 비친다. 몇 개 남지 않은 나뭇잎들이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으며 산들산들 바람에 흔들린다. 나는 웅크린 채 잠든 엄마에게 살며시 담요를 덮어준다.
우리 집에 치약이 두 개 있다. 신혼 때는 우리 집에도 치약이 하나만 있었다. “오빠! 치약은 끝에서 누르라니까!” “ 내가 밀어 놨는데 중간에 짜면 어떡해?” “…” “ 내 얘기 듣는 거야” “ 아, 알았다고 별것도 아닌 일에 왜 화를 내고 그래?” 그 땐 정말 많이 싸웠지. 이제는 치약을 어느 정도 쓰면 새 치약을 꺼내 놓는다. 그럼 귀찮은 남편은 새 치약을, 나는 남은 치약을 혼자 쓴다. 하나의 치약이 두 개가 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혼 7년차 이제는 변하지 않는게 더 많다는 것을 알아간다.(우리 집은 그 반대다.)
어느새 교실안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선생님이 거울 앞에 앉자 교실이 조용해진다. 선생니므이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동작을 이어간다. 다리는 뻣뻣하고, 파과 몸통은 후들 거리고, 허리는 젖히지 않지만, 동작에 온몸을 집중한다. 플랭크를 하느라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스쿼트를 한두 개 더 하려고 입술을 깨문다. 단 1,2초라도 안 되는 자세를 더 유지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머리는 사라지고 몸만 남는다.
고등학교 친구인 K는 언제나 나보다 두세 걸음 먼저 걷고 있었다. 대학도, 연예도, 취업도, 꿈도…. K의 발자국만 바라보는 내가 너무 싫어 마음속으로 점점 K를 멀리했다.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가고 싶은 길이 모두 다르고, 각자의 보폭도 다 다르다는 걸. 오랜 시간 걷다 보면 나와 K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여전히 갈 길을 잃고 헤맬 때 마다 나를 이끌어준 건 희미하게 빛나던 ‘이야기’였다. 매일 밤 내가 읽은 이야기는 누군가의 삶이었고 삶은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졌다. 수많은 삶과 이야기를 돌고 돌아, 지금 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읽고 있던 책을 덮어 책장에 꽂는다. 나는 가만히 책장을 다시 한 번 더 바라보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습관처럼, 잠든 아이들 이마를 짚어보고 구겨진 이불을 바로 덮어준다. 조용히 아이들 사이에 누워 이불을 덮는다. 제발 오늘 밤은 아침까지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두 눈을 감자 길었던 하루가 끝난다. (잠시라도 책과 가까이 할 시간이 있다는 건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힘들 하루 하루의 피로를 식혀줄 나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구요)
“여보세요. 엄마 지금 밖이야~” “광화문” “너희들이랑 왔던 커피숍 그 뭐더라?. … 그래 스타벅스 거기야. 그냥 심심해서 나왔지. 아니, 그렇다니까~” ‘띡’(전화 끊어지는 소리), “참나 뭐가 놀랄 일이라고” ‘늙으면 혼자 다니는 것도 청승맞아 보이겠지’ (나도 가끔 혼자 커피를 마시러 별다방 같은 곳에 가는데,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왠지 어색하다. 나이로도 항상 최고이고, 혼자 온 늙은이는 더더욱 없으니…)
모든 풍경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헤맬 줄은. 이제는 알겠습니다. 가고 싶은 길도, 각자의 보폭도 모두 다르다는 걸. 나는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던 꿈이,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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