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유이넘, 2014
박완서 작가님의 등단 작품이기도 하고, 교과서 한국문학으로 널리 알려진 『나목』. 청소년들을 위해 만든 책이다. 이것도 숲속책방 천일야화에서 소개한 책이다.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많이 읽기도 했지만 요즈음도 꾸준히 새로 만들어진다, 물론 돌아가신 분이 새로 글을 쓰실 일은 없으시겠지만 그동안 발표한 작품들을 다시 모아 만드는 책일 게다. 대학논술시험에 많이 나오는 책. 새삼스럽다. 내가 이 나이에 논술을 볼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궁금했다. 논술과 관계없이 그냥 보고 싶어 책을 폈다.
책의 마지막을 넘기면서 웃음이 났다. 논술 문제라니... 학생들의 참고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맞아 이 책이 ‘서울대 교수진이 추천하는 통합논술’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이지.. 논술 공부한다는 기분으로 한 번 읽어 봤다.
저자 소개
박완서
저자 박완서는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나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1950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970년 마흔의 나이에 「나목」으로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어 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만해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 사회의 풍속을 세밀하게 그려낸 빛나는 작품들로 여전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독서 메모
나는 사과를 꺼내 태수에게 먼저 하나를 주고 나서 나도 한 입 아삭 베물고 사각사각 씹기 시작했다. 상쾌한 신맛과 사각사각하는 쾌감, 사각사각, 나는 연달아 몇 개의 사과를 먹었다. “찬 것을 너무 먹는 군.” 태수가 사과 봉지를 빼앗아 저쪽 손에 쥐고 아른 한쪽 손으로 내 허리를 감으며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사과를 사각사각 먹는, 볼이 붉은 사내애를 갖고 싶지 않아?” “개는 대관절 누굴 닮았을까?” 나도 한껏 엉뚱한 대답을 해 줬다. “그야 경아와 날 반반쯤 닮았겠지.” 그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만큼 와락 나에게로 가까워졌다.
어두운 비탈길 끝나고, 성당 앞까지 왔다. “사람이고 싶어. 내가 사람이라는 확인을 하고 싶어.”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온몸 곳곳에서 맥박이 힘차게 뛰는 것을 나는 느꼈다. 기쁨과 충족감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그의 입술이 덮쳐 오며 덜거덕 하고 그의 손에서 장난감 트럭이 떨어졌다. 이어서 내 손에서 소꿉장난감이 땅으로 뒹굴고 나는 두 팔로 거침없이 그의 목을 감았다. 그가 먼저 나를 밀치고 장난감 트럭을 주워들었다. 나도 저만치 나가 뒹구는 소꿉장난 꾸러미를 주워들었다.
“경아, 경아는 나로부터 놓여나야 돼. 경아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야. 나를 통해 아버지와 오빠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제 그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봐, 응? 용감히 혼자가 되는 거야 용감한 고아가 돼 봐. 경아라면 할 수 있어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 떳떳하고 용감한 고아로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봐. 사랑도 꿈도 다시 시작해 봐.” 그가 훌쩍 가 버렸다. 우리는 둘만 남겨졌다. 고아끼리인 셈인가. 고아들은 남을 사귀는 일에 서투르다. 내가 먼저 일어나고 우리는 같이 다방을 나왔지만 의식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그가 내 손을 아프게 쥐었다. 점점 저 아프게 쥐었다. 나는 비명을 참고, 그의 눈에 술기운이 가시고, 서서히 갈망이 타는 것을 대견하게 지켜보았다. 나에게 가장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소망을 품은 그가 처음으로 고맙게 생각되었다. “아직도 봉이 묽은 소년이 있는 집을 꿈꾸시나요?” “왜 나빠? 볼이 붉은 사내아이, 착한 아내, 찌개 끓는 화로, 커튼 늘어진 창, 그런 건 너무 평범해서 경아야 뭐 흥미 있을라고.” “흥미가 있어지는군요. 점점.” (…) 나는 푸념하듯 말하고 그에게 기대며 눈을 감았다. “막걸리 한 사발로 취하는 거 아냐? 가자고, 남들 모두 보잖아” “그래 가요” 나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 “다 왔어 들어갔가 가도 되겠지” “뭤 하러요?” “ 차 한 잔쯤 내접해 봐” 나는 태수를 내 방으로 청해 들였다. 알맞게 따습고 고즈넉하고 은밀한 내 처소로. 창과 덧문까지 첩첩이 닫고 나는 그에게 안겼다. 나는 그의 여자가 되었다.
방바닥에 떨어진 은행잎을 집어 코 끝에 대고는 그의 어깨 너머로 신문의 활자를 훑었다. 문화란에 ‘고(故) 옥희도 씨 유작전 S회관에서’란 기사가 실려 있었다. 좀 전에 둔탁한 아픔을 느낀 자리가 날카롭게 쑤셔 왔다. 오열이라든가 하다못해 신음이라든가, 그런 아픔을 나눌 엄살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온전한 나만의 깊은 슬픔. 나는 숨을 죽이고 지그시 아픔을 견디며, 또 하나의 아픈 날을 회상한다. 꼭 이만큼이나 아팠던 날을. 그것은 아마 나의 고가가 헐리던 날이었을 게다.
생각해 보면 고가의 해체는 행랑채에 구멍이 뚫린 날부터 이미 비롯된 것이었고 한 번 시작된 해체는 누구에 의해서도 끝막음을 보아야 할 것 아닌가. 다시는, 다시는 아침 햇살 속에 기왓골에 서리를 이고 서 있는 숙연한 고가를 볼 수 없다니.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의 육신이 해체되는 듯한 아픔을 꿋꿋이 견디었다. 실상 나는 고가의 해체에 곁들여 나 자신의 해체를 시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편이 쓸모없이 불편한 고가를 해체시켜 우리의 새 생활을 담을 새집을 설계하듯이, 나는 아직도 그의 아내로서 편치 못한 나를 해체시켜, 그의 아내로서 편한 나로 뜯어 맞추고 싶었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가뭄 속의 고목 …….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 나는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 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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