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대장장이 성자』, 권서각, 푸른사상, 2020

그루 터기 2022. 3. 28. 05:43

대장장이 성자, 권서각, 푸른사상, 2020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1 문학나눔 선정 도서이다. 1977년 시인으로 등단한 분의 글이라 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예상을 깨고, 참 쉽고도 재미있는 책이었다.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웃다가 마지막장을 넘기는 책. 금기어도 사투리을 섞어 자연스럽게 표현해 글의 흐름을 매끄럽게 하고, 재미를 더했다.

작가소개에 경북 순흥 출신이라고 하셨다. 나와 같은 변방 시 출신이고 사진으로 본 모습이 비슷한 또래라서 혹시 아는 분일까 안테나를 세우고 읽었다. 좀처럼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던 그때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동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것을 보면 동기생은 아닌 것 같은데 비슷한 연배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순흥청다리와 덕칠이, 그리고 흰장갑 같은 지금은 잊은 듯한 일들이 행복한 에피소드로 아스라니 떠오른다. 책 읽는 내내 낯설지 않고, 친근감이 묻어나는 글들이 고향의 향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우리가 잊고, 넘어가기 쉬운 소재를 어쩌면 이렇게 맛깔스런 단어와 함께 버무릴 수 있는지 부럽고 존경스럽다. 아쉬움에 책을 반납하기 전에 순식간에 한 번 더 읽었다. 아내도 같은 고향사람(아마도 작가님이 아내의 중학교 선배님일 것 같다. 아내가 다닌 중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다.)이라 읽으면서 행복해 한다.

서각(鼠角: 쥐뿔)이라는 필명이 처음에는 상당히 어색했는데 이름이 생긴 내용에 관한 글을 읽고는 파안했다. 참 멋진 이름이구나. 내가 지은 한얼(:편안한 한, :그루터기 얼)에 비하면 태생부터 재미가 있는 호임에 틀림이 없다. 글만큼이나 재미있는 필명에 웃음 한바탕 더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정치적 성향이 있는 글과 편향적인 글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글. 난 진보도 보수도 개인적인 성향이지 이런 책에서 노골적인 이야기하는 것이 별로다. 문학나눔 서적은 국민의 세금으로 선정되어 얼마간의 보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책들 중에는 이런 글이 실린 책들이 많아서 적잖이 실망을 하는 편이다. 선정 기준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책을 고르기 전에 내용을 전부 보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아쉬움이 크다. 앞쪽에 있는 많은 멋진 글들이 같이 묻혀버리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저자 소개

 

권서각

경북 순흥에서 태어났다. 본명 권석창. 회갑을 지나면서 쥐뿔도 아는 게 없다는 의미로 서각(鼠角)이란 이름을 아호 겸 필명으로 쓰고 있다. 1977조선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눈물반응』 『쥐뿔의 노래』 『노을의 시, 산문집으로 그르이 우에니껴, 학술서로 한국 근대시의 현실대응 양상 연구(박사 학위 논문) 등이 있다.

 

 

독서메모

 

올해는 송이 좀 땄수?” “, 가방을 보면 몰라? 태어나서 올해 가장 큰돈을 벌었어. 내 크게 한잔 살게.” 빛바랜 콧수염 사이로 흰 이를 드러내며 형은 밝게 웃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큰돈과 형의 큰돈은 단위가 다르다. 몇 십만 원도 형에게는 큰돈이다. 짐작건대 보통 사람들의 한 달 월급 정도 벌었으리라. 형은 돈이 없을 때는 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고 오직 돈이 있을 때만 돈이라는 단어를 쓴다.

 

젊어서 들어온 소백산에서 그의 청춘도 빛이 바래어 거의 할배가 되었다. 어느 날 무심히 텔레비전을 켜니 형이 화면에 나왔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리포터가 형의 집을 찾아 산중 생활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리포터가 송이를 따러 산에 오른 형을 따라 함께 산에 올랐다. 드론이 공중에서 아름다운 계곡을 조망한다. 장면이 바뀌어 산 중턱에 나란히 앉은 형과 리포터를 카메라가 잡는다. 나란히 앉아 쉬면서 리포터가 형에게 물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세요?” 형이 대답했다. , , 아무 생각이 없지 뭐.” 참으로 우문현답이다.

 

아이들은 늘 배가 고팠다. 그래서 서리라는 것을 자주 하였다. 서리는 아이들이 무리 지어 남의 과일이나 농작물을 모래 훔쳐서 먹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서리에는 닭서리, 콩서리, 밀서리, 참외서리 등이 있다. 지역말로 서리를 싸리라 하기도 했다. 요새 남의 농작물에 손을 대면 죄가 되지만 그때는 서리를 하다 들키면 농장 주인에게 호되게 꾸중을 듣는 것으로 사건이 무마되곤 했다. (닭서리, 밀서리, 콩서리 뿐 아니라. 김치서리, 고구마 서리, 무서리 등 배고픈 시절에는 뭐 든지 서리를 했었다.)

 

내 친구 위득이는 개로 인하여 좋은 승용차를 얻었고 나는 개로 인하여 복두장이 병을 얻었다. 내일은 개고기 집에 가서 소주 배불리 먹고 모두 잊을 생각이다.

 

윤 초시의 담뱃대가 대길이 머리에 딱 소리를 내었다. 틀릴 때마다 담뱃대로 대길이 머리통을 골프 치듯 했다. 또 한 구절 가르치고 묻고 모르면 때리고를 반복했다. 대길이 머리에서 혹부리가 나려고 했다. “됐니더, 고마하소. 논 갈게요.” 하는 수 없이 대길이는 논에 들어 쟁기를 잡았다. 윤 초시에 당한 것이 억울했다. 화가 나서 일을 하니 더 힘이 들었다. 오늘따라 수렁이 더 깊어 깊이 빠진 발을 빼내기 힘겨웠다. 거머리도 달라붙었다. 그런 마음도 몰라주고 소가 또 멈춰 섰다. “이랴! 가자! 이누무 소!” 소가 움직이지 않았고 오줌만 솰솰 갈겼다. 오늘따라 소까지 대길이 마음을 몰라주었다. 소도 심술을 부렸다. “대길아, 더 못 갈겠다. 이제부터 내가 쟁기 잡을 테니 니가 앞에서 끌어라!” 저도 나도 힘이 들기는 마찬가지인데 마냥 소에게 욕만 할 수 없었다. 대길이는 쟁기를 잡고 한참을 서 있더니 소에게 말했다. “이랴! 이누무 소, 고마 대학을 갈췠불라!”

갈췠불라가르칠까 보다의 변방 말이다. 소도 대길이가 대학배우다가 당하는 걸 보았기에 죽을힘을 다해 앞으로 나갔다. 중천의 해가 빙긋 웃고 있었다.

 

술잔을 마주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꼬치영감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우리도 이제 환갑을 넘은 나이니까 서로 별명을 부르지 말자는 것이다. 자기는 어릴 때부터 꼬치영감이라는 소리를 가장 듣기 싫어했다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어조는 간절했다. “, 인제부터 꼬치영감이라 하지 말그래이.” 나는 그의 갑자기 진지해진 태도가 재미있어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의 자지러지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래서 진지하게 대답했다. “ 그래, 알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꼬치영감아!” “……??”

 

눈 내리는 날이면 아직도 아이들 목소리가 들린다. 울면서 갔어요. 울면서 갔어요. 그리고 눈을 감으면 가끔 까만 코트를 입고 하얀 눈길을 울면서 걸어가는 그 애가 보인다.

 

당시 우리가 쓰는 말에 나이롱 양말에는 문수가 없다.’는 게 있었다. 그때는 나일론을 다들 나이롱이라 했다. 큰 발이든 작은 발이든 나일론 양말은 신축성이 있어서 모두에게 맞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외설적으로 쓰이던 말이었다. 나일론 양말은 버선이나 면양말에 비해 신축성이 뛰어나고 질긴 신소재로 만든 것이었다. 그날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삼등열차의자도 문수가 없었다. 자리가 생겼다. 나와 그녀는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나는 죽지 않고 아직 살아서 할배가 되었다. 살아오면서 그녀만큼 스며드는 여자도 만난 적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안톤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에게 스며들어 잘살고 있을 것이다. 삶의 어느 고비에서 가끔 파란 손가락이 떠오기도 했다. 파란 손가락은 치유되지 않는 늑막염처럼, 혹은 피카소의 청동 시대의 어느 그림처럼 떠올라 이따금 옆구리 한 곳을 결리게도 한다.

 

나는 거의 꼴지로 졸업했다.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고향집 골방에 틀어박혀 결코 밥이 될 수 없는 시를 썼다. 내 생에서 가장 많은 시를 쓴 1년이었다. 이듬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게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변방교육대학 시절의 절망과 방황의 흔적이 심사위원의 가슴에 감염되었을 것이다.

 

그녀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아줌마와 아저씨였다. 별 할 말이 없어서 탄지에서의 일을 이야기 했다. “그때 탄지에서 그림 그리는 네 뒷모습이 아름다웠지.” 그녀가 말했다. “ 나는 네 사색에 잠긴 모습이 좋았어. 신문에 실리는 글도 열심히 읽었어.” 내가 말했다. “진작 말하지!” 그녀도 나와 동시에 말했다. “진작 말하지!” 우리는 남의 일처럼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바쁘게 사느라고 뒤를 돌아볼 여아가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된 어느 날 문들 천방지축 실수만 했던 병아리 교사 시절이 떠올랐다. 아니 늘 그 시절이 그리웠지만 스스로 묻어두었는지도 모른다. 범죄심리학에서는 범인은 반드시 범죄현장을 다시 찾는다고 한다. 나는 가끔 차를 몰아 내가 있었던 초등학교를 몰래 찾았다. 그것이 다른 일과 더불어 나의 해야 할 목록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나는 이를 혼잣말로 성지순례라 명명했다.

 

나의 옷차림은 유행에 따라 바뀌기도 했지만 나의 장발은 유행과는 무관하였다. 수많은 관과 수모를 겪으면서 지켜온 장발인데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흑발이 백발이 된 것이다. 고난과 회한에 찬 세월을 견디어온 흔적이리라. 아니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노병의 상처뿐인 훈장이리라. 나의 백발이여, 참으로 고난의 겨운 날들이었다. 수고했다.

 

덕출이가 이 고장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지만 덕출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남아서 안개처럼 이 고장을 떠돌고 있다. 그리고 덕출이의 전설도 만들어지고 있다. 덕출(德出)은 그 이름과 같이 모자람으로 이 세상에 나와 힘겹게 사는 시민들게 덕을 베풀고 위안을 주었으니 명부허전이라. 이 세상에 그 이름이 헛되이 나는 법이 없음을 알겠다. (정말 오래간 만에 들어 보는 덕출이’. 덕출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구성하시다니. 비시시 웃음이 나오면서도 옛 추억이 되살아난다. 갑자기 단산의 안질 봉으이생각도 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친구들 모두 고향을 떠났다. 그러곤 돌아오지 않았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이 있다. 나는 굽은 나무였다. 학교를 마치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아직도 고향에 살고 있다. 순수한 촌놈이다. 가끔 고향을 찾은 친구들은 인사말로 고향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하지만, 실은 고향에 왔을 때 만나서 고향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뜻일 터이다. 맏아들이니 부모님 곁에 있는 것이 도리이기도 했지만 변변치 못해서 중뿔나게 출세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하겠다.

 

그가 제안했다 이제 우리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름을 부르지 말고 호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자기 호는 건곡이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건곡은 계곡이 말랐다는 뜻이니 차라리 폐경으로 하게.” 낄낄낄, 예끼 이사람! 나는 세울 건() 자 고을 곡()자 일세.” “알고 있어. 그래도 난 폐경이 좋아 얼마나 홀가분한가. 나는 폐경으로 부르겠네.”

 

우리 고장에서 처음으로 도자기 가마가 생기자 이른바 강호 뻐꾸기라 불리는 수염 기르고 모자 쓴 친구들이 동여의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강호 뻐꾸기라 함은 문학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예술 언저리에 서성대며 일정한 수입 없이 간간이 벌어서 근근이 사는 우리 친구들의 총칭이다. 그의 도자기는 인근에 사는 뻐꾸기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도자기를 가까이한다는 것은 고상한 취미이기도 하고 스스로의 미적 안목을 높이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도 강호 뻐꾸기가 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니 몸과 마음이 말이 아니었다. 머릿속에는 실타래가 엉킨 것 같고 모래가 서걱거리는 것 같았다. 김상배 시인이 쓴 <낮술>이라는 제목의 시가 생각났다.

이러면 / 안되는데

이것이 그 시의 전문이다. 신문에 시를 소개하는 연재물을 쓴 적이 있다. 시는 짧은데 해설은 몇 배 길게 ᄊᅠᆻ던 기억이 난다. 낮술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낮술의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이 밀려왔다.

 

불같이 화를 내다가 이내 잠든 조껄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하고 평화롭기 까지 했다. 그는 가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옷을 입고 있지만 옷을 벗은 것이니 다름이 없는 사람이다. 언젠가 언어 가운데 가장 순수한 언어는 감탄사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감탄사에는 복잡한 문법이 없다. 가식도 없고 기교도 없다. 남을 기만하는 사기꾼의 말은 기교적이며 화려하다. 감탄사에는 기교나 가식이 끼어들 틈이 없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 감탄사 하나가 객사의 방바닥에 떨어져 있구나.

 

이 지역에서는 수구 주류 정당에 속하는 사람이면 나무토막을 공천해도 당선된다는 말이 진리처럼 떠다니곤 했다. 귀농한 사람이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런 동류의식 때문이다. 도시에 살다가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을 짓고 낮에 개를 데리고 마을길을 다니는 풍경은 마을 사람들의 삶과는 다른 모습이다. 자기 들은 아침 일찍부터 들에 나가 뙤약볕에서 일하는데 개를 데리고 마을길을 산책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부아를 돋우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이미 우리가 남이가에서 제외된다. 마을 사람들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마을에서 살수가 없게 된다. 집을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이 없다. 큰돈을 들여 지은 집이 폐가가 되기 일쑤다.

 

영주역, 지금은 이전 되었지만 영주역은 객지 사람들이 많이 거쳐 가는 곳이었기에 이들을 상대로 하는 잡범들이 대거 서식하는 곳이었다. 밤에 영주역에 내리면 아줌마들이 따라오며 자고 가라고 성화다. 역 주변은 판잣집 같은 다닥다닥한 방들이 즐비했다. 봄을 파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영주역은 지나가는 여행객, 호객하는 뭉치(아줌마), 잡범들, 짐 날라주는 지게꾼 등으로 아름답지 못한 이름을 전국에 날렸다. 그런 도시이니 질서보다는 무질서가 승했다. 지금은 선비의 고장이라는 이름을 내세우지만 6,70년대의 영주는 그런 곳이었다. 그 시대에 주먹이 세다는 것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바였다. 서울에 김두한, 이정재, 스라소니가 있다면 이곳에는 흰장갑이 있었다. (전설의 흰장갑 이야기를 여기서 만나게 되었네요)

 

그녀가 아는 한국 음식의 맛은 음식 만드는 모든 과정에 있는데 그 과정 가운데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그녀의 믿음이다. 절대 국수를 미리 만들어 놓지 않는다. 손님의 주문을 받은 다음에야 홍두깨로 밀어 생면을 바로 삶아낸다. 겉절이도 금방 무쳐낸다. 김치는 사흘을 넘기지 않고 새로 담근다. 그래서 그녀의 칼국시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 맛이 변함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비법을 묻는다. “아줌마, 이 집은 맛의 비결이 머이껴?” 그때마다 그녀의 대답은 늘 같다. “머리가 돌이래서 그르이더,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니더.” () 티브이 카메라는 전국 소문난 맛 집을 찾아다니며 맛집 소개를 한다.() 그녀의 칼국시 집도 방송을 타게 되었다. 리포터가 촐싹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칼국수가 이렇게 맛있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비법이 무엇인지요?”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머리가 돌이래서 그르이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머리가 나빠서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니더.” 그녀의 한 마디에 무릎을 쳤다. 지금까지 맛 집 사람들이 레시피니 비법이니 하고 떠들던 모든 수다들을 한방에 잠재우는 멋진 대사라 여기며 빙그레 웃었다.

 

대개 직장 생활이 전부인 양 살아온 사람들은 퇴직 후 출근할 곳이 없는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어한다. 어떤 이는 전원주택을 짓고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동차를 운전해서 전국각지로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어떤 이는 문화교실 수강생이 되어 무언가를 배우기도 한다. 묻는 사람은 그도 그런 일 가운데 한 가지를 할 것이라는 대답을 예상하고 묻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나도 위에 설명한 것 중에 한 가지를 하고 지낸다.)

 

그녀도 그를 다정다감한 남자일 거라 오해했고 그도 그녀를 봄볕같이 다사로운 여자라 오해했다. 결혼 후 그 오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소되고 서로의 다름이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사랑에 눈이 먼 젊은 남녀는 그런 믿음이 영원하리라 믿는다. 그러나 같은 집에 살면서 서로의 비밀스러운 부분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결혼 생활은 서로에 대한 신비를 모두 걷어내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신비가 벗겨지면 둘 사이에는 결혼 관계라는 앙상한 관계만 겨울나무 가지처럼 남게 된다.

 

몇 년을 시달린 끝에 그가 발견한 지혜는 어린 시절 부친으로부터 들은 퇴계 선생의 경()이었다. 아내를 공경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도 얼마나 참을 수 없었으면 저토록 화를 내겠는가?어떻게 공경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모색했다. 공경한다는 것은 상대를 높이거나 자기는 낮추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기를 낮추는 쪽을 선택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선택해야 할 바로 그 경이 아닐까?)

 

차츰 나이가 들면서 친구들은 나를 쥐뿔 선생이라 불렀다. 나이가 더 들면서 후배들이 부르기에 민망하다며 서각(鼠角), 또는 서각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이 늘어났다. 나는 스스로 민주적 인간이라고 자부한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부르면 그걸 따르는 것이 순리라 여겼다. 변방에서는 본명보다 서각이 더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 이름은 낮게 지을수록 좋다. (! 서각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이렇게 생긴 것이었네요. 정말 특이합니다. 작가님께서는 그 특이함을 이렇게 살리셨구요.)

 

나는 형에게서 천의무봉(天衣無縫 :선녀의 옷은 원단에 바느질 자국조차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는 의미에서, 일부러 꾸민 데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서 완전함을 이르는 말. 태평광기의 곽한(郭翰)의 이야기에 나오는 말로, 주로 시가(詩歌)나 문장에 대하여 이르는 말이다.)을 읽었다. 그와 대화하다가 그의 말에 사족을 달아 공감을 표할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느마, 이게 머 쪼매 아네.” 자기 이외에는 모두 중생으로 보인다는 뜻이리라.

 

스마트폰 신호가 왔다. 해봉 형이었다. 안부도 없이 거두절미하고 대뜸 질문부터 들어왔다. “어이, 서각, 아무것도 모르는 놈을 쥐뿔이라 한다는데 개조또 모르는 놈을 뭐라 하면 되지?” “그거야 형 맘대로 하면 되니더.”

 

장례 후에 형의 방을 정리하던 최윤환이 10억이 든 보통예금 통장을 찾았습니다. 통장을 들고 농협에 가서 왜 이자도 없는 보통예금으로 했느냐고 따지자, 농협 직원이 형이 그리 하라고 해서 그리했다고 했습니다. 이자로 돈을 늘리는 것이 죄악이라고 여긴 형의 뜻을 알고 다시 숙연해졌습니다.

 

술을 부르는 안주가 있듯이 독후감을 부르는 책이 있다. 이 책의 무엇이 나를 독후감의 수고까지 치르게 하였을까? 중간 중간 소나무 옹이처럼 박혀 있는 유머와 글 전체에서 풍기는 은근한 해학은 읽는 재미를 증폭시킨다. 또한 저자 특유의 문체라고 할까. 이리저리 굽어지는 은유적 표현과 시공간의 원근을 아우르는 타임머신적 비유법은 문장의 이해도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4표지에 있는 책의 소개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