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이 저 혼자 (시집)』, 홍미자, 파란, 2022
처음으로 시집을 빌려왔다. 쉽지 않다. 문학나눔에 선정된 책이란다.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래도 쉽지 않다.
저자 소개
홍미자.
1960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2018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혼잣말이 저 혼자〉를 썼다.
독서 메모
옆으로 가는 사람들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수십 미터 암흑 속
바퀴가 길을 내고 있다
단단한 바닥을 부딪는 신음 소리
찢겨 나가는 바람의 외침
못 들은 척, 마주 앉은 얼굴들
마주 보고 앉기
지하철 좌석의 이 어색한 배치는
어쩌면 방관의 자세
어둠을 가르는 일은 바퀴의 몫으로 두고
그 고통이 남긴 궤적을 따라
사람들, 비켜 앉은 채 옆으로 간다
그들의 최선은
어둠과 정면으로 서지 않는 것
삶의 긴 터널을 지날 때처럼
그저 시간을 견디는 것
해서 함부로 고개 돌리지 않는다
가끔 한 줄기 비명 같은 섬광이 일고
구부러진 길에서 커다랗게 휘청거릴 때조차
마침내 따뜻한 어느 플랫폼에 닿을 때까지
그렇게 불안을 통과하고 있다
(중략)
자판기 밀크 ㄱ커피 한 잔이 채워지기도 전에
기차는 말없이 들어서고 있었지
하청 받은 시간은 빽빽했으므로
겹겹이 어깨 너머로 출입문이 닫히듯
그는 어디로도 떠날 수 없었지
시차를 거슬러 그녀가 날아오는 동안
골목마다 굶주린 저녁이 몰려왔지.
<별당방 1호전 中에서>
분리수거하는 저녁
빈 병들 까닭 없이 부딪힌다. 언성을 높이던 간밤의 맥주캔 하나 찌그러져 나뒹굴고 있다
뒤엉킨 기억들 플라스틱과 페트의 모호한 경계 짚어 낼 수 없는 통점들 사이 붉은 얼굴이 고개를 내민다.
읽히지 않는 책들과 햇빛을 못 본 옷가지들, 빛바랜 어느 오후엔 그렇게 덤덤해지기도 할까
버려진 일주일이 부스럭대며 베란다에 쌓여 있다 자신을 발설하고 수상한 냄새를 흘리며
돌들의 서사
길을 걸을 때도 어딘가 뿌리박을 때도 그늘로 치우치는 습관은 지병입니다.
이석증이군요 탈주한 돌들에 대한 서사를 낱낱이 밝힐 순 없어요. 제자리로 돌아오길 기다릴 밖에요.
봄날 같은 현기증을 앓습니다. 담장을 끼고 걸으라는 처방을 따라가면 점점 중심에서 멀어집니다.
햇살 가득한 영토 안에서 출렁이는 나무들 뿌리 깊은 종족이므로 그들은 기울어진 벌판 한가운데서도 정정합니다.
뿌리내리지 못해 쓸려 온 나뭇잎 귀들이 발에 밟힙니다. 바스라져 바람에 흩어지는 흙빛 파편들
사라지는 이름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돌들은 여전히 변방을 헤매고 있습니다.
적과
열매의 옳은 자세는 매달리기다
끌려가지 않으려 꽉 움켜쥔
철봉 오래 매달리기는 가혹한 수업이었다.
볼이 터져 나갈 듯 태양을 견뎌야 하는
가장 먼저 떨어져 나온 그늘에게는
풀썩 주저앉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줄기들의 길은 언제나 길고 가늘어서
쪼르르 매달리는 눈빛들이 비굴해졌다
차갑게 훑어보는 손가락들에게
비굴은 될성부른 떡잎의 태도였다
바닥의 꺼지지 않는 식탐과
절망 쪽으로 휘어지는 줄기의 무게
두려움이 탐스럽게 자라나겠지
눈물 같은 붉은 과즙을 가득 물고
삐죽 돋아나는 의심을 솎아 낼 때마다
열매는 달콤해졌다
창밖에 나무들이 턱턱 베어졌어요.
다시 봄이 왔냐고 흐린 눈으로 당신이 물었죠 뿌리 뽑힌 채 땅속에 묻힌 겨울 무처럼 침대 안에서 시들어 가는 가늘고 긴 손가락들.
창가 화분이 붉은 꽃을 피워 올렸죠. 가지런히 빗질해야 할 기억은 자라지 않아 마른풀 냄새 날리는 머리카락들.
봄은 오지 않을 거라고, 울렁이는 말을 삼켰죠.
꽃이 피었다는 말은 쓸쓸합니다. 지나온 모든 길이 지워지는 순간이므로 흰 트럭에 실려 떠나는 나무토막들은 어느 야산에 버려져 풀풀 삭아 가겠죠.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까요, 다시 오는 건 없다고 천 개의 봄을 우린 지나쳐 갈 뿐이라고 유리의 벽을 뚫고 온 햇살이 당신을 훑고 지나갑니다. 무언가를 살피려는 듯 천천히, 날카롭게 < 나를 스켄하다.>
섬이 아니었으나 섬이었다. 그들과 멀어지는 건 지각의 흐름 때문일 거야. 떠나온 육지를 향한 바다사자의 울음이 건너간 사이렌 소리에 끊겨 나갔다.
마을 입구에 엎드린 구멍가게 평상에서 구부정 일어선 할머니 하나 서둘러 어두워진 벽화 안으로 들어간다. <갈라파고스>
밤이 되면 의자들의 행방이 묘연해져요. 암전된 공원을 배회하든 어느 현관 밖에 기대어 서든 세상의 모든 그림자들이 활보하는 시간. 의자도 어딘가에서 어둠에 골몰할 거예요.<빈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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