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도배사 이야기』, 배윤슬, 궁리, 2021
스카이 출신 20대 여성의 도배사 이야기. 당연히 궁금증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TV에서 먼저 얼굴은 본 다음이니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나도 회사에 근무하면서 건설현장은 아니지만 기계설비 현장에서 도배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 험한 일들을 직접하기도 했었다. 내가 직접 작업을 한 경우도 많았지만 일용직들을 불러서 작업을 시키는 일도 많이 했었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 공감이 가는 부분이 참 많았다.
특히 내용 중에 지저분한 작업복을 입고 회식를 하러 갔었을 때 주인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도배사가 하는 일보다 몇 배나 더 지저분한 일이라, 방진복을 입고 작업을 해도 5분도 되지 않아 속옷까지 새카맣게 되는 험한 일도 있었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도 항상 눈치가 보이는 것은 물론이며, 한 번은 검게 묻은 신발을 싣고 모텔에 갔다가 바닥에 깔린 카페트 세탁비를 어마어마하게 물어준 적도 있었다.
나는 도배사의 작업 환경은 자세히 모르지만 여러 번의 이사 경험으로 도배를 직접 해 본적이 꽤 여러번 있다. 우리 세대의 대부분은 그런 경험이 있을 것 같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라서 그런지 도배 한 번 하고 나면 며칠을 끙끙 앓을 정도로 힘이 들었던 기억뿐이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긴 해도 체력이 필요한 작업이라 쉽지 않았을 필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또 스카이 출신의 여성 도배사라는 입방아가 결코 달갑지 않았을 분위기를 느낀다. 바로 우리 식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 나와서 왜 이러고 있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제목의 잡지기사 주인공이기도 한 파티플레너 김정연이가 그 주인공이다. 내가 옆에서 큰애의 성공을 지켜봤듯이 작가님의 성공에 조금의 의심없이 응원을 하며, 이제 개인 사업을 시작(TV에서 본 내용) 하셨으니 더 큰 성공을 기원한다.
저자 소개
배윤슬
아직 초보와 숙련 사이 어딘가에 있지만, 기술자를 향해 오늘도 열심히 달리고 있는 청년 도배사. 연세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후 노인복지관에 취업했지만 2년 만에 그만두고 도배라는 완전히 새로운 업(業)을 시작했다. 도배를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또 다른 일에 도전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새로운 현장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도배하는 게 좋아 저의 경험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다. 서울에서 시작해 인천, 안산, 남양주, 파주, 천안 등 도배 현장이 조금씩 넓어지는 중이다. 언젠가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제가 도배한 집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독서 메모
회사를 다닐 때부터 회사가 직원에게 왜 충성심을 요구하는지 의문을 품고는 했다. 노동을 대가로 급여를 받는 '계약 관계'일 뿐, 그 계약 내용에 '충성심'은 없는데 말이다. 받은 만큼 일하거나 혹은 일한 만큼 받거나, 딱 그 정도라고 생각하는 '요즘 애들'이다.
유독 '나 때는 말이야'를 많이 듣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는 뜻이라 생각한다.
당연히 선배님들의 경험과 노하우를 존중하고 또 존경한다. 그분들의 힘들었던 그 경험들을 바탕으로 보다 효율적 이고 효과적인, 편한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분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너희는 지금 운 좋게 아주 편하게 일하는 거야'가 아니라 '우리가 노력한 덕에 나아진 거야. 우리가 효율적인 방법들을 고안해온 거시니 너희도 후배들을 위해 노력해'가 서로를 존중하는 생각일 것이다.
성실하고 건실한 청년들은 어떤 주관과 목표를 가졌기에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기피하는 직업인 건설 현장 노동자가 된 것일까? 그들은 왜 다른 직업을 택하지 않았을까? 내 경험과 건설 현장에서 만난 청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에 의하면 직장생활과는 다르게 내가 가진 기술로 은퇴 없이 평생 일할 수 있다는 것, 상사 혹은 동료와의 갈등이 비교적 없이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노력하고 고생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기술직'이란 말 그대로 몸으로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한 직업이기에 기술만 완전하게 연마했다면 여타 직업보다 안정적이라 할 수 있다. 긴 시간 익혀왔기 때문에 하루 이틀의 인수인계만으로 다른 사람이 내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
머리를 쓰는 일은 우대받고 몸을 쓰는 일은 그렇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젊었을 때부터 몸을 쓰면 더더욱 곱지 않는 시선을 받는다.
그는 스스로 실력이 뒤처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에 누구보다 빨리 출근하여 미리 밑 작업을 해놓고 해가 진 이후에도 한참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한다. 뒤늦게 시작한 사람들보다 실력이 뒤처지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데, 그런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다른 곳에서 채우려 하는 성실한 태도가 인상 깊었다. 실력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자만했던 나는 많이 반성했다.
‘지난달보다 얼마를 더 버는지’가 아니라. ‘어제보다 얼마나 더 했는지, 한 폭이라도 더 많이 붙였는지’를 생각하며 과거의 나와 경쟁했다. 그러다보니 일단은 생각보다 빠르게 올라갔다. 일당에 집중할 때는 일당이 오르지 않았지만, 실력에 집중하니 일당이 올랐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지만 오로지 당장 눈앞의 한두 푼에만 집중하고 멀리보지 못하면 결국에는 성장하지도 성공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도배를 하기 위해 현장에 가면 조경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제대로 된 길 없이 전부 흙 밭인 경우가 많다. 혹여 비라도 오면 온통 진흙탕이 되어 발이 푹푹 빠지기 일쑤이고, 길이 없으니 내가 가야 할 곳의 방향만 잡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미 나 있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에만 익숙했었는데, 길이 없거나 매번 길이 바뀌는 곳을 다녀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진흙길을 갈 때에는 누군가 이미 지나갔던 발자국을 따라 밟았다가 더 깊이 빠지기도 하고,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을 밟았다가 앞으로 미끄러지기도 한다. 정답은 없다. 누군가 밟고 지나갔다고 해서 단단한 흙인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이 안전한 것도 아니다. 밟아보아야만 알 수 있다.
가끔은 ‘내가 선택한 새로운 길도 그럴까?’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은 평탄하고 이미 잘 닦여 있는 다른 길이 많은데 굳이 스스로 진흙 밭에 뛰어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춥고 힘들고 외롭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었고 내가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단단할지 미끄러울지 알 수도 없었다. 비가 와서 진흙길 같이 힘든 시기도 있었고 멋진 조경은커녕, 길이 만들어지기는 할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길이 조금씩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도배는 버티기만 하면 누구나 기술자가 된다는 말은 곧 버티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라는 것을 일을 시작한 후에 바로 알게 되었다.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의심하던 나는 아직 기술자는 아니지만 2년 가까이 버텨내고 있다. 처음 도배를 시작할 때부터 이상만 좋지 않았고 현실과 타협해 단기적으로 목표를 잡아가며 버텼다. 나는 처음 도배에 말을 들이면서 기술자가 되겠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딱 일주일 만 해보자. 딱 한 달까지만 채워보자 그렇게 3개 월, 6개월씩 늘려가며 버텼다. 장기적인 목표도 당연히 가지고 있었지만 조급해하거나 욕심내지 않았다. 지금은 조 금씩 현실과 이상의 차이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즐겁게 일하고 있다.
내가 도배 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가끔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도 도배나 해볼까?'라는 말을 듣는다. 당연히 누구나 큰 제약 없이, 초기 자본 없이도 시작해볼 수 있고 버텨낸다면 대부분 기술자에 도달할 수 있는 일인 것은 맞다. … 그러나 그 이상적인 삶에 다다르기까지 포기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고 그것을 힘들게 이겨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직업을 쉽게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공들여 설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곳을 돌아다닌 시기였고 처음으로 일 때문에 숙소 생활까지 해봤다. 동료에게서 과거 제주도에서 일하던 이야기도 들었다. 출퇴근 시간과 교통편은 직장인의 삶의 질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고 회사가 고정된 사람은 출퇴근 거리를 좁히기 위해 이사까지 하는데 늘 변화하는 환경에서 일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이렇게 화장실 이용이 불편하기 때문에 아주 많은 노동자들은 세대 내부 바닥에 아무렇게나 배변 활동을 한다. 내가 도배를 시작한 후 알게 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이기도 하다. 자신이 살게 될 집이 누군가의 배설물로 더러워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입주자들. 모두에게 불편한 이 문제가 언제가 해결되는 날이 올까.
도배를 시작한 후로 내게 ‘몸을 많이 쓰는 직업이니까 근육도 많이 생기고 튼튼해지겠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머리 쓰는 직업이라고 머리가 좋아지지 않듯 몸 쓰는 직업이라 해서 몸이 더 좋아지지는 않는다.
사람의 일을 기계가 대신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직접 몸을 쓰는 직업이라니 점점 도태되어 가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주변의 시선들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기계로 대체 할 수 없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기계가 하지 못하는 일 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 몸만 있다면 기술은 사라지지 않으며 어디에 가서든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 속 데이터나 기계의 계산 능력 등에 의존하지 않고 내 몸만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점이 꽤나 든든하다.
몸을 아끼기 위한 방법들을 배워야만 오래도록 일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삶의 변화를 통하여 몸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아프지 않은 것이 감사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계속 도배사로 살아간다면 몸은 내 영원한 재산이자 무기이겠지만 반면 한순간에 일을 그만두게 만들 수 있는 것 역시 나의 몸이기에 더 많이 돌보고 아끼려 한다.
도배사 들에게도 봄과 가을은 일하기에 최적화된 좋은 계절이다. 적당히 가벼운 옷차림으로 작업하기 좋은 신선한 날 씨. 도배사들이 가장 열심히 열정적으로 일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해 길이도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기에 적당하다. 그러나 모두에게 그러하듯 봄과 가을은 너무 짧게 스쳐 지나간다. 새벽부터 일을 시작하는 도배사 들에게는 시원하던 가을 아침 공기가 너무 일찍 차갑게 바뀌어 어느새 몸을 으스스 떨게 되며, 봄이 와도 겨울의 한기가 채가 시지 않다가 금세 땀을 뻘뻘 흘리는 여름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좋은 것은 항상 나이기에 늘 아쉬움이 남는다.
주 5일 직장을 다닐 때는 주 4일제를 혼자 주장하고 다녔는데, 막상 지금은 주 5일제가 부럽다. 쉴 수 있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그만큼 쉼에 대한 애착이 더 크다.
편견과 선입견에서 누구도 완전하게 자유로워질 수는 없다. 또한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복합적인 특성으로 이루어진 한 사람을 단면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나는 월급을 모아 해외여행 가는 것을 좋아하고 쉬는 날에는 호캉스를 즐기기도 하며 반지 모으는 것에 관심이 많다. 좋아하는 음식은 피 자이고 후식으로 아메리카노와 조각케이크를 즐겨 먹곤 한다. 생각이 많을 때는 글을 쓰며 머리를 식히고 현장 곳곳 의 사진을 찍어 SNS 계정에 올리는 것은 또 다른 취미이다. '노가다'라고 했을 때 흔히 떠오르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는 것은 나의 한 가지 모습일 뿐이지 내 전부가 아니다.
휴식 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시간이라는 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내 가 만들어야 했다. 전보다 허비하는 시간을 줄여 많은 내 시간을 찾아 확보해야 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 새로운 습관 들을 만들어갔다. 퇴근 후 주어지는 짧은 휴식 시간을 최대한으로 누리기 위해 빠르게 모든 정리와 집안일을 끝내는 습관이라든지, 식물에게 물을 준다거나 작은 소품으로 집을 꾸미는 등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하루 한 번 스스로에게 보상을 하는 등의 노력들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거나 불편한 상태로 위 휴식 을 취하는 등 시간을 아깝게 사용하게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밀도 있고 충만하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들을 터득 하고 있으며, 일 때문에 내 삶이 사라지지 않도록 스스로 많은 규칙들을 세워나가고 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시간이 확연하게 줄면서 연쇄적으로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많이 포기해야 했다. 불필요한 관계가 자연스레 정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리적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없기도 하지만, 내가 회사를 그 만두고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더 많은 관계가 정리되었다. 내가 하는 일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 도배를 하는지 페인트칠을 하는지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 그 일을 왜 하냐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 주변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고 나는 이를 통해 정말 내 삶을 온전히 인정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누 구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내면을 더 많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시간, 관계 등을 포기하면서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자주 물었다.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내 시간을 더 많이 확보했다면 좋았을까?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과연 얼마를 벌기 위해 얼마만큼의 노력을 해야 행복할지 고민한다. 끝도 없이 일하고 끝도 없이 많이 벌면 나는 행복할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내가 정말 삶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고 있다.
과거의 나는 항상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내 위지를 확인하고는 했다. 학창 시절에는 타인보다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하 여 끝도 없이 노력했고, 성적과 대학 이름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난 후에는 평균치만 적당히 유지하려 했다. 올라가기 위해 노력하던 때이건 혹은 평균치에 머무르려 하던 때이건 비교 기준은 항상 ''이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들이나 쏟아 붓는 노력의 정도가 모두 다르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내가 비교하고 싶은 것만 보았다.
지금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성과평가 기준이 명확한 일을 하고 있지만 다른 동료와 비교하려 하지 않는다. 타인과의 비교는 결국 대상에 따라 상대적이기에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와 비교하느냐에 따라 내 위치나 실력이 달라질 바에야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기준과 목표를 세워 실천하며, 과거의 나와 비교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지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세운 실현 가능한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가. 과거의 나보다 현재 더 노력하고 있는가. 과거의 나보다 발전하였는가. 타인이 아닌 나 자신과 비교하고 평가하면 지금 당장은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이전의 나보다 발전해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어진 것. 이미 정해진 것 만 바라보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내가 가진 것 안에서 성장하고 발전하지 않는다면 멈춰버리는 것은 결국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도배를 하며 알게 되었다.
내가 세운 실현 가능한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가, 과거의 나보다 현재 더 노력하고 있는가, 과거의 나보다 더 발전하고 있는가. 타인이 아닌 나 자신과 비교하고 평가하면 지금 당장은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이전의 나보다 발전해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주어진 것, 이미 정해진 것만 바라보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내가 가진 것 안에서 성장하고 발전하지 않는다면 멈춰버리는 것은 결국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도배하며 알게 되었다.
처음 현장에 왔을 때 막내가 커피도 잘 타지 않는다며 사수에게 한 시간 넘는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남자 동료에게는 아무도 커피를 타라고 시키지 않는데 왜 나한테만 커피를 타라고 하느냐 반문하자 돌아온 답은 그 친구는 힘이 세서 팀에 기여하는 바가 많으니 굳이 커피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차이도 싫었던 나는 커피를 타더라도 쓰레기를 버리고 짐 옮기는 일을 함께 한다. 이렇게 작은 행동이라도 하다 보니 적어도 우리 팀 내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일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다. 예전에는 내게 ‘너는 커피나 타고 있어’라던 팀원이 이제는 ‘그래 여자라고 짐 못 옮기는 것도 아니지. 너도 같이 옮기고 와’라며 생각과 태도가 조금이나마 변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의 크기는 다르지만 여성이 할 일과 남성이 할 일이 다르다고 인지하지는 않는 것이다.
기존의 세대, 기존의 노동자들은 이런 변화가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변화가 더 싫고 불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전반적인 사회의 흐름보다 조금 느리게 변화해가는 현장이고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을 항상 강조하는 상사 밑에서 일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고집을 꺾지 않는다. 내가 현재 일하고 있는 곳이고 내가 앞으로도 일할 곳이라면 조금의 변화를 위해서라도 노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비단 내가 일하기 편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일이 사회적으로 가끔 좋지 않게 비춰지는 이유는 업무 자체의 험난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부 노동자들이 보이는 태도가 사회적으로 도태되거나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작지만 꾸준히 노력하려 한다. 이런 작은 노력으로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인식은 바꾸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성평등, 건설 현장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은 아직은 희미해 보이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씩 그 노력을 이어 가보려 한다.
내가 현재 도배를 하며 가장 기쁨을 느끼는 부분은 내가 하는 일이 아주 ‘밀도 있다’는 것이다. 도배를 하며 보내는 시간이 아주 빽빽하고 알차다는 의미이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책상 앞에 앉아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일을 하는 것에 회의감을 많이 느끼고는 했다. 내가 하는 행동들, 내가 작성하는 보고서, 내가 만드는 프로그램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하나 진행해도 그 프로그램 자체를 구상하고 만들어가는 시간보다 물품을 하나 사기 위해 여러 업체들을 돌아다니며 견적서를 받는 시간이 더 길었고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들이 허무하고 아깝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도배를 하면서는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모든 행동은 결국 도배를 완성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니 말이다.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일의 효율과 작업의 완성을 위한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들을 최대한 덜어내기 위해 항상 고민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현재 내가 도배를 하며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이다.
또한 모든 직업에는, 모든 삶에는 춥고 시린 시간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내가 겪는 어려움들이 '도배'를 해서 생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다른 일을 했으면 그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나는 내가 견딜 수 있는 어려움의 범위 내에서 이 직업을 택했으니 분명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으며.
한국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도배는 과거 궁이나 사원에서 사용되던 권위를 상징 하는 치장이었다고 한다.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비단으로 담벼락을 바르던 것이 도배의 시원이라고 한다. 이후 종이 공급이 원활해지면서 점차 도배가 일반화되고 다양화된 것이다. 역사에서 알 수 있듯 한국에서 도배는 귀족들의 고급 인테리어에서 시작하였고 이후에는 보편화되어 한국의 기본적 인 실내 인테리어로 자리 잡고 있다.
도배를 시작한 이후 관계 속에서 느낀 점이 하나있다면 가장 큰 지지는 누군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타인의 삶을 바라볼 때 내가 가진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버려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쉽지 않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네가 가진 능력이 아깝다, 아쉽다', '네가 그런 일을 왜 하니?' 와 같은 말들은 마치 겉으로는 나를 생각해주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내가 가진 스펙, 능력과 내 직업에 대한 일종의 '평가'가 반영 되어 있다. 그런 말들 사이에서 아무런 평가 없이 '그렇구나, 너의 선택을 응원해'라고 하며 꾸준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온전한 지지와 응원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2년이 되어가는 지금 '따님 아직도 도배하세요?'라고 묻는 지인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들에게 '정말 재밌게 하더라고요'라는 답을 들려주는 부모님에게 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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