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몫(단편소설 +일러스트)』, 최은영, 손은경, 미메시스, 2020

그루 터기 2022. 4. 10. 04:58

(단편소설 +일러스트), 최은영, 손은경, 미메시스, 2020

 

모처럼 단편집을 빌려왔다. 아주 짧고 얇은 책. 1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읽고 쓰는 것까지 다 끝났다. 요즈음 이슈가 된 젠더 갈등과 오버랩되어 그때의 여성운동에 대한 무지가 머릿속에 머무른다.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생각한다. ‘글이 라는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절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 쓰는게 더 숭고한 일인가, 라고 말하는 내용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작가소개

최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3년 중편소설 쇼코의 미소[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소설집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이 있다. 허균문학작가상, 김준성문학상, 이해조소설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5, 8, 1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손은경(그림)

순수 미술을 전공했고 현재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이다. 그리는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애정이 있는 것들을 많이 그리고 있다. 책과 영화 포스터 등에 그림을 그리며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다.

 

 

독서 메모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 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서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화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당신은 아직도 그날 밤을 기억한다. 희영이 써온 긴 글을 처음으로 읽고 들었던 순간의 충격을. 그곳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차갑게 언 발의 감각을 느끼며, 그녀의 글을 읽고 있던 스물에서 스물하나가 되어 가던 당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깔끔한 옷차림에 좋은 구두를 신고, 옅은 화장을 한 얼굴의 희영. 가까이 다가가면 좋은 향기가 나던 희영의 모습을 당신르 그려 볼 수 있다. 다들 담배를 피우는 회의 시간에 가끔 기침을 하던 비흡연자 그녀의 얼굴을. 그녀는 당신과 편집부 사람들에게 온전히 섞여 들지 못했다.

 

당신은 지나가는 말로라도 희영에게 칭찬을 한 적이 없었다. 희영이 지닌 통찰력, 글쓰기 능력, 절제력을 지니고 자기 삶을 운영하는 능력에 대해서. 희영이 얼마나 드문 사람인지, 어떤 의미에서 강한 사람인지 이야기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었는데도. 당신에게 그럴 주제가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당신의 초라함이 더 분명해지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돌이켜보니, 희영은 언제나 당신의 인정을 바랐다. 같은 나이의 친구, 처음 글쓰기를 같이 시작한 친구의 인정을 바랐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는 존속에 대한 폭행죄는 있었으나 비속 및 아내에 대한 폭행에 관한 처벌법을 없었다. 희영은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운동에 대한 글 하나, 쉼터 활동가들 인터뷰 하나, 아내 폭력이 한국 사회에서 은폐되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글을 하나 쓰고자 한다고 했다. 너랑 같이 취재 다니고 자료도 수지하고, 의논도 했으면 좋겠어. 너도 뜻이 있다면

 

같이 공부하고 준비했지만, 당신 역시 오래도록 남자들의 시선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희영의 글을 읽으며 깨달았다. 이사를 하다 실수로 그 글이 들어 있던 교지를 잃어버리기 전까지, 당신은 자주 그 글을 읽곤 했다. 글쓰기가 막히고, 질리고, 어떤 의미도 없다고 느껴질 때 희영의 글을 읽으면 환기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당신은 희영의 글에서 힘을 받았다.

 

<그는 우리 조국의 모습입니다! 조국의 자궁에는 미국의 문화 콜라 병이 깊숙이 꽂혔고 조국의 머리는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있으며 조국의 온 산천은 이러한 모든 것을 감추려는 듯 희뿌연 세제가 뿌려져 있습니다.>

 

희영은 차분한 표정으로 정윤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정윤의 말에 어떤 반박을 할지 궁금했지만 희영은 알겠다는 대답만 하고 말을 잇지 않았다. 그다음 회의 자리에서 희영은 처음으로, 자기 손으로 자신이 쓰고자 했던 주제를 폐기했다.

 

당신은 희영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네가 글 쓰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희영은 웃으려다 실패한 표정으로 당신을 봤다. 네 재능을 살리는 쪽으로 사회 운동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제 잘 모르겠어……. 희영이 거기까지 말하고 안경을 고쳐 썼다.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 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내게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희영의 바람대로 당신은 희영의 장례를 치르고 사람들에게 메일을 썼다. 메일을 보낸 다섯 명 중에는 정윤도 있었다. 정윤 언니에게 전해 줘, 희영은 당신에게 보내는 메일에 그렇게 썼다. <정윤 언니, 내가 언니에게 관대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해요. 그렇게 사랑하고 싶었으면서 사랑하는 방법을 모랐던 거, 편지들에 답하지 않았던 거 미안해. 아주 오래 보고 싶었어요. 잘 지내요.>

 

오월의 정오가 지나가고 있었다. 당신은 정윤의 흔들리는 어깨를 한 손으로 잡고 그녀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무엇이 지나가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당신의 품에 기댈 수 있도록, 당신은 정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떤 장면이 가장 마음에 남는가?

해진이가 희영이의 집에 찾아간 장면, 너는 계속 글을 썼어야 했다고 말하는 해진에게 글쓰기가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고 묻는 희영의 모습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