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이 그랬어(소설)』, 박서련, 자음과 모음, 2021
오늘 빌려온 두 번째 소설책, 오로지 에세이 위주로 책을 빌리는 편인데, 오늘은 단편 소설집을 두 권이나 빌렸다. 젊은 작가의 소설이 나의 젊은 날을 돌이켜 보게 한다.
저자 소개
박서련
철원에서 태어났다.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을 냈다.
‘암흑의 한국문학 카운슬’의 일원. ‘문학 플랫폼 던전’(www.d5nz5n.com)의 운영진.
독서 메모
나 지금 서울이야
남겨두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자기 연민이고 고쳐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자기혐오. 어느 쪽도 공정하지는 않다.
왜 그렇게 썼을까? 좀 까져 보여야 쿨한 것 같아서? 정말 까져 보이고 싶었다면 열여덟 살에 했던 첫 섹스에 대해서 썼어야지. 어차피 소설이라 아무도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실제로 겪은 일에 대해 쓸 거였다면 첫 섹스를 오빠가 아니라 언니와 했다는 이야기도 했어야지. 예에 대해 쓰려는 마음을 먹었다면 철저하게 정직해졌어야지.
예라는 글자는 예의 이름 끝에 들어갔다. 내 이름 앞 글자인 서 자와 같은 자였다. 미리 예豫, 펼칠 서豫, 똑같은 글자가 내 이름에서는 서로, 그 애의 이름에서는 예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신기하게 여겼다.
오랜 시간이 지나 드디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는 구겨지지 않았다. 대신 사라졌다. 오로지 나의 세계에서만.
예라는 글자는 예의 이름 끝에 들어갔다. 내 이름 앞 글자인 서 자와 같은 자였다. 미리 예豫, 펼칠 서豫. 똑같은 글자가 내 이름에서는 서로, 그 애의 이름에서는 예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신기하게 여겼다.
대개 조리에 닿지 않고 문법도 엉망이던 예의 잠든 문장들을 거의 모두 기억했다.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순간에 사람은 가장 사랑스럽다는 것을 나는 그 애에게서 배웠다.
나 지금 서울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서울은 나한테 도시가 아니고 상태인 것 같아. 겨울이 와도 나는 서울. 겨울이 가도 나는 서울. 여름도 가을도 봄도 없이 나는 서울이야. 그러다 예는 문득 나를 보며 물었다. 너도 서울이야? 나는 홀린 사람처럼 예를 쳐다보았지만 정작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예는 아주 슬퍼 보였다. 다른 사람이 아파하는 표정과 슬퍼하는 표정을 잘 구분할 줄 몰랐던 그때의 내게도 그건 슬픈 얼굴이었다.
겨울 동안 예의 그 감기는 낫지 않았고, 나에게 옮기지도 않았으며, 나는 그 감기가 다 낫기 전에 도망치듯 기숙사를 나왔다. 돌아온 봄에 우리가 살던 구 기숙사 건물이 헐렸다. 알고 있어도 예방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마침내 나는 예를 만난다. 이루어지기를 너무나 바란 나머지 소설로까지 쓴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는 고백한다. 내가 얼마나 멀리 와버렸는지, 얼마나 엉망인지를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나는 예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 지금 서울이냐고, 여전히 서울이냐고 물어야 한다. 나 아직 여기 있다고.
추위가 아무리 심해져도 점퍼를 한 번도 입지 않고 겨울을 났다. 겨우내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기 대무에 사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 무렵부터의 내 생활은 철저하게 화학적인 것이었다. 몸이 더 이상 잠을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자고, 의식이 명료해질 때까지 꼼짝 않고 누워 있는다.
삼촌이에요,,^^ 날씨추운데 감기조심하고 있죠? 먹고 싶은 것있으면 말해요 사갈게요. 아마 모친이 번호를 알려주고 시켰을 것이다. 나는 쓸데 없는 짓 좀 하지 말라고 모친에게 화를 냈다. 몇 번인가 답장을 보낸 적은 있다. 치킨이요. 집에 귤 떨어졌어요.
모친은 연애한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면서 그에 대한 호감은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사람 진짜 괜찮지? 결혼은 그런 사람이랑 해야 하는 거야. 부인 사별한 지 5년 되었다는데, 아직 젊은 사람이 그냥 아들이랑 둘이 사는 거 보면 안쓰러워. 삼촌이 너 먹으라고 귤 사 왔다? 너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그냥 끔찍해.
이별은 핸드폰 메시지로 통보받았다. (……) 처음에는 이별조차 문자로 통보한 그 누군가의 무심함이 정말 원망스러웠으나 따지고 보면 애인이란 역시 일종의 비정규직이므로, 가능한 처우였다는 결론에 곧 다다랐다. 그때, 나는 드디어 완전한 백수로 거듭난 것이었다. _「호르몬이 그랬어」,
모친과 나 사이에 어떤, 호르몬의 고리가 있는 것 같았다. 지구와 달 사이에 작용하는 여러 가지 힘들이 두 별의 거리가 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게 유지해주는 것처럼 모친과 나의 호르몬들이 보이지 않게 연대하고 경쟁하기 때문에 둘의 생리 주기에 사이를 두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고리에 아비는 어떤 힘도 행사할 수 없었다.
모친의 애인을 알게 된 뒤로 모친과 아비 사이의 일을 상상하는 것은 죄책감이 들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일종의 레포츠가 되었다. 아직 생리가 끊이지 않은 모친은 지금도 아비와 섹스를 할까? 한다면 며칠 주기로 한 번에 몇 분씩 할까?
잔을 부딪치고 와인을 한 모금 머금는다. 잘 모르겠다. 뭔가 비싼 걸 섭취하고 있다는 생각에 설레긴 하지만 정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맛이다. 달 것 같다가 떫은맛이 나고 그 때문에 마시고 나면 시린 침이 혀 밑에 고이며, 차가운데 아주 시원하지도 않고 하여간 이상하다.
침대 위에 내가 두고 나온 종잇장은 지금쯤 피를 조금 먹었을까. 나는 거기에 내가 적어둔 문장을 떠올린다. 내가 아니야, 호르몬이 그랬어. 나오라는 토는 안 나오고 눈물이 울컥울컥 나온다. 구역질이 밀어낸 피가 허벅지를 타고 흐르며 식는다.
담요 두 채 펴면 꽉 찰 방 가운데 이불을 펴놓고 엎드린 너. 손을 많이 타 책등이 너덜너덜해진 불가사의 도록. (……) 그런 곳에서 지내면서 너는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타지마할, 지상 최대의 무덤이라는 피라미드, 세계 유일의 수중릉이라는 문무대왕릉 같은 것에 매료되었다.
그런 곳에서 지내면서 너는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는 타지마할, 지상 최대의 무덤이라는 피라미드, 세계 유일의 수증릉이라는 문무대왕릉 같은 것에 매료되었다. 일종의 허영이거나 도피일 것이 분명한 네 취향이 내게는 귀엽게만 느껴졌다,
셋 세면 동시에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하기. 하나, 둘, 셋, 너. 네가 되고 싶은 나는 내가 되고 싶어하는 너를 안아주었다. 너는 안긴 채로 우물우물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 살아있는 우리보다 죽은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거. 나는 안쓰러운 너를 더 세게 안으며 내 무덤은 너야 라고 말했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크며 유일한 나의,
너는 난초당 42호에 보관되어 있었다.
매점 주인이 20분은 족히 걸릴 거라던 유리문 앞에 나는 12분 만에 당도했다. 건물 안은 바람이 들지 않지만 온도는 오히려 바깥보다 낮은 듯했다. 씨발 목욕탕 사물함도 이것보다는 커. 이토록 춥고 비좁은 곳에서 허술한 자물쇠 하나만 믿고 지냈을 너를 생각하니 화가 났다.
땀이 뱄다 마르기를 반복한 등판에는 소금 결정이 눈꽃처럼 맺혔다. (……) 버리지 못한 네 물건들을 머리맡과 발치에 쌓아두고, 이집트 왕의 시신처럼 양팔을 교차해 내 어깨를 붙든 채 새우잠을 잤다. 좁아서가 아니라 껴안을 사람이 없어서. 껴안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고 좁아서. 혹은
둘 다.
"이십대 초반에 쓰고 삼십대 초반-근래-에 고쳐 쓴 작품들로, 당시의 제가 삼십대 초반인 저처럼 작품을 쓸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저 또한 이십대 초반의 저처럼은 쓸 수 없습니다. 때문에 최근 몇 년간 해온 단편 작업들 사이에 이 세 편을 자연스럽게 섞을 수 없습니다."
조금 모호해도 아름다운 문장을 쓰고 싶었고 감히 아무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짓고 싶었다. 지금은 정확한 문장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누구에게나 공감의 여지가 있는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이 책의 세 작품을 쓴 나와, 그것들을 고친 나는 분명히 연속적이고 동일한 존재지만 또 이토록 다르다.
그건 이 기억 위에 금박으로 장식된 문장처럼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서련이는 소설가가 되어야겠다. 이 기억에 절대로 빠지지 않을 앵커를 박아두었다. 이 앵커를 동시에 돌아보는 여러 명의 나를 안다.
곁텍스트는 책에 수록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결코 아니다. 한 권의 책 안에서, 작품은 온전한 내적 독자성을 보유한다는 만성적 착오를, 곁텍스트라는 복수적 이질의 존재는 파열시킨다. 곁텍스트는 작품에서 억압되거나 누락된 것과 넘쳐 새어 나온 잉여를 받아 담는 장소다. 글쓰기는 기호의 몰역사적 구조물이 아니라 주체적 인간의 생산물이라는 것, 쓰는 자는 정체성의 여러 요소들이 특수하게 교차하고 중첩하는 실존인이라는 것, 작품은 상품의 형태로 비로소 가시화된다는 것. (...) 그것을 읽지 않을 이유는 없다. 주의를 기울여.
기형도가 뼛속 깊이 체감한 끈질긴 겨울은, 유난한 습기는 차치하고 시리고 광폭한 바람과 한기만 고려하면, 백석과 윤동주가 살다 간 한반도 북부와 그 너머의 날씨에 더 걸맞을지도 모른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년들에게, 10여 년이 지나, 미래의 작가가 다가선다. 그들의 삶은 더 이상 바꿀 것 없는 최종본이 아니라 미완의 초고였을 뿐, 방책 없이 내버려진 글쓰기의 궁지가 아니라 어떻게든 고칠 수 있고 "처음부터 다시" 쓸 수 있는 습작이라는 듯, 연습의 반복과 재시도야말로 과거, 현재, 미래를 이으며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생을 하루살이에서 구출하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듯.
오늘의 미제와 결핍에서 내일의 작가적 생이 연장된다. 습작의 문학과 함께 동시대인들에게도 시간이 조금 더 주어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색과 연습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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