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못 갖춘 마디』, 윤혜주, 북랜드, 2021

그루 터기 2022. 4. 12. 06:05

못 갖춘 마디, 윤혜주, 북랜드, 2021

 

또 한 번의 가슴 설렘을 감당할 수 없었다.

 

몇 달 전 먹을 갈다이후에 이렇게 첫 꼭지 글에서부터 정신을 빼앗긴 적이 없었다. 둥둥거리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하고 두 번째 꼭지 그 때 그 사람을 만났다. 메모를 하는 손이 벌벌 떨린다. 수필의 생명은 사실감의 표현이라고 배웠다. 아니 들었다. (저는 문학관련 교육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어서요) 이 책의 글들에는 두드러진 사실감과 찰떡궁합을 연상케하는 적재적소의 단어들과 표현들이 나의 가슴을 두드린다. 두 꼭지를 읽고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커피를 한 잔 내려 천천히 마셨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마음을 가다듬고 세 번째 꼭지 <그 강이 깊어질 때>를 폈다.

가을이 부쩍 수척해졌다. 여름내 가들막하던 강물도 시나브로 여위어졌다. 푸른 별 밭 가득한 강가에 풀벌레 소리 가득하다. 귀뚜르르 왕귀뚜라미가 가야금 줄 고르듯 청아하게 울면, 히리이링 히리이링 방울벌레 귀뚜라미가 응답하듯 구슬프게 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소리다. 사랑이란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한 폭의 그림처럼, 한 곡의 슬픈 노래처럼 잔잔하게 가슴을 두드린다. 이렇게 따스한 글을 쓰시는 분은 마음도 따뜻하다고 믿는다. 이 꼭지의 마지막을 읽으며 주책스럽게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다시 조용히 책을 덮는다. 표현력이 부족한 나는 더 이상 어떻게 이글을 표현할 수가 없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몇 번이나 다시 책을 덮을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얼마나 더 진정시켜야 할지.

 

<닭장>에 이르러서 기어코 또 한 번 책을 덮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두 번을 다시 읽어도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아마도 난 이 책에 미치고 작가를 사모하게 된 것 같다. 더 이상 하나 둘 더 나열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 둘러댄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가슴을 떨게 한다. ( 닭장을 읽고 나서 확인해보니 역시 이 글은 월간<한국수필>에 등단한 작품이었다.)

 

한 꼭지 한 꼭지를 넘길 때마다. 잘 쓰여 진 단편 소설을 보는 듯하다. 수필을 읽으면서 소설처럼 이라고 느낀 것도 그리 많지 않다. 수필은 사실을, 소설은 픽션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나는 소설도 사실을 위주로 쓰는 글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독자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살아있는 소설이 될 것이다. 문득 수필이 소설 같은 생각이 들 때, 이런 느낌이구나하고 다가온다.

 

몇 꼭지 남지 않은 글들을 넘기기가 아깝고 두렵다. 잠시 책을 덮고 거실 밖의 풍경에 눈을 준다. 늦추위의 괴롭힘을 견디며 새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 목련꽃 몽우리가 며칠 사이에 엄지 손톱크기에서 밤알 만하게 커졌다. 지나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며 다가오는 봄을 재촉한다.

 

책을 빌려올 때 기대보다 실망하는 경우가 참 많다. 그런데 어떤 땐 큰 기대없이 빌려왔는데 이렇듯 감동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은 사실 살짝 기대를 하고 빌려왔다. 먼저 2021년 문학나눔선정 도서이다. 작가 소개를 봤다. 내가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등단여부와 동연배인가 하는 것이다. 소설가나 시인의 에세이도 비교적 성공확률이 높다. 더군다나 지속적으로 신문에 연재를 하셨다고 하니 기대할 할 만하다. 소설가나 시인은 아니셨지만 나의 예상은 올림픽 양궁 과녁의 중계카메라를 정통으로 맞춘 화살처럼 나의 심장을 관통했다.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가슴 떨림을 느꼈는지 모른다.

 

무엇에 대해서 글을 썼느냐가 이과 출신의 내가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썼느냐가 작가의 몫이었다. 내가 글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면 작가는 예술적인 감각으로 글을 이어갔다. 나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평상시에 글을 써온 사람도 아니고, 짧게라도, 글쓰기도 배워보지 못한 사람이다. 최근에 와서야 독서도 많이 하고 글쓰는 흉내도 내어보는 초보 중에 왕초보라서 잘 쓴 글과 잘 쓰지 못한 글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 가슴에 와 닿는 글은 느낌으로 안다.

 

이제까지 내가 읽은 수필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책. 닮고 싶은 글. 배우고 싶은 글. 오늘 한편의 참고서를 얻은 기분이다. 필사는 기본이다. 이젠 몇 번의 필사인가가 남은 일이다.

 

작가님께 감사한다. 많은 욕심 중에 작가님의 새로운 책을 기다리는 것을 추가하고 싶다.

 

 

저자 소개

 

윤혜주

경북 포항 출생

2010년 월간 한국수필6월호에 닭장1편으로 등단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수필 부문 대상 (2014)

ㆍ 《전북일보신춘문예 당선 (2015)

포항소재문학상 수필부문 최우수상(2014) 수상

ㆍ 《대경일보4년여 아침산책 연재 중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포항문인협회, 경주수필 회원

2020년 포항문화재단 문예창작지원금 수혜

수필집 못갖춘마디출간

miyai@hanmail.net

 

독서 메모

 

설익은 정서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텃세.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모두에게 조화라는 어우러짐만이 필요했다. 가락의 장단을 감싸 멀리 울려 퍼지게 해 사물의 신명을 제대로 형성시키는 징소리 같은 그러한 어우러짐만이. 인생이라는 바다에 돛단배로 폭풍과 맞설 때. 분별없는 마음이 격해져 눈물이 날 때. 고양될지언정 결코 난파되지 않았던 그 밤의 징소리를 떠올린다.

 

단조롭기까지 한 남자의 행동으로 보아 그는 필시 오랫동안 저곳에 있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 그가 놓친 것은 무엇이며 잡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황금인 줄 알고 잡았더니 이내 눈처럼 녹아 버린 욕망의 허상은 아니었을까.

 

가을이 부쩍 수척해졌다. 여름내 가들막하던 강물도 시나브로 여위어졌다. 푸른 별 밭 가득한 강가에 풀벌레 소리 가득하다. 귀뚜르르 왕귀뚜라미가 가야금 줄 고르듯 청아하게 울면, 히리이링 히리이링 방울벌레 귀뚜라미가 응답하듯 구슬프게 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소리다. 사랑이란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다시 가을이다. 막히고, 헝클어져 시도 때도 없이 사는 게 팍팍해 가슴이 헛헛하다. 강을 찾아 가슴을 풀어 놓는다. 흐름이라는 본능하나로 시련을 안고 정갈한 자세로 조용히 내 가슴으로 와 흐른다. 이 가을 오로지 다시 만남을 위해 엎드려 묵상하며 더 깊어져 올 그 강, 형상강을 기다린다.

 

쩔쩔 끓는 온돌방에 참나무향이 스며드니 온몸이 나른해졌다. 상을 물리고 굽은 등뼈를 천천히 방바닥에 누인다. 그러면 방바닥은 지그시 세파에 찌든 몸을 받아준다. 피곤이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천천히 빠져나간다. 고택체험의 백미다.

 

고택이 낡아가는 것처럼 누구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된다. 영원히 젊은 것은 없다. 고택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 시간의 더께가 있어 그렇겠지만 실제론 조금씩 저 자신을 덜어 내는 무욕에 있는 것이 아닐까. 풍장처럼 저를 소멸시켜가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 거기에 진정한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자욱이 피어오르는 향속에서 어머니는 희끄무레한 저고리를 벗어버리고 방금 풀어놓은 갈음옷으로 갈아입는다. 영안실이 복사꽃처럼 환해진다. 엉킨 삶에의 회한도, 두고 가야할 모든 것들에 대한 미련도 내려놓은 가벼워진 육신으로 두루마기 자락 펄럭이며 너울너울 춤을 추신다. 꿋꿋한 한그루 나무는 춤추는 잎새 되어 한 마리 나비처럼 눈물 젖은 복사꽃 사뿐히 지르밟고 저승 문을 향한다. ( 이 글은 내 어머니와 너무나 똑 같아 가슴이 저민다. 우리 어머니도 이승의 옷보다 저승의 옷을 더 많이 지으셨을 것 같다. 특히 윤달이면 시집올 때 가지고 오셔서 이젠 말썽부리기를 밥 먹듯 하는 재봉틀을 발로 밟으면서 며칠 밤을 새시며 수의(壽衣)와 상복(喪服)을 만드셨다. 동네 웬만한 집은 어머니가 만드신 수의를 입고 마지막 길을 가셨을 정도로 많은 수의를 만드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직접 만드신 수의를 입혀 드릴 때 일을 도와주시는 분들이나 친척들이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이 어쩜 이렇게 고운 수의를 만드셨을까였다. 나는 참 곱다. 참 곱다을 입속에서 우물거리며 꺼이꺼이 울었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

 

당신은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 누군가가 내미는 한 줄기 빛 같은 따뜻한 손, 위로의 눈빛을 받아 본 적 있는가. 또한 건네 본 적은 있는가. 그리고 그 눈빛 에 눈물 맺혀본 적 있는가. 인생이란 내 그림자를 남에게 부끄러움 없이 내보여주고 남이 드리운 그림자를 인정하는 일인 것을. 우리의 긴 동행에 누군가의 그런 눈빛이 더 많이 필요해 보이는 날이다.

 

윤씨와 한 조가 되어 나서는 그는 벌써 며칠째 약을 먹지 못해 병색이 완연한 최씨의 얼굴과 마주친다. 시동 걸린 봉고에 오르던 허씨가 갑자기 허리통증을 호소한 것은 그때였다. 뜻밖의 상황에 놀라 달려온 정소장에게 최씨가 자기 대신 차에 오를 것을 권한다. 할 수 없이 최씨를 태운 봉고가 출발하고 허씨는 언제 그랬냐 싶게 자전거를 타고 흩날리는 눈 속으로 사라져 갔다. () 안쓰러움이 없는 세상이 어디 있으랴 비록 세상이 우리의 기대를 내일 내려놓게 할지라도 그 기대를 접고 멈추어서는 안 된다. 터널 끝에 있는 한 줄기 빛을 향해, 동행하는 이들의 나누고 배려하는 따뜻한 손을 잡고 나아가야만 한다. 그들만의 새벽이 따뜻한 이유다. (콧등이 시큰합니다.나는 언제 한 번이라도 이런 일을 해 본적이 있었는지 뒤돌아봅니다. 있지도 않은 흔적을 찾아서.)

 

서두름이 없다. 깊어질수록 고요할 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경쟁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흐름이라는 묵언으로 일러준다. 앞선 자나 뒤처진 자나 모두 같은 강물 속에 있다고. 매일 수없이 상처받고, 홀로 자신의 상처를 꿰매는 나에게도 일러준다. 인간의 한 생도 이렇게 더불어 가는 것이라고.

 

남편은 자신의 탕 그릇까지 슬쩍 내 앞으로 밀어 놓는다. 먹고 또 먹는다. 그때, 그 아버지의 마음도 함께.

 

아버지에게 큰오빠는 못갖춘마디 같은 자식이었다. 깨진 유리온실 속의 시들어가는 화초 같은 아들이었다. 가슴여미는 아픔으로 무섭게 스치거나, 소용돌이치다가 비워진 쉼표와 마지막 마디의음표가 만난 후에야 완성되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자식 때문에 더 많이 아팠고 더 많이 내어주고 보듬었는지도 모른다.

 

놓친 못 갖춘마디의 첫음절을 붙잡고 마디마디 넘어오던 아버지를 기억하면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꿈이 이러나 춤을 춘다. 그래서 아버지께 드리는 제사는 나 자신과의 교감이기도 하다.

 

철이네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게 감을 달고 담장에 기대어 결실의 노곤함을 달래면, 시샘이라도 하듯 깨금발하고 순자네 석류나무, 살구나무, 대추나무도 열매를 달고 담장에 가지를 얹고 끼어들었다. 그러나 과수원 꼬부랑 할머니네 담장을 넘어오는 나뭇가지는 별로 없었다. 인심만큼이나 나눔이 없었던 그 집 나무들의 결실 또한 부실하였다. 간당간당 몇 개 달렸지만 맛도 없었다. 식물의 인지 능력은 사람보다 월등하다고 한다. 무성한 잎을 달지 못했으니 자연 찾는 이가 없었고, 맛이 없으니 눈길 또한 야박했을 터, 응당 결실을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

 

의처증에 시달리며 인간이기를 망각해가는 아들을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하던 날. 청년의 할머니는 해가 진 십리 길을 걸어 어미를 보내야 하는 어린것의 분유와 젖병을 사왔다. 그리고 그 병에다 긴 이별을 담았다. 서 있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떠날 채비를 마친 산벚꽃잎이 날렸다. 긴 겨울을 이겨낸 가지에 잠깐 피었다 떠나가는 벚꽃잎. 청년과 그의 어머니도 그러했다.

 

어머니는 해거름 그림자를 길게 끌며 청년이 사라져간 곳을 향해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리고 마침내 파르스름한 머리 위로 어스름이 내리자 미완으로 남아 있던 그림을 꺼내 그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라는 이름의 그림을.

산벚꽃을 보려고 올랐던 암자에서 비구니의 눈물을 보았다. 산중이라고 혈연의 그리움과 이별이 없었을까. 돌아누운 남편의 등판에 식은 사랑이 느껴질 때, 서둘러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에 무지근해지는 날이면 나는 그 비구니가 흘리던 눈물의 의미를 생각한다.

 

좁고 불편한 부엌과 화장실을 개조했다, 제사를 지내는 대청에 편한 의자를 놓고 성능 좋은 가전제품을 들여 편함을 도모해보지만, 변하지 말아야 할 서이 더 많은 곳이 또한 종가다. 무언의 약소처럼 제사상에 올릴 일곱 가지 과일과 전 세가지, 탕 세 가지, 포 세 가지, 나물 세 가지는 아무도 어쩌지 못하는 종가의 변치 않는 룰이다. 가뭄이 들어도 마르는 법 없이 늘 맑고 시원한 물이 찰랑거리는 뒤안 우물물로 만든 식혜 또한 빠져서는 안 되는 이곳 종가의 제사음식이다.

 

사이드 미러 하나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금속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에 자동차가 휘청거린다. 지뢰밭 같은 좁은 골목길에서 애꾸가 되어버린 자동차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춘다. 순간 겁을 만났다. 겁 없이 내달린 결과는 참담했다. 천지 사방이 겁이란 사실을 잠깐 잊은 사이, 놈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한다. 자초한 일이니 아량이나 배려 따윈 있을 턱이 없다. 놈을 모르고 덤빈 값은 에누리 없이 치러야 한다. 달아나버린 사이드 미러며, 생채기 난 도어, 군데군데 망가뜨려 놓은 남의 값비싼 자동차를 보고 있노라니 그제야 겁의 된맛을 실감한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천리다. 이성과 감성의 합일점을 찾아가는 그 과정 또한 만리다. 자라온 환경과 습관, 성격이 다르니 다툼은 필연적인지도 모른다. 남녀라는 또 다른 너와 내가 완벽한 하나가 될 수는 없다. 다만 서로의 테두리를 이해하고 그 깊이와 넓이를 인정하는 지혜만이 삶을 아름답게 할 뿐이다. 가정도 좌뇌로 계획하고 우뇌로 이끌어간다면 내 실 있는 살림살이를 잘 꾸릴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무기까지 내려놓고 좌뇌의 합리성과 우뇌의 감수성가지 균형 있게 갖춘다면 금상첨화다.

 

동반으로 살아가야할 세상이다. 그때처럼 아직도 내 마음 속의 바늘이 가족과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지. 혹 그 상처가 깊어 아직도 헤진 가슴으로 사는 이가 있다면 오늘, 이 바늘이 용서라는 실을 걸어 꿰매보리라.

 

고방은 유년의 친구였다. 마른버짐이 허옇게 핀 얼굴도, 잘 자라지 않는 키도 어머니 탓으로 돌리며 애꿎은 원망을 했다. 그때마다 시위하듯 고방으로 숨어 들어가 뭔가 마구 억울해 했다. 어 떨 땐 어둑할 때까지 고방 구석에 쪼그리고 않아 있다 잠이 들기도 했다. 낮에는 봉창으로 스며든 햇볕 때문에 아랫목처럼 포근했고, 밤이면 바자울에 서성이던 달빛이 이슬을 털어놓고 갔다. 환기와 채관을 위해 달아 놓은 작은 봉창 두 개가 바깥과 소통했다. 낡은 판자 문 걸고리의 열쇠는 구부러진 녹슨 숟가락이 대신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잘그락거렸다. 까닭 없이 외롭거나 슬프거나 할 때면 고방은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집도 사람처럼 운다고 아버지는 말씀 하셨다. 그것이 바람에 의해 집의 관절이 삐걱거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집 주인의 감정이 그런 현상에 투영되어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조금씩 빈집이 되어 갔을 아버지의 마음이었는지도. 아버지 안의 대들보며 서까래는 벌레가 들어 파먹고 갉아먹었을 것이며 잠들지 못하는 밤, 문설주는 바람에 자주 덜컹거렸을지도 모른다.

 

겨울은 빚쟁이 독촉하듯 찾아왔다. 살을 에는 삭풍에 강은 두꺼운 얼음 이불을 덮었다. 빙판에 갖힌 강변의 배 위로 까치가 떼 지어 날아다녔다. 자야가 떠난 마당엔 진눈깨비가 날렷다. 동네사람들은 혼자가 된 자야아버지를 위해 보리로 엿기름을 만들고 누룩을 빚어 나누었다. 몇 십 년만이라는 큰 눈이 며칠을 두고 내렸다. 사람들은 꼼짝없이 집안에 갇혔다. 눈이 그치고 동네사람들이 이발소에 도착했을 때 자야아버지는 떠나고 없었다.

 

나무위의 스피커 음악소리는 어르신들의 웃음소리에 밀려 바닥으로 털썩 떨어져 흩어진다. 쒸엑쒝 타이어에 바람 넣는 소리와 귀를 찢는 매미 소리의 화음도 절묘하다.

 

어렵게 자라 얻어먹은 밥만큼 베풀고 산다는 복자씨. 푸근하고 자랑스럽다. 정녕 배고팠던 자만이 아는 고수의 삶이다. 갈퀴 같은 그녀의 손이 낡은 전대의 지퍼를 열 때마다 따라 나오던 따뜻한 온기. 그 정체는 배고픈 이들을 보듬는 한 여인의 낮은 시선에서 출발했음을 그제야 아록 숙연해진다. 길 위에 앉은 작고 초라하다 싶은 행상 여인의 삶. 그 따뜻한 철학 앞에 날이 섰던 마음이 뭉그러진다.

 

이러우, 어저저 음메.’ 그토록 기다리던 봄은 왔다. 그러나 소여물 냄새와 뿌연 김 서리던 외양간엔 누렁이가 없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논밭에도 누렁이는 보이지 않았다. 혓바닥에 닳아 나뭇결 반들반들한 여물통과 함께 사라진 외양간의누렁이. 재산목록 일호였던 누렁이는 그렇게 그해 겨울, 두 집 식구들의 끼니를 약속해주고 사라졌다. 삭은 울바자처럼 삶이 송두리째 쓰러져가던 그해 겨울. 더불어 사는 원리를 본능적으로 느꼈을까.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여 그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했던 아버지의 사람다움을 보았다.

 

도심의 뒷골목 작은 상가들이 어개동무하고 살아가는 이곳.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방 같은 미용실이 있다. 나는 이곳을 솔라시 뷰티살롱이라 부른다.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8개의음계 중 절반의음을 지나온 이들이 많이 찾는다고 해서 내 나름대로 붙인 이름이다. 그뿐이랴. 솔라시는 점점 올라가는 음이라 또 다른 변화와 잘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나간 삶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두 번 사는 것과 같다.” 고 고대 로마시인 마르티알리스는 말했다.

 

누군가의 체취를 맘껏 느끼고 자란 아이는 밝고 따뜻하다. 정서가 풍부하여 사려 깊고 온화하다. 교감이 발달해 나눌 중 라고 배려할 줄 안다. 한낱 작은 처네가 주는 큰 의미다.

 

어느 늦은 가을의 해 질 무렵, 아버지가 자전거에 갈꽃비 한 자루를 매달고 오셨다. () 오래도록 내 손을 잡고 토닥이는 아버지는 빗자루를 건넨 뒤, 찬물 한 그릇으로 목을 축이고 시오리 길을 되돌아 가셨다. 문득문득 차오르는 한숨을 쓸어내리라고 십일 남매의 맏며느리가 된 딸에게 가져오신 걸까. 아니면 자식의 가슴속에 일어나는 오만 허튼 생각들을 쓸어주고 싶었던 당신의 마음이었을까. 아린 가슴 들킬까 서둘러 돌아서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비추던 그날의 석양은 유난히 붉었다.

 

잔의 일생은 기다림이다. 제 속을 내어놓고 채우거나 비우는 연속의 삶이다. 넘치는 것은 내 것이 아니기에 제 몫 이상을 탐하지 않는다. 비워지면 기다리면 될 일이다. 담기는 것에 우선하는 단호함은 잔의 낮은 자세다. 차를 마시거나 술을 마실 대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한 특별한 존재감이 없는 이유다.

 

기다림의 시대이다. 누구에게나 그 어떤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 간절함은 기회를 부르고 원하는 것이 때와 일치할 때 어떤 빛이 발광하는 순간은 온다. 비워진 뒤에도 남겨진 공간을 채우고 또 다른 만남을 기다리는 잔의 소박하지만 위대한 미학. 기다려야 굳는 관계가 있고 기다려야 오는 게 있듯, 기다림이 사람의기본이고 바탕인 사회다. 우리는 기다려야 마땅한 것들의 가치와 의미를 잔에 배운다.

 

핸들을 바투 잡고 멀리 산수화에 점 찍힌 인물처럼 보이는 산 중턱의 농부들을 본다. 지금 저들은 내년 봄을 맞이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 거두어야 할 것, 남겨야 할 것들을 헤아리고 선택하는 중이리라. 일상에서도 저들의 가을걷이 지혜를 새겨볼 필요가 잇는 것은 마음이 언치거나 놀랐을 때나 허둥대다 놓치는 것이 많은 오늘 같은 날이다.

 

경사가 있는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가속페달만 밟던 다리가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위태롭게 미끄러진다. 인지하지 못하고 맞았던 내 인생의 내리막길도 이와 달지 않았다. 오르막만 지향하던 굳어진 습성 탓에 가파른 내리막엔 속수무책이었다. 아픔이 배가되어도 오롯이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흙을 내린 밭의 무들이 바지를 내려 엉거주춤 볼일 보려다 들킨 자세로 엉덩이를 내놓고 있다. 그 하얀 속살들이 푸르게 물들고 있다.

 

고통의 종소리가 울려 퍼져야 산사가 아름답듯, 내 인생길에 울렸을 수많은 종소리는 무엇을 위해 울렸을까. 내 삶에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내 존재의 맑은 종소리를 위함이 아니었을까. 타종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해야 할 일이다. 오늘도 누군가 종 메로 강하고 거칠게 친다 해도 머리 숙여 감사할 일이다. 저 종소리처럼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위해, 그리고 이 가을 자드락길에서 만난 모든 것들을 위해서 나는 달린다.

 

오늘도 목쉰 뻐꾸기가 울고 있다. 봄이 간다고, 갑순이가 떠났다고. 마음을 말해주지 않고 떠난 갑순이 때문에 우는 갑돌이의 절절한 통곡 같다. 행여 갑순이가 들을세라 자신을 다독이고 쓰다듬으며 지나간 것은 다 아름다웠노라외치는 저 뻐꾸기 소리에 속절없이 봄날이 간다.

 

외로운 은둔자보다 고독한 산책자를 택해 나온 걸음이 가볍다.

 

요양원에서 한겨울을 지낸 영천댁도 돌아왔다. 지팡이 소리 경쾌하게 한 층 더 건강해진 모습이다. 한여름과 겨울에는 시설 좋은 요양원에서 지내다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냉난방이 부실한 낡은 집에서 힘들게 지내는 부모님을 위해 자식들이 궁여지책 고안해 낸 그 대안이 요즘 인기다.

 

부러지고 상처 난 고구마와 찬밥 덩이가 엿기름에 섞여, 제 성질을 내려놓고 함께 삭혀짐으로써 엿물이 되듯. 사람 역시 제 성질 고집하지 않고 다 받아들인 뒤 아우른다. 그러다 조금은 비워두는 너그러움까지 생겨나는 것은 세월이 사람에게 주는 값진 의미다.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아는 이들의 공간이다. 세상사는 게 갈수록 힘들다 보니 현실을 외면하고 눈을 감고 싶을 때 특별한 것도 없는 이곳이 그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