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객잔』, 김명리, 소명출판, 202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1 문학나눔에 선정된 책이다. 나는 여기에서 소개된 책을 거의 반사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최소한 두 세권 중에 한 권은 틀림없이 내가 좋아하는 책이 되기 때문이다. 난 아직도 문학나눔 선정 기준을 모른다. 각 출판사마다 신청을 한다는 것 까지는 읽어봤었다. 다만 지난해에 나온 책들 중에 좋은(?) 책들을 고르는 게 아닌가 생각될 뿐이다. 그 ‘좋은’ 이라는 기준이 어디에 있을까 항상 비꼬인 새끼처럼 삐딱하게 바라보게 된다.(정치적인 성향이 있는 책이 많았다.) 그래도 그 중에 문학적으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책들이 많았다. 삐딱한 내용이야 읽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열심히 읽다보면 그런 내용이 나와 허탈함을 느끼지만 중간에 덮어버리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작년 한 해 동안 읽은 450권 정도의 책 중에 중간에 덮은 책은 두 세권 정도뿐이다.) 일단은 끝까지 읽는다. 판단은 그 다음에 한다. 하긴 잘못 판단한다고 해서 내일 모래면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책 한 권으로 내 인생이 바뀌지는 않을거지만...
서론이 길었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이 책은 너무 맘에 든다. 오랫동안 옆에 두고 읽고 싶은 책이다. 내가 좋아하는 종류의 책이다. 도서관 책 대출리스트 비고란에 붉은 별표가 붙을 최고 등급의 책이다. 초대글과 머릿글의 조금은 난해한 단어의 선택이 책 읽는 속도를 더디게 했지만 (쉽게 읽히는 책을 좋아하는 저는 처음에 멈칫했었다.) 이내 자연스럽게 눈에 붙는 글들이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간간이 글 중에 남편일까? 아내일까? 헷갈리는 부분이 기어코 인터넷으로 작가의 프로필을 찾게 만들었다. 작가의 이름을 보고 남자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3인칭으로 쓴 글 때문에 자꾸만 헷갈려 다시 읽었다.
시인의 산문은 짧고 강렬했다. 매번 느끼는 시인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 왔다.(시인이 쓴 수필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길다고 좋은 글이 아니듯, 짧다고 허튼 글도 아니다. 페이지 마다 남겨두고 싶은 글들이 수북하다. 그렇다고 책 한 권을 다 옮길 수는 없는 일. 그 중에도 또 마음에 닿는 글을 아껴가며 독서 메모를 적는다. 중간 중간 실린 시들을 이해하느라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하는 나 자신의 아둔함을 반성하며, 좋은 글 선물해 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저자 소개
김명리, 金明梨, Kim moung-ree
대구에서 태어났다. 1983년과 84년 「탈춤」 외 4편의 시를 추천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저서로는 시집 『물 속의 아틀라스』(1988), 『물보다 낮은 집』(1991), 『적멸의 즐거움』(1999), 『불멸의 샘이 여기 있다』(2002), 『제비꽃 꽃잎 속』(2016), 『김치박국 끓이는 봄 저녁』(근간) 등이 있다
독서 메모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자신의 붓끝을 입으로 빨아 그것이 삭아서 닳아질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문장을 써내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외롭고 가파르기만 한 생애 속에서도 비 그친 저녁녘 산그늘이 내리는 듯 청렬한 문장, 가을 낙조와 같이 아득히 광활하고 접힌데 없이 창연한 생각들을 담고 싶었으나 타고난 비재와 게으름으로 궁색하고 수줍은 글들로 채워진 첫 산문집이 되고야 말았으니 돌아보는 마음 되우 낯 뜨겁고 스스로 부끄럽기만 하다.
해마다의 이맘때면 헐벗은 나무들의 우듬지마다 잎잎 연둣빛으로 되살아오는 어머니를 그리며.
유전자 구조가 인간과 거의 일치하는 생물이 나무라고 한다.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그가 감내했을 기후조건과 생태 환경의 적응 정도를 그 촘촘함과 느슨함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듯 자연에서 죽은 나무 또한 온갖 벌레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흙으로 되돌아간다. 소나무는 목숨이 다했을 때 그 썩어가는 속도가 인간의 죽은 몸이 육탈하는 정도와 같다고 하지 않던가. 나무가 자신의 상처를 감아쥐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면, 인간이 흘려보낸 세월의 박피들이 서서히 그 내면의 공동을 메우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요즈음 나날의 삶이 기적 같기만 하다. 빈들에, 겨우내 움츠렸던 나뭇가지에 푸르른 기운이 물결처럼 움터오고 꽝꽝 닫혔던 겨울 집집의 창틀 먼지들이 제 무슨 아지랑이인 양 봄 햇살에 한껏 숨 가쁜 매무새를 흩어 보이고 있다. 그렇다. 무스 점령군처럼 헤집고 군림하고 호령하는 숱한 세금 고지서들과 망둥이처럼 튀어 오르는 물가고 속에서도 봄은 기어코 우리 앞에 당도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키모들은 화가 풀린 지점을 지팡이로 표시해 둔다고 했던가. 아내의 종종대는 모습은 옥수수 댓잎사귀에 가려 보이지 않고 물 잔뜩 머금은 매지구름은 기어코 산등성이를 들쳐 업었다. 그들이 한 사나흘 묵어 갈 민박집 뜰에는 늦여름 꽃들이 야단스레 붉고 닭들이 구구거리고 암캐는 고물거리는 새끼에게 젖을 물린다.
삶은 계란은 언제 어느 때 먹더라도 목이 메는 법이지만 그렇게 나 맛있고 배부른, 목이 메는 계란을 먹어본 것은 아마도 내 생애 처음이었지 싶다.
어버이날 저녁 대문간의 불두화 활짝 피어난 때에 엄마가 돌아오셨다. 산골집 적막해서 못 살겠다며 서울 사는 동생네 다니러 가셔서는 거기 눌러앉으신 지 얼마 만인가. 그 사이 지병은 더 깊어져서 지팡이 짚고 부축해 드려도 기우뚱 진동걸음. 여기가 어디냐고 자꾸만 물어보시는 여든넷, 살아온 기억의 거개가 유실되었지만 꽃과 나무와 새와 구름, 해와 달과 바람의 기억만은 유현(幽顯)해서 불두화 꽃그늘에 기대앉아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시기도 한다.
“노인들이 본질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은 생의 승리”라는 마르케스의 말은 옳다. 여덟 해째 진행성 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지만 아직은 당신의 자식들, 손주들 또렷이 알아보시고 사계(四季)의 저마다 다른 바람소리, 봄 나비 떼 같은 심금(心琴)의 기억들만은 금강석만큼이나 단단해 보인다. 맞다, 자기 보물을 어디에 숨겼는지 잊어버리는 노인은 없다. 놀라워라, 치매에 드신 우리 엄마, 즐겨 부르시던 노랫말만큼은 한 소절도 잊지 않으셨구나!
나는 신발이 없다고 한탄했는데 거리에서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났는가, 입술 깨물어가며 스스로를 달래보지만 내 엄마의 이승의 삶, 그 낱장이 몇 줌이나 남아 있으랴.
사람이 짐승을 기른 게 아니라 짐승이 사람의 마음을 길렀음을 나 이제야 조금쯤은 알 것만 같다.
내가 마스크 쓴 것을 유리문으로 확인한 아주머니가 문을 따준다" 떡 없어요. 며칠 전부터 떡을 만들 수가 없어요. 이 동네 상권 다 죽었어요." 깊디깊은 한숨을 내뱉는 다. 뒤돌아서는 내 등에 대고 "백설기 서너 개 있는데 그거라도 가져 가실라우? 하 기에 한 개만 달라고 했더니 두 개를 싸주며 "한 개는 서비스유우" 한다.
그렇다면 시인, 시인은 자신의 입으로 생의 쇠망치를 삼켜 뭇 생명들의 상처를 꿰매는 몇 쌈 바늘로 그것을 정련해 토해내는 사람이 아닐 것인가.
출판사에 시집 원고를 넘기고 공판인쇄에 들어간 중에도 수십 편의 시를 교체하는 극성을 떨기도 했으니, 이제 와 돌아보면 썩 변변치도 않은 시들을 두고 시마니 뭐니 입설에 올린 일이 스스로 부끄럽기만 하다. 하기사 시마도 늙어 사람의 집 문간에 걸터앉아 숨 고르기만을 하고 있는지 요사이는 그때의 신열 오르던 순간들, 한 구절, 한 구절 받아 적기에도 벅찼던 순간들이 매오로시 그립기만 한 것을.
첫 시집 '물 속의 아틀라스' 의 날개 사진을 나 모르는 누군가 찍었던 그해 봄, 해프닝으로 끝난 두 번의 자살 소동이 있었다. 오래 모아둔 수면제를 단숨에 한 주먹 털 어 넣었을 때는 때마침 집으로 찾아 온 친구에게 발견되었고, 슈베르트의 현악 4중 주 <죽음과 소녀> 음반을 반복적으로 리플레이하다가 급기야 커튼에 목을 매었을 때는 커튼대가 부러져 발목뼈에 금만 가는 정도로 또 한 차례의 헤프닝도 우스꽝스럽게 마무리되었었다.
양광(陽光)은 등에 따갑고 그늘 쪽은 어느새 스산하다. 햇빛과 그늘의 스미고 흩어지는 경계,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좀 더 오래 머뭇거려도 좋을 시기가 이즈음인 듯하다. 여름내 재재발랐던 빛의 걸음걸이가 슬슬 굼떠지기 시작하고 큼큼거리면 코끝에 바짝 당겨올 햇빛, 그늘, 가을꽃 향기. 해묵은 노트를 열고 「오늘 밤에 만난 가을」을 다시 읽는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찍이 가을을 두고 “여름이 타고 남은 것”,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燈籠), 그리고 코스모스 무참”이라고 썼다. 심은 적 없는 마당가 쑥부쟁이 보랏빛 꽃들 아래 한 마리 새의 주검…… 적막한 천지간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실려 왔나, 꽃들아, 새야, 문상 온 나비야.
사람의 저녁
‘한해의 저녁’인 이즈음 집 뒤 골짜기의 활엽수들이며 마당가 몇 그루 나무들이 며칠 사이 뼈대만 앙상해졌다. 만지면 살얼음 버석거릴 듯 날빛 마저 스산해져서 하루의 온종일이 일몰 시각대인 것 같다. (…) “하루의 저녁도 슬퍼할 만한데, 일 년의 저녁을” 아니, 사람의 저녁을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골짜기에 다시 눈 내리는데 사흘 전 빙판에 미끄러져 퉁퉁 부어오른 팔목이 책상 면 에 닿을 때마다 전열선을 스친 듯 찌릿찌릿하다. 본시 우리 삶이 크고 작은 면목이 그러하듯 설화에 취했다가 설화를 입은 셈이 되었다고나 할까.
굶주린 겨울 고라니들에게는 풋것을, 청설모와 다람쥐와 새들에게는 알곡을 정처를 찾아 헤매는 길고양이들에게는 잠자리와 사료와 비린 것을 내어주어야 만 한다.
참나물, 취나물, 비름나물, 도라지, 깻잎나물에 밥 한 덩이 얹고 고추장, 참기름에 버무려 한 술 뜨는데 며칠 앓았던 신열이 일시에 풀리려나 싶게 한 대접 가득한 나물밥이 술술 넘어간다.(비빔밥을 좋아하는 나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어릴 때 많이 먹었고, 지금도 자주 먹는 비빔밥, 오늘 점심에는 아내에게 비빔밥을 부탁하고 싶다. 하루 세끼 먹는 삼식이가 주는 대로 먹어도 이쁘게 보이지 않을 텐데. 메뉴를 주문하면 좋아라는 할까?)
당시 읽었던 대부분의 책들이 그곳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이어서 함부로 밑줄을 그을 수도 없었으니 부지런히 옮겨 적을 수밖에 없는 노릇. 그때 옮겨 적은 문장들이 노트에 가득한데 지금도 그 글들을 들여다보니 있으면 비 그친 먼 산 틔워오듯 희부윰하던 눈앞이 대번에 맑아지는 듯 하니 필사의 기쁨이란 능히 이런 데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도 지금 이순간이 바로 작가의 마음과 비슷하다. 나도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오기 때문에 밑줄도 치지 않을 뿐 아니라 읽던부분을 접지도 않는다. 최대한 빌려올 때 그대로 돌려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심지어 책을 읽을 때는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혹시나 실수로 커피라도 떨어트릴 수 있어서다. 그래도 이렇게 마음에 드는 글들을 노트북에 옮길 때 항상 행복하고 좋다)
산자락 아래라 4월이 코앞인데도 봄이 먼 집 마당에서 향기(고양이 이름)는 봄이 먼저 올지 임이 먼저 올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미구에 들이 닥칠 꽃봄, 어쩌면 향기는 임과 봄을 함께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오오 앙큼한 봄! 고양이 향기가 온몸으로 봄빛을 진동하는 객잔의 삼월오후다.
혹한의 눈보라 속에 거리의노숙자에게 자신의 외투와 장갑을 벗어주고 얼마 안 되나마 돈까지 쥐여주었다. 하는 사진과 기사를 며칠 전 보았던 기억이 겹쳐져 모처럼 훈훈해진 마음,
히말라야 연봉과 마주앉아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신다. 카트만투 타멜의 한국 식당에서 만난 어떤 이는 포카라에 네 번이나 갔어도 히말라야를 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포카라에 온지 사흘 만에 내가 만난 히말라야다. 아아. 목구멍으로 커피가 넘어가는지 히말라야 설산의 눈 녹은 물이 흘러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다.
날씨 흐린 탓에 마차푸차레며 안나푸르나 1봉(峰)의 선명한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깎아지른 바위 벼랑에 초막(草幕)을 짓고 사는 이들의 풀잎 닮은 웃음, 굵게 팬 주름고랑마다 햇빛이 물살처럼 반짝이며 흘러가는 것을 본다. 도시가 세워지고 교역이 오가고 문명이 꽃피고 큰 바람에 업혀온 작은 바람이 눈앞에 가득한 가 했더니 멀리 아득히 어느새 흩어지고 없다. 산이 그곳에 있으니 시절 인연을 옮겨 다니며 사람이, 바위가, 초목이, 하늬바람이 거기에 포자처럼 깃들여 살았으리라.
짐승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어제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바그릉 마을에서 수도 카트만두의 식당에 일하러 온 16세 소년이 개에게 물려 신음하는 것을 보고, 오늘 지나는 차에 치인 한 마리의 개가 피투성이가 된 채 도로에서 절규하는 소리 듣는다.
목숨이 경각에 달했지만 아직은 살아 있는 자들이 속속 도착하기도 하는 집, 화장터 입구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집’이 있다. 숨을 거두기 무섭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그 육신을 태워야만 생사윤회에서 벗어난다는 믿음이 그 집을 세웠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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