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이유진, 다른길, 2021

그루 터기 2022. 4. 16. 00:12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이유진, 다른길, 2021

 

10년 전 충청도의 한 농협에 설비를 놓았을 때 핵심 설비를 일본의 기계로 설치했었다.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설비의 설치와 AS는 당연히 일본 기술자가 와서 했고, 그 기술자는 지독한 아토피 환자였다. 처음 인천공항에서 그 분을 만나 충주로 이동하면서 혹시나 전염이 되는 피부병이 아닐까 조바심이 났었다. 사전에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텐데. 현장에 도착해서 통역을 통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의심하고 걱정했던 일들이 미안한 마음과 안타까움으로 변했다. 하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그저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며칠간의 설비조정기간 내내 대화도 거의 없이(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묵묵히 일만하는 모습이 지금도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 그래도 최첨단 기술을 갖고 있어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하시는 모습에서 약간의 안도와 부러움마져 일었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 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무관심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나 자신을 둘러보며 햇빛 알레르기와 아몬드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가까운 지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나는 나의 몸의 주인으로 여겨주는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전문가의 권위를 내세워 명령하고 지시했지만 정작 책임은지지 않았다.’란 글을 읽고 아! 이 대목이 왜 이렇데 가슴에 닿을까?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닌데 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 라고 생각이 들었다. 조금 어색한 이야기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사소한 일에도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아내는 잔소리는 많이해도 건강을 위해 음식이나 여러 가지를 수시로 챙겨주고 책임져주니까. 의사와는 완전히 다른 내 사람이 맞다는 생각을 해 본다.

 

(p85) Speak out : ‘당신의 딸이 여기 있어요.’를 읽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평생 싸우고 있는 심각한 아토피에 우울증까지, 그리고 세상엄마와 다른 아픈 엄마를 이야기하는 글이 가슴을 후벼 판다. 순간 세상은 참 공평하지 않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잠시 책을 덮는다. 큰 한숨을 쉬고 다시 다음 글을 찾아 나선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가진 게 참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작가님에 비해 여러 가지 좋은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스스로를 사랑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작가님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덧붙인다.

생각이 참 많은 날이다.

 

 

 

 

저자 소개

 

이유진

인생의 거의 전부를 아토피피부염과 함께 살아왔다. 우울증과 불면증, 자살 충동으로 20대부터 심리상담 치료를 받았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말 걸고 다른 존재들 옆에 가만히 서고 싶다. 젠더교육 강사와 타로 리더로 활동 중이며, 전북 남원에서 협동조합마고와 공간 살롱드마고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독서 메모

 

아토피 환자로서 경험한 일들을 글로 쓰면서, 나는 이 병의 작동 방식이 아픈 사람, 건강하지 않은 몸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서는 혐오나 동정이 아닌 다른시선을 경험했다면 내 삶의 빛깔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껏 스스로 부정해온 몸이 품은 말을 번역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지만, 말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고 뒷걸음치는 삶에 더 나은 내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내 몸을 그대로 보고, 읽고, 썼다.

 

어느 날은 혼자 복도에 멍하니 서 있는데 지나가던 뎦 반 선생님이 농다멏럼 말을 걸었다. “, 그늘의 여인이네.” 그 말을 듣고 나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까지 짙은 그늘이 드리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인 중에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분이 있다. 작열하는 태양아래는 물론이고, 모두들 따뜻하고 행복해할 정도의 햇빛 만 쬐도 금방 힘들어 하는 분이시다.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습관화 되면 나아지는 줄 알았다.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진다.)

 

그렇게 수십 년간 한 자식의 몸을 두고 어미는 자책하고 아비는 부정했다. 누구도 내게 괜찮다거나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낫기 위해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마음이 더 편안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시도했는데도 몸이 좋아지지 않으면 '끝까지, 충분히, 제대로 노력한 게 맞냐'라고 스스로를 다그치기 일쑤였다.

 

치료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되었고 예기치 못한 부작용도 잇따랐지만, 나는 그에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는 대신 그저 반성하고 자책하길 반복했다.

 

보통의 몸들 앞에서 자주 초라해지고 남몰래 더 작아졌다. 그처럼 쪼그라드는 나를 받아들이기가 부끄러워서, 나는 몸과 나를 분리하려 끊임없이 노력했다. 비록 내 몸은 이렇지만 진짜 너는 달라. 명령인지 혹은 속삭임인지 모를 이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수치스럽지 않은 척하며 매일 집밖으로 나갔다. '이런 몸을 가졌음에도' 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보통의 몸들보다 더 많이 분투하면서 '보통'의 존재로서의 쓸모를 증명하려 노력했다.

 

누군가에게는 나의 얼굴과 외모로 집밖을 나온다는 것이 대단한 용기로 보일지 모르나, 나의 외출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장애인이 성공했을 때 사회 전체가 나서서 그에게 장애를 극복했다고 치하하는 것은 참으로 무감각하고 무례한 일이 아닌가. 나 또한 나에게 주어진 매일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뿐인데 과연 그걸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로 나를 지지한다면 어떤 얼굴, 어떤 생김으로도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만들겠다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 내게 줄곧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것은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먹고 살 것 인가였다. 생존이 해결되지 않으면 건강을 위한 돌봄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너보다 바쁘고 일 많이 하는 사람들도 채식만 잘하더라, 누군가 이렇게 타박하면 할 말은 없다. 다만 나는 왜 내가 타인에게 나의 어쩔 수 없음을 변명하듯 설명하고 끝내는 설득까지 해내야 하는 건지가 궁금할 뿐이다. 대체 누가 나에게 그런 미션을 부가했으며, 누가 그들에게 나를 추궁하고 심판할 권리를 준 것일까?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다.)

 

엄마는 내게 결혼하지 말고 자기와 둘이서 죽을 대까지 살자는 말을 평생 반복했다. () 하지만 삶은 알 수가 없는 것. 어느 날 엄마가 먼 저 나를 떠났고, 나는 엄마의 당부를 어기고 결혼을 선택했다. (결혼은 마땅히 축복받아야 할 일이지만, 힘들었을 과정이 상상이 되어 마음이 편치않다.)

 

그렇다면 나는 장애인인가?” 하는 질문을 간혹 던져본다. 이에 쉽게 답할 수 없다.

 

의료진을 포함해 사람들은 항상 나의 아픔을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는 수많은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물어보는 사람은 아예 없었다. 더구나 이 사회에서 약한 몸은 곧잘 실패나 뒤처짐, 민폐의 증거가 된다. 그러니 나에게 아프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되었고, 부끄러운 일을 말할 수는 없으므로 점점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한 것 같다. (나도 통풍에 평생약을 복용해한다. 통풍을 이야기 할 때마다 몸 관리나 음식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으름과 의지박약에 대해서 죄의식처럼 머리를 지배한다.)

 

나는 나의 몸의 주인으로 여겨주는 의사를 만나지 못했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전문가의 권위를 내세워 명령하고 지시했지만 정작 책임은지지 않았다. (! 이 대목이 왜 이렇데 가슴에 닿을까?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닌데 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 라고 생각이 들까?)

 

갑자기 그가 흠칫 놀라며 자기 손을 얼른 치웠다. 이제야 내 손등을 봤구나, 나는 생각했다. 보통의 젊은 여자들이 지닐 법한 희고 보드라운 손이 아니라 자글자글한 주름, 갈라지고 벗겨진 피부, 눈에 띄는 딱지들로 뒤덮인 괴물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그는 몹시 당황했다. (……) 성추행도 하기 싫은 몸이라니 좋아해야 하는 건가? 성추행범도 혐오하는 몸이면 여자로서 안전하게 살 수 있으니 다행하고 기쁜 일인가? 몇 년이 지났지만 이 물음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늘 함께 하지만 낯설기만 한 나의 몸, 내 것이면서도 끊임없이 불화해온 이 몸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 여전히 나는 잘 모른다. 다만 이렇게 분열되고 어긋난 나와 몸의 관계를 이제는 이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몸의 고통은 직접적인 불편함을 초래하기에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마음이 무너지고 있을 때의 감각은 훨씬 둔하고 느리다. 우울이 턱밑까지 차 울렁이느라 숨을 꼴딱거리면서도, 매일 동이 틀 무렵에야 잠깐 불이 꺼지듯 희미하게 잠이 들면서도, 나는 나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상담자가 어딘가 고장 나고 이상한 나를 고쳐줄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상담자는 어딘가 고장 나고 이상한 나를 집요하게 거울로 비춰주는 사람이라는 걸, 차차 알게 되었다.

 

엄마에 대한 분노는 너무 오래되어 나조차도 알아볼 수 없고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엄마에 대한 분노는 엄마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아주 나중에야 깨달았다. 엄마를 미워해서 화난 게 아니라 엄마를 사랑해서 미워했기 때문에 나는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엄마를 왜 정신병원에 넣었어?” “엄마가 되어 가지고 자식 버리고 나가는 게 제정신이야?”

순간 아빠 눈에 살기가 어렸다. “너희들 엄마 없는 자식 안 만들려고 내가.” 그러니까 엄마를 미친년으로 만드는 건 나와 동생이다.

 

나는 평소와 똑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세수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출근하고 일을 한다. 다 해낸다. 여기저기 놀러도 다니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신다. 집에 오면 강아지와 놀기도 하고 빨래를 돌리고 방을 치운다. 하지만 생각의 회로를 잠깐 멈출 때, 집중이 흩어지고 멍해질 때, 문득 뒤를 돌아볼 때, 그곳엔 언제나 우울의 그림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조금만 흔들려도 조용한 밀물처럼 천천히 다가와 나를 잠식해간다. 아무래도 우린 같이 살아야 하는 운명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그것을 떼어내려 애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데 나는 몸에 갇혀 화석이 되어간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많아진다. 그래서 1년 넘게 투병 생활을 했을 때는 거의 매일 글을 썼다. 글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무엇이라도 하기위해서였다.

 

한 편의 글을 쓰면 하나의 허들을 넘은 것 같다. 다음 허들을 또 넘기 위해 나는 계속 쓰는 사람, 쓸 수 있는 몸이고 싶다.

 

저는 예쁘다는 말이 듣고 싶던 게 아니었어요. 저는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었지요. 네가 어떻게 생겨도 너 그대로 괜찮다고요. () 교육활동을 통해 여러 번 몸이 지닌 상처와 고통의 서사를 개방했다. 열린 만큼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졌다. 내가 몸에게 말하기를 허락한 순간 몸이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나로서 살아가는 계단을 하나씩 더 오를 수 있었다.

 

싸우다가 지친 여자들은 죽음 외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싸움을 두려워하는 여자들은 변화를 포기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제대로 치유되려면 제대로 싸워야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싸움은 나를, 내 것을 지키겠다는 선언이다. 이는 나와 내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하며, 싸움을 통해 그 마음 또한 강화된다. 그러므로 결국 치유는 싸움의 원동력이면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불안은 바이러스보다 더 빠르게 전염되었고,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한 낯선 풍경에 사람들은 금세 적응했다.

 

세상이 사랑하는 몸에서 끊임없이 탈락하는 동안, 나는 내 몸이 아닌 세상이 사랑하는 몸을 동경해왔다. () 세상이 사랑하는 몸으로 나를 바꾸기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내가 내 몸을 위해 싸워준다면 언젠가 몸도 나에게서 사랑을 느낄지 모르니.

 

아빠는 나를 사랑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분신을 사랑한 걸까. 무엇이든 사랑이면 괜찮을 걸까? () 그렇다면 나의 치료(완치)를 이해 아빠가 그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고 희생한 것은 나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아빠의 사랑을 다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죽지 않았다. 아니, 나를 죽이지 않았다. 내가 나를 죽이지 않은 건 내가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자살하지 않은 건 삶의 목적이나 이유를 드디어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나를 아껴주고 싶지 해치고 싶지 않다. 나는 나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느낀다. 상담선생님이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거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지금껏 버티는 힘을 키워오면서 얼마나 나 자신을 붙잡고 싶어 했는지 그 간절함을 알아주기 위해, 나는 오늘도 눈을 뜨고 밖으로 나간다.

 

지금은 내 삶의 다른 것들을 다 뒤로 한 채 최고의 치료법과 의료인을 찾아내어 치료 행위에 에넞,를 집중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기에, 치료 외에 다른 방식으로 가능한 한 내 몸을 돌보려 한다. 더군다나 치료 말고도 누릴 수 있는 삶의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는 게 요즘의 나에게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