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비상문(단편소설)』, 최진영, 미메시스, 2021

그루 터기 2022. 4. 14. 05:09

비상문(단편소설), 최진영, 미메시스, 2021

 

우울증, 가장 친한 친구 하나가 오랫동안 고생하는 병이다. 나는 항상 같이 있어주고 싶어 하지만 어떤 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니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항상 살고 싶은 욕망이 별로 없다.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그 원인을 찾아가는 형의 이야기다. 결국 알 수 없는 원인. 살아가는 것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많음을 느낀다. 어느 날 영정 앞에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자주 옆에서 바라본다. 멍하니.

 

 

저자 소개

: 최진영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과 소설집 팽이가 있다. 한겨레문학상, 신동엽문학상을 수상 했다.

 

그림 : 변영근

일러스트레이션과 만화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여러 권의 독립 출판물을 만들었다. 그림이 필요한 다양한 매체와 협업하고 있다. 현재 그래픽노블 출판을 준비 중이다.

 

 

독서 메모

 

사고사나 타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 생각에 집중하다 보면 화가 치밀었다.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 CCTV에 다 찍혔으니까. 카메라에 찍힌 동생의 동선대로 움직여 본 적이 있다. 동생은 혼자 걸었고 혼자 건물에 들어섰고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동생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층이 바뀔 때마다 비상문 표시가 나타났다. 그 표시를 따라 계속 오르다 보니 정말 대피 하는 기분이었다. 그 끝에 희망이 있다는 표시 같았다. 끝에 다다라 비상문을 열었다. 옥상이었다. 그다음엔?

 

동생에 관해서라면 좋은 의미로 시작한 말도 슬픈 방향으로 흘러 질문의 강에 빠져 버린다. 계속 내리막길이다. 957초를 생각하면 괴롭다.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대체.

 

사람마다 시력이 다르듯 존재의 어둡고 습한 부분을 유독 잘 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남들은 찾지도 못하는 얼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남들은 듣고도 들은 줄 모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 감각이 그쪽으로 유별나게 발달한 사람들. 나는 신우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우울증이나 불면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병원에 들러 약을 산다. 의도치 않게 나는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외워 버렸다. 약을 사야할 시기인데도 나타나지 않는 손님이 생기면 혼자 온갖 상상을 한다. 더는 약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회복했으리라 생각하고 싶지만 상상은 매번 나쁘게 번진다. 살아 있으면 좋겠다. 약국에 다시 나타나면 좋겠고, 건강해진 거라면 저 통유리 밖으로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으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

 

동생이 죽은 뒤 안개가 걷히듯 친구들은 조용히 사라져 버렸고, 나는 사람과 친해지려고 애쓰지 않았다. 특별한, 소중한, 친한, 아끼는, 사랑하는…… 그런 존재가 없는 삶을 살고 싶다.

 

장례 첫날 밤 교복을 입은 채 달려온 은호는 장례식장 구석에 검은 비닐봉지처럼 구겨져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거의 울지 않았다. 일단 모든 게 거짓말 같았고, 꿈을 꾸는 것만 같았고, 슬픔은 죄책감에 짓눌려 기척도 내지 못했다. 눈물을 흘려야 할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차라리 잘됐어, 잘된 거야, 그런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체 뭐가 잘됐다는 거야?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지? 울며 슬퍼하는 사람들에게는 연기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태연한 사람들에게는 연기하지 말라고 행패를 부리고 싶었다. 장례식 내내 눈물을 비웃거나 비극에 심취하려는 내 안의 악마와 싸워야 했다.

 

입대한 다음에, 야간 보초 설 때 많이 울었다. 고요한 어둠을 마주하면 신우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악마도 잠들어 나를 조롱하지 않았고, 우는 소리를 내서 누군가를 깨우지만 않으면 아무 방해 없이 오래 울 수 있었다. 신우야 왜 그랬어, 라고 백번 물어보다가 신우야 미안해라고 백번 사과하고, 이기적인 새끼 지독한 새끼라고 백번 욕했다. 까만 허공은 신우 대신 내 질문과 사과와 욕을 받아먹었다. 무섭게 무겁도록 짙어지던 밤.

 

부대 배치를 받고 전화 통화가 가능해진 다음부터는 거의 매일 부모님에게 전화했다. 죽었을까 봐 무서워서. 엄마와 아버지는 20년째 사이가 좋지 않다. 두 사람의 불화는 집 안에 냄새처럼 배어 숨만 쉬어도 느껴졌다. 아주 건조하고 싸늘한 불화. 서로를 무시하고 깔보고 무참하게, 정말 무참하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따위>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서로를 가장 하찮은 존재로 내팽개치려고 결혼한 두 사람.

 

이런 기억이 있다. 열다섯 살에, 겨울이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부모님은 계속 서로에게 신경질을 냈다. 언쟁이 쌓일수록 공기는 차갑고 팽팽해졌다.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서로를 깎아내렸다. 징그럽고 역겨운 불행의 냄새가 온몸에 들러붙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우리 가족의 저녁 식탁에는 아무도 초대하지 않으리라고, 어른이 되고 애인이 생기더라도 절대 이 식탁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으리라고, 신우도 그런 생각을 해봤을까?

 

자살이 어때서. 자기를 죽이는 게 뭐 어때서. 다들 조금씩은 자기를 죽이면서 살지 않나? 자기 인격과 자존심과 진심을 파괴하고 때로는 없는 사람처럼, 죽은 사람처럼, 그러지 않나? 그렇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끔찍할 수 있다. 그럼 죽을 수 있지. 죽는 게 뭐 이상해. 자살이라고 달라?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자기를 위해 죽을 수도 있지. 자기를 구원하는 방법이 죽음뿐인 사람도 있지.

 

죽지 마. 신우야, 죽지 마. ? 신우는 당황하지도 않고 대꾸한다. 왜 죽으면 안 되는데? 아직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난 최신우의 자살을 막을 수가 없다. 네가 죽으면 내가 너무 괴로워. 나는 괴로워도 괜찮고? 죽지 마. 아깝잖아. 너무 아까워. 죽으면 어차피 없는 인생, 뭐가 아까워. 너는 잘 살 수 있어. 잘 사는 게 뭔데. 너는 행복할 수 있어. 다들 행복하려고 안달이지. 난 그게 끔찍해. 신우야, 죽지 마. 일단 살아. 그럼 다 잘 될 거야. 무책임한 소리. 형이 내 미래를 알아? 너도 모르잖아. 모르는데 왜 죽어. 난 알아. 어떻게 알아. 뭘 알아. 네가 신이야? 형은 보면서도 모르지. 인간 진짜 징그러워.

 

어쨌든 죽었어. 죽겠다는 마음을 바꿀 수 없었던 거야. 너도, 나도, 가족들, 친구들, 신우의 모두. 아무도 없었던 거야.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게 있어?

 

짐을 내려놓고 싶은데 짐은 자꾸 더해진다. 알 수 없는 것들이 눈처럼 쌓인다. 얼어서 녹지도 않고 우리를 조심하게 하고, 너무 조심하느라 서로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자기 발끝만 보다가 길을 잃게 만든다. 입술을 너무 물어뜯어 피 맛이 났다. 지쳐버린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허공만 쳐다봤다. 모든 것, 그만하고 싶었다. 뇌를 씻어 버리고 싶었다.

 

말을 좀 제대로 해봐. 됐어. 혼자만 알고 싶은 것도 있는 거야. 그럼 결국 아무도 모르는 게 되잖아. 말로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리는 게 있다고. 내겐 빛나는데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

 

최신우는 나와 함께 어른이 되어야했다. 자기 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미래를 없애는 것. 미래를 거부하는 것. 신우는 그렇게 했다. 신우는 우주처럼 맑았다. 신우의 손톱은 늘 깨끗했고, 신우는 리모컨을 알코올로 닦았다. 신우의 옷차림은 단정했다. 신우는 절대 운동화를 꺾어 신지 않았다. 신우는 입이 더러워진다고 욕도 하지 않았다. 신우가 울 때는 파도 소리가 났다. 신우가 웃을 때는 여름 나무 같았다. 그런 신우는 없어졌다. 하지만 우주에서 완벽하게 없어지는 건 불가능하다. 어른 아니라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다. 빛 같은 것? 빗물 같은 것? 신우는 다른 것이 되고 싶었나? 빛과 빗물은 무수하고 최신우는 하나뿐인데 어째서? 태양과 달은 낮과 밤에 보이지만 한 공간에 있다. 행복도 불행도 한 공간에 있고 그것이 유난히 잘 보이더라고, 우리는 굳이 그것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것 아니라도 별은 무수히 많다. 세상은 점점 더러워지고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네가 어디 있고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도록 복잡해지고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게 우주의 법칙이니까. 그런 세상을 같이 살면 좋았잖아. 네가 거기 있어서 내가 여기 있다고 서로의 방향을 헤아려 주면 좋았잖아. 너를 보면서 나를 확인할 수 있으면, 같이 비를 맞았으면 좋았을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