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 』, 이승희, 폭스코너, 2021

그루 터기 2022. 5. 11. 05:07

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 , 이승희, 폭스코너, 2021

 

 

저자 소개

이승희

경향신문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후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등을 냈고, 몇 권의 동화집을 펴냈다. 지금은 대학과 예술고등학교에서 동화와 시를 가르치고 있다.

식물들에 대해 잘 모른다. 식물들도 나를 모른다. 그렇게 식물들과 나는 날마다 모르는 일에 진심으로 열중이다. 서로 좋아하니 괜찮다.

 

 

독서 메모

 

식물은 숨어 있기 좋은 방이었다.

 

나의 삶은 근사하지 못했다. 대체로 견디는 쪽에 서 있었다. 나 없이도 세계는 날마다 환했고, 나 없음이 더욱 선명해지는 그런 날들을 자주 바라보았다.

 

괜찮다. 괜찮아진다. 언제나 그렇게 말하는.... 연두는 그런 힘이 있다.

 

그런 날 작은 화분에 담긴 더 작은 식물 하나를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 몇몇은 죽었고, 몇몇은 아직 내 곁에 남았다. 내 기억 속의 식물들은 대부분 그렇게 내 생의 기록과 같다. 하나의 식물 속에는 그 식물을 데려올 때의 마음과 데려오려고 마음먹게 한 어떤 사연들이 있다. 그래서 내가 키우는 모든 식물들은 대부분 어느 날의 내 마음들이다.

 

식물을 키우면 식물에게 말없이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위로일 수도 있을 테고, 슬픔의 모양일 수도 있을 것이며, 그냥 일상이 가득한 우리 삶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돌봐준다는 건 나 역시 돌봄을 받는다는 말에 다르지 않다. 무엇인가에 마음을 준다는 것은, 그렇게 마음의 흐름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둘 사이에 시냇물 같은 게 생기는 거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일도 그렇게 식물처럼 어떤 모양을 만들어가는 일 같다. 어떤 절망을 만나 반쯤 죽어서 한 가지를 잃고, 휘어진 채 다른 가지로 일어서거나, 몇 해째 꽃 피우지 못한다 한들 살아있으면 그것으로 제모양을 만들어갈 수 있다.

 

모든 엇갈림으로 쌓아가는 세계. 엇갈림을 균형과 화해로 키워가는 지혜. 하나의 잎을 엇갈려 내거나 나란히 내거나 그다음, 그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잎이나 가지들은 그렇게 빈 곳으로 제 모든 손을 내밀어 모양을 만들어간다. 식물이 성장한다는 것은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새로운 끝을 내어 제 모양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렇게 식물이 만들어내는 모양은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건축물이다.

 

여기에 더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은 일요일 한낮에 거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식물들과 함께 라디오를 들을 때다. 거실 문을 열면 손바닥만 한 마당이 있는데, 그곳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물론 비까지 와준다면 세상 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 시간이 된다. 식물이 담배 냄새는 좀 싫어라 하겠지만 뭐 이건 어쩔 수 없다. 같이 살면 싫어도 좀 참아줄 것도 생기는 법이니까. 그리고 나도 식물한테 그렇게 참아주는 것도 있으니까.

 

살아가면서 받는 세상의 상처는 누구나 있다. 그런 날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내게 말 걸어주지 않기를 바란다. 위로는 날 더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한다고 나는 믿고 살아왔다. 그래서 그냥 못 본 척 내버려 뒀으면 싶다. 식물들은 어찌 아는지 내게 절대로 말을 걸지 않는다.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짐짓 딴짓을 한다. 그러니까 고개를 돌리고 뒷짐을 지고 제 발등이나 주무르면서 딴 데를 보는 것이다.

 

몇 년 전 봄에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전까지 살고 있던 집에서는 식물이 살아남지 못했다. 햇살도 없고 바람도 통하지 않는 집이었으니 당연할 수도 있겠으나, 햇살과 바람 없이 그나마 살 수 있는 식물들조차도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식물이 살 수 없는 집에서 살기 싫었다. 그냥 좀 슬프기도 하고, 그럼 난 누구랑 살아야 하나 생각하다가 무조건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기로 하고 집을 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만난 집이 지금의 집이다.

 

화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대부분 다 화분에서 자라고 있다. 그러니까 언제든 지금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녀석들이고 실제 그렇게 언제든 갑자기 누군가의 손에 들려 낯선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니까 얘들도 여기가 집이 아니고, 여기는 그저 잠시 지나치는 곳일 뿐이다.

 

좋든 나쁘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은 일단 한번 오면 쉽게 사라지질 않지만, 격렬하게 가슴을 치고 간 후에는 마음이 바닥을 긴다. 나는 여기 있고, 나는 또 여기 없어서 살고 있느냐고 가만히 질문해보는 그런 시간들 말이다. 딱히 뭔가 슬퍼야 할 일이 없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방향, 그런 결을 생각하면 그렇게 한번 기울어진 마음이 도통 다시 세워지지 않는 것이다. 뭐 그럴 땐 별 수 없다. 애쓰지 않고 그냥 쓰러진 마음을 가만히 바라볼 밖에.

 

생각해보면 식물과의 교감이라는 것도 그렇다. 사소함이 모여 생활을 이루는 것처럼, 조금씩 쓸쓸한 마음이 모여 어딘가에 닿는 간절함이 되는 것처럼, 식물과 나는 아무 말이 없어도 혹은 함께 죽자고 말하지 않았어도 날마다 보내는 사소함이 꽃을 피우고 마음 따뜻해지는 결이 된다. ‘이라는 말은 얼룩이나 흔적이 담아낼 수 없는 고요하고 따뜻함이 느껴지는 온도 같아서 좋다. _

나는 '꽃밭'이라는 말이 좋다. 누구의 밭도 아닌 ''의 밭이라니. 그러니까 거긴 온전히 꽃들의 집, 식물들의 집이라는 말이다.

 

식물의 연두색을 나는 정말 사랑한다. 그게 어떻게 보면 오래 부딪힌 흔적이 만들어내는 마음 같고, 언제나 따뜻한 쪽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한 번쯤은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걸어 가보고 싶다. 또 다른 폐허가 있을지라도 원망하지 않을 마음이 있으니 괜찮다.

 

화단의 식물들은 내게 그렇게 말해준다. 눈감아주자. 가르침 따위 주지 마라. 그래도 더는 멀어지지 말자. 오늘을, 우리가 또 하루를 살았다고 쓰고 마침표까지 찍고 이제 함께 살자. 눈감아주고, 예뻐해주고 아름다운 약속이 되자고.

 

세상 어딘가에 해마다 피어 있을 그 꽃들은 나를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내가 기억하니까 괜찮다. 이제 지금 마당에서, 거실에서 살아가는 꽃들은 내게 그런 기억이 되어가는 중이다. 오늘 내가 고단했을 때, 오늘 내가 아팠을 때, 서로 바라보며 아무 말도 못하던 날들. 꽃들의 주변을 서성이며 혼자 노래를 부르고 슬프게 춤을 추던 모습. 나는 주고 식물은 받고, 또 식물은 주고 내가 받았던 혼잣말들. 내 마음의 나이테에 얼룩처럼 자라고 있는 거니까.

 

사막의 어느 식물들은 이 기간이 맞지 않으면 백년도 기다린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 년 후 그런 환경에 맞는 시간이 오면 그 때 비로소 발아를 시작한다는 말이다.

 

채송화 씨앗은 참 작다. 가만히 보면 은빛이 살짝 나기도 하는 아주 작은 씨앗이다. 하지만 모든 식물의 씨앗에는 모체를 생산할 때 필요한 모든 유전 정보가 그 안에 담겨 있다. 더불어 스스로 성장할 힘을 얻을 때까지 살아갈 영양분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채송화 씨앗에는 채송화의 우주가 담겨 있다.(...) 너무 당연하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그 우주에 대해 상상해보시길. 그러면 그 작은 씨앗 하나는 감동이 된다. 물론 이런 경우는 많다. 마당에 버려진 썩은 감자에서도 싹이 나고, 먹고 버린 과일의 씨앗에서도 싹이 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버틴 것에 대한 결과다. 그리고 꽃은 지지만 연두는 지지 않는다.

 

파는 자라면서 빈속을 빈 것으로 꽉꽉 채워가고 빈속의 힘으로 비로소 파꽃을 밀어낸다. 파꽃이 피는 것은 그렇게 빈 것이 밀어내는 힘 덕분이다. 내가 사랑한 만큼의 절반도 세상이 날 사랑하지 않아서 쓸쓸할 때 나는 파꽃 앞에 서 있다.

 

세상의 주목 따위 말고도 가득 차오르는 것들. 이것이 생의 중심이다.

 

세상으로부터 지워진 내 이름도 어디쯤에서 비처럼 내릴까. 흐지부지 늙어가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나는 이제 더이상 이해받지 못한 열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 아이는 죽어가는 동안에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하지 못할 상황이 되어서야 잎이 말라버리는데, 그땐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왜 아무 내색이 없었을까? 그야말로 버티고 버티기만 하다가 어느 끝에서 그만 툭 놓아버렸을 마음을 생각하면, 또 그렇게 나를 떠난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들도 그랬을까.

 

뭔가를 꼭 같이하지 않아도 함께한다는 것. 그런 시간을 함께 살아낸다는 것. 우리가 식물을 키우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테니.

밤의 식물들은 또 다른 근사함이 있다. 신비롭다. 소설적이거나 시적이기보다는 확실히 동화적이다. 특히, 겨울이 다가올 무렵이면 월동이 가능한 몇 나무들을 제외하곤 모든 화분들을 집 안으로 들여오게 되는데, 요맘때 집은 그야말로 환상이다. 좁은 공간 탓에 두세 줄로 늘어선 식물들을 보며 샛길을 걷듯 요리조리 내 몸을 돌려서 가는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밤이 되면 비로소 환상이 시작된다.

 

때로는 그렇지, 아니 내 삶의 대부분이 그랬지. 삶이라는 것이 결국 지리멸렬한 반복의 연속이라는 거. 비우지도 채우지도 못한 채 멈추어 풍경이 되고, 기억이 되고 무늬가 되어가는 삶의 결에 대하여 통속이 아니면 뭐가 진짜 아름다운 것일까 생각해본 적이 있지.

 

명랑이라는 단어는 사실 나와 아주 먼 말이다. 너무 멀어서 지금도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다. 하지만 이들 삼 형제를 통해 만나는 이런 명랑은 나의 우울을 달래주는 더없이 가까운 친구이다. 특히, 스킨 종류와 달리 잎사귀가 길어지는 덴드롱은 어떤 무늬도 없이 오직 연한 연두로만 길어지는데 한번 만나면 절대 헤어지지 못할 반려식물이다.

 

당신은 당신에게 좀 더 다정해도 돼.

 

사람들은 마음을 다치면서도 어떻게든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어떻게든'조차 어쩌지 못하고 함께 데리고 산다. () 그렇게 그 '어떻게든'의 시간을 살아내는 동안 식물들은 말없이 곁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시간 속을 가끔 함께 걷는다.

 

모든 사이가 그렇다. 너무 애쓰지 않았으면 한다. 너무 애쓰면 지치니까.

 

이런 건 다 식물을 키우면서 든 생각이다. 식물은 즉각적인 움직임도 없고, 매일의 드라마도 없고, 매일의 이야기도 없다. 한 계절쯤은 흘러야 이야기도 할 게 있고, 한 일년 쯤 지나야 기억할 무늬도 생긴다.오래 두고 바라볼 대상이니 너무 애쓰지 말고 바라봐야 한다. 어떤 날은 아주 없는 듯, 마치 식물로부터 잠시 놓여난 것처럼 식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밤새 글쓰기 작업을 하고 아침이 밝아올 무렵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바라보는 식물들, ‘너희들도 밤새 이렇게 깨어 있었구나싶어서 그 연대감에 울컥한다. ‘거지 같은 세상 망해버려라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절에도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봤을 테고, 며칠이고 잠만 자는 나의 게으름도 묵묵히 지켜봤을 테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 때도 거기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니, 어쩌면 이 식물들이 고스란히 나를 증거하는 알리바이인 셈이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나이테 같은 무늬가 생겼을까 싶은 것이다.

 

행복... 그런 말은 너무 낯설고 ,내 것이 아닌지 오래고, 이물감 최고인 말일뿐이다. 그래도 화단에 식물들을 보면, 다알리아를 보면 마음이 조금 놓인다.

 

식물들 중에는 그런 식물들이 꽤 있다. 대부분의 난도 그 중 하나이며, 소나무도 주변 환경이 위태로울 때 가장 많은 솔방울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어떤 식물들은 제가 가장 위태로울 때 꽃을 피우는 셈이니, 꽃 피는 괴로움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꽃 피우는 일이 괴로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대로 괴롭고 슬프니 내가 보인다는 말도 맞겠다. 또 생각해보면 시를 쓰는 사람들도 좀 그렇기도 하다.

 

살면서 들었던 죽고 싶었던 마음들, 저 구름을 밀어올린 무심한 마음들, 나 없이도 더없이 아름다울 세상들, 이제 어떻게 살지, 라고 웅성거리는 모든 것들과 노래가 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속수무책 무장 해제된다.

 

몬스테라를 보면 가끔 슬픈 짐승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기린처럼. 이제 지구에 살지 않는 공룡 같은. 난 왜 그런 아이들이 이렇게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몬스테라는 끝없이 자라고, 기린도 날마다 자라고, 나는 날마다 더 높은 지붕을 올리면서 살아가는. 슬프고 행복한 꿈. 그런 거.

 

실제적으로든 문학적으로든 일상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방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며 무늬가 되고 있다. 일상을 살아 있게 만드는 힘, 그것과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그 삶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힘,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세계와 대화하는 일, 그 대화를 통해서 일상의 이면을 드러내고 우리 삶의 의미들을 따뜻하게 만져주는 일, 그리하여 끝내 이 삶을 당신도 사랑하라고 말해주는 일. 올리브나무는 내게 그런 느낌이다.

 

모든 오해와 왜곡, 모든 절망과 희망도 관계에서 비롯된다. 나 그리고 나 아닌 모든 것과의 관계. 내가 오늘을 살기 위해 관계 맺은 것들 속을 순환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그 관계망 속을 거미처럼 돌아다니는 일. 그것이 우리가 부르는 생활이고 삶이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관계는 생겨나고 죽을 때까지 그 관계망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때로는 단 하나의 관계를 통해 절망하고 희망을 얻기도 한다.

 

내 마음에도, 몸에도 그런 마디가 좀 있다. 물론 그런 마디가 있음에도 여전히 똑바로 서 있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마음이란 참 그런 것이어서 수시로 낭떠러지가 되기도 하고, 난간이 되거나, 며칠씩 집 나가 돌아오지 않기도 한다.내 것인 것이 어찌 이리도 내 것 같지 않을 때가 많은지. 하지만 그렇게 마음의 한 끝이 난간이 될 때 나는 또 그만큼 어디로든 깊어진다고 믿는다. 끝을 가본다는 것도 그런 것은 아닐까 싶다. 마디는 그럴 때 조금씩 자란다.

 

어떤 식물은 햇볕이 많아야 하고, 또 어떤 식물은 물을 자주 주거나 자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등등의 조언들은 사실상 우리가 식물과 함께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두려움을 갖게 한다. 그런 조언이 무시될 순 없지만 일단 함께하는 게 중요하고, 어느 정도는 식물 스스로의 생명력을 믿어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굳이 말하지 않고, 묻지 않아도 꽃은 핀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그러나 그냥 둠은 버려둠이 아니라 거기 그냥 둠으로써 끌어안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끌어안음은 굳이 스스로 열렬하다고 소리치지 않아도 깊고 따뜻하다.

 

이 아이는 내 순간의 마음들과 상관없이 늘 든든하다. 그런 아이다. 그래서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다정하다. 함께 살아서 행복하다.

 

 

 

 

 

 

출처 :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