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그루터기의 일상사

백수의 행복한 오후

그루 터기 2021. 5. 3. 17:14

  우리집은 아파트 11층이다.

5년 전 큰 집을 정리하고 두 식구가 살기 딱 좋은 집으로 이사할 때 제일 우선으로 생각했던 것이 조망이었다.

지난 번 살던 집은 처음 이사 갔을 땐 그래도 북한산도 보이고 남산도 보이는 그런 집이었는데 오래 살다보니 주위에 높은 빌딩이 들어서서 보이는 건 아파트 벽과 남의 집 창문뿐이었다.

 

  다행이 지금 이사온 집은 한강뷰나 북한산 뷰 같은 멋진 곳은 아니더라도 이곳에서는 제법 조망이 좋은 집이다. 아파트단지 제일 뒤쪽에 위치한 집이라 뒤쪽 창문으로는 아파트 둑방 숲길도 보이고 건물 사이로 북한산도 살짝 보인다. 특히나 앞쪽 발코니 창문으로는 어린이 놀이터와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이 내려다 보여서 정말 좋다. 공원 건너 아파트는 전부 5층인 저층 아파트라서 뻥 뚫린 전망이 최고인 집이다. 요즈음 같이 꽃이 만발하는 계절에는 아침마다 창문을 내려다보면서 공원에 피는 꽃을 감상하는 것이 작은 행복이다. 봄꽃은 종류는 참 다양한데 대부분 일찍 피고 일찍 지는 것 같다. 벚꽃과 목련이 피는 것 같았는데 소문없이 앵두나무 꽃과 은행나무 꽃이 다녀가고 어느새 수수꽃다리와 연산홍이 절정을 넘어섰다.

  엊그제 부터는 마로니에 꽃과 이팝나무 꽃이 한창이다.

뒷창문 쪽 아카시아도 이제 한 두 송이씩 피는 걸 보면 금방 아카시아 향이 진동할 거다.

맑은 날 오후에는 거실 창문을 열어두면 작년 년말에 새로 치장한 어린이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애들의 소리가 11층인 집까지 시끄럽지 않을 정도로 들린다.

 

  아름다운 백수가 된 이후에 맞는 첫 번째 봄은 그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여러 가지들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작은 꽃 하나, 애들의 떠들고 노는 소리 하나하나가 정겹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집에 혼자 있어서 참 조용한 날이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고, 새로 빌려온 책을 보기도 하고, 짬짬이 시간내어 블로그도 확인하고, 집사람이 키우는 다육이를 보기도 하고,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놀이터의 애들 모습을 한참이나 보고 있다 보면 그동안 정말 바쁘게 달려왔구나 생각이 든다. 베이버붐 세대는 필연적으로 경쟁의 연속일 수 밖에 없고, 베이버붐 세대의 중간에 있는 우리로서는 피할 수 없는 여정이리라.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실패하지도 않은 정말 중간쯤의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어쩜 가진 것을 지켜야하는 상류층도, 현재 상황을 탈출해야하는 빈곤층도 아닌 그 중간쯤인 중산층이 더 행복한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늘은 작은 방에 있는 책상과 노트북을 꺼내 거실 창문앞에 두고 아름다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블로그 글들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바깥의 풍경과 애들의 놀이 소리에 집중력이 떨어지겠지만 그 또한 어떠랴 백수의 하루가 그냥 지나간들 누가 뭐라고 할 건가.

 

  편안하고 행복한 오후가 좋다.

 

  오늘이 참 좋다.

 

 

 

 

 

지금 이시간 거실에서 내려다본 단지내 공원과 놀이터 & 베란다 난간에 걸어 키우는 다육이

 

 

 

나른한 오후를 즐기는 나의 벗 노트북 형제와 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