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박완서 외, 한길사. 2015

그루 터기 2021. 12. 29. 07:25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박완서 외, 한길사. 2015

 

에세이 위주의 독서를 하다 보니 책 고르기가 쉽지 않다. 소설의 경우 소문난 책이나 작가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만 해도 한동안 열심히 볼 수 있을 거다. 요즈음 내가 찾는 책 고르는 법은 일단 유명한 소설가나 시인들의 에세이를 고르는 거다. 소설가나 시인들께서는 많은 글들을 쓰시다 보니 에세이에서도 문체가 아름답고, 고민을 많이 한 흔적들이 그대로 나타가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에세이만으로 60대 후반에 접어드는 나에게 눈물을 찔끔 거리게 하는 분도 많지만 말이다. 오늘도 박완서 석자만 보고 책을 골라왔다. 그 외에도 이름만 들어도 반가운 작가님도 많다.

 

 

저자 소개

이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없다 - 박완서
전주 해장국과 비빔밥 - 최일남
어머니를 위하여 - 신경숙
묵밥을 먹으며 식도를 깨닫다 - 성석제
밥으로 가는 먼 길 - 공선옥
음식에 대한 열 가지 공상 - 홍승우
초콜릿 모녀 - 정은미
나베요리는 한판 축제 - 고경일
요리, 요리를 축복하라 - 김진애
바나나를 추억하며 - 주철환
에스프레소, 그리고 혼자 가는 먼 길 - 김갑수
줄루는 아무 거나 먹지 않아 - 장용규
투박한 요리 요정 나의 어머니 - 박찬일

 

 

독서 메모

 

성공하면 행복하지만 행복하다고 성공한 것은 아니다. 행복은 타고난 것일 수도 있지만 성공에는 시련의 과정이 필수다.

 

강된장과 호박잎쌈 (박완서)

샐 지은 밥을 강된장과 함께 부드럽게 찐 호박잎에 싸 먹으면 밥이 그냥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 진다. 그까짓 맛이라는 것, 고작 혀 끝에 불과한 것이 이리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 맛은 반세기도 넘어 전의 소박한 방상뿐 아니라 뭐든지 덩굴 달린 것들은 기를 쓰고 기어 올라가던 울타리와 텃밭과 장독대뿐만 아니라 마침내 고향에 당도했을 때의 피곤한 안도감까지를 선연하게 떠오르게 한다.

 

만화가 홍승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따뜻한 밥상을 생각했다. 하지만 출근 시간이 너무 늦었다. 아침을 거른다. 젠장 먹고 살기 힘드네. 우리는 먹고살기위해 먹는 것을 포기하면서 산다.’

그러게요 먹고 살기 위해 아침도 거르고 급하게 출근하는 모습이 눈에 선 합니다. 먹고 삽시다.

 

다시는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이 있다 그런 음식에는 그만한 사연들이 들어있다. 아버지는 청국장을 드시지 않는다. 사업에 실패하고 여관을 전전할 때 한 동안 드셨던 음식이 청국장이다 음식은 기억이다.

나도 그런 음식이 있을까? 나도 내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분노에 차 있었을 때가 있었다. 그 때 먹었던 음식을 한동안 먹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잘 먹는다. (사실 건강 때문에 무조건 먹지는 않지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릴 때 수없이 먹었던 보리밥과 칼국수(호박만 썰어넣은 안동칼국시 같은) 그리고 늙은 호박죽 같은 건 지금도 별로다.

 

음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진실 된 사랑은 없다.

 

밥으로 가는 먼 길(공선옥)

산 짐승들은 세상에 딱 한 가지씩만 먹고 살기 때문에 죄 없는 짐슴소리를 듣지 않는가.

밥 한 그릇을 얻기 위하여 , 그 얼마나 비굴해지는가. 그 얼마나 남루해지는가. 그 얼마나 치졸해지는가, 그리하여 나는 오늘 내가 먹은 이 밥 한 그릇은 당당함으로 얻은 밥인가. 비굴함으로 얻은 밥인가. 붇게 되는 것이다. 아니다. 그보다 앞서, 어렵게 얻은 밥인가. 쉽게 얻은 밥인가. 절로 붇게 되는 것이다.

내가 오늘 아침에 먹은 밥은 최소한 비굴하게 얻은 밥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다 당당하게 노동하고 번 돈으로 먹는 밥이라 다행이다.

2021. 9. 17, 김예림, 그을린 얼굴로 웃기가 왜 이렇게 어렵지, 포도밭출판사. 2021

 

20대 작가님이라 그런지 나와 생각이 바른 부분이 꽤 있었다. 그러나 나도 이젠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살아온 세상과 지금은 많이 변했고, 달라져야 한다. 이제 그들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어야 한다. - 그루터기 생각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페미니즘은 내 세계를 바꿨다. 이 책은 내가 대학에 갔다면, 서울에 살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며 쓴 글을 모은 것이다. 페미니즘 에세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선 자리에서 바라본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서문에서

 

페미니즘 이어 말하기

페미니즘 :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던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며,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의 권리와 주체성을 확장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이론 및 운동을 가리킨다. 성에 기인하는 차별과 억압으로 부터의 해방을 주장한다. 여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정치적 운동과 이론들을 아우르는 용어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자국이 남아 있는 존재라고 했다. 내 타고난 생김새, 편한 옷을 자주 입는 나, 맨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상태를 좋아하는 나, 특별한 날에는 세련된 옷을 입고 구두를 신는 나, 바쁘고 힘들 때는 곱슬머리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도 개의치 않는 나의 존재에도 누군가의 자국이 남아 있다. 내가 아름답지 않아서 내게 첫눈에 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체념할 때마다 다시 내 겉모습을 사랑하게 하는 것도 탈코르셋이 아닌 누군가의 자국이다. 내가 어떤 자국을 가장 사랑했는지, 어떤 자국을 내 일부로 남겨두었는지 떠올려보면 내가 매일 여성적 아름다움을 장착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해주었던 이들의 손길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쉽게 자각한다.

 

낙태 말하기 행사에 참석해 자신이 낙태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을 말하는 스타이넘은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그것(낙태)은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으로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말해야겠다. (중략) 나 스스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그때가 처음으로 내가 내 인생에 책임을 지게 된 때임을 알았다.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나도록 가만히 앉아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나는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할 것이었고, 따라서 내게 낙태는 긍정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지난 시간 동안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어렵고, 무겁게 느껴지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섣불리 내 이름 앞에 붙일 수 없었다. 책으로 수많은 페미니스트를 만나면서도 왜 몰랐을까. 페미니즘은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은 모든 사람을 호명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페미니즘에서 도망치는 대신에 페미니즘의 힘을 주장하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지 상상해보세요라는 게일 피트먼의 말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나는 책을 덮고, 눈물을 닦고, 오늘에서야 뒤늦은 선언을 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그녀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 P. 26 할아버지는 암게 딱지 속에 든 고약처럼 새까만 게장을 당신 젓가락 끝으로 꼭 귀이개로 퍼낸 것만큼 찍어서 밥숟가락 위에다 얹어주시곤 했다. 아, 그 맛을 무엇에 비길까. 그건 맛의 오지, 궁극의 비경(秘境)이었다. - 박완서
  • P. 46 요컨대 음식의 궁극적인 맛은 만드는 자와 먹는 자의 합작품이다. 그러나 만드는 쪽의 정성스런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 - 최일남
  • P. 61 마당에 눈이 폭폭 쌓일 때 아랫목에 발을 뻗고 앉아 문종이에 비치는 눈그림자를 보며 얼었다가 녹은 찹쌀 새알심을 깨물어먹는 맛. 그 싸함과 쫀득쫀득함을 뭐라 해야 할는지. - 신경숙
  • P. 82 넉넉하게 썰어 넣은 묵밥 위에는 김과 썬 김치가 고명으로 얹혀 있었다. 묵밥을 먹기 전에 맛본 동치미는 약간 짜고 또 썼다. 덮어놓고 입에 달라붙는 공연한 애교가 없어서 좋았다. - 성석제
  • P. 93 적막한 가을 한낮, 어머니와 홀태에다 산두쌀 훑던 날, 내가 먹은 것은 소금물에 담가 떫은 맛 우려낸 땡감 몇 알. 그래도 곧 쌀이 생긴다는 생각에 산두쌀 훑는 날은 배고프지 않았다. - 공선옥
  • P. 108 밤에 마시는 커피. 밤새 뜬눈으로 보낼 것을 알면서도 나는 밤 10시에 독한 커피를 마신다.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말이다. - 홍승우
  • P. 129 엄마도 나도 달콤한 기억만으로 초콜릿에 집착한 것은 아니다. 우리 초콜릿 모녀에게 초콜릿은 불안과 집착, 열정을 다스리는 유용한 마약이었던 셈이다. - 정은미
  • P. 140 그날의 ‘축제’에 나를 초대한 이유는 ‘입’과 ‘눈’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사람’이 함께했을 때 음식의 맛이 더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고경일
  • P. 147 요리란 몸으로 익혀지는 예술이다. 체험과 훈련과 도전이 요건이다. 얼마나 맛있게 먹으며 컸나, 얼마나 많이 해봤나, 그리고 얼마나 도전해봤나, 이 세 가지가 관건이다. - 김진애
  • P. 166 내 평생 처음 먹어보는 바나나였다. 돌아오면서 먹는데 입에서 살살 녹는 맛이었다. 고모에게 남은 껍질을 보이며 ‘나 오늘 바나나 먹었다’고 자랑했더니 빙그레 웃으셨다. - 주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