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그루터기의 일상사

나는 오늘 <아주 나쁜 시아버지>가 되었다.

그루 터기 2022. 1. 25. 08:58

나는 나쁜 시아버지인가?

 

    저의 이 블로그  <그루터기의 일상사> 게시판에는 2021. 6. 26 . 에 올린 <결혼하는 아들 며느리에게 시아버지가 쓴 편지(첫째 아들 며느리)> 라는 게시글이 있다.

(결혼하는 아들 며느리에게 시아버지가 쓴 편지(첫째 아들 며느리) (daum.net))

 

    이 글은 우리 예쁜 새아가!’ 라고 며느리를 정답게 부르는 말로 시작한다.

나는 이 게시판에 올린 것처럼 큰며느리가 우리의 가족이 되는 첫날 며느리의 호칭을 새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책을 읽다보니 그 말이 문제가 많은 호칭이라는 글을 읽게 되었다. 문제가 많다는 표현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를 동등한 관계가 아닌 한국 사회에 강력한 규범으로 존재하는 고부관계의 모델이라고 혹평했다.

 

억울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아니 변명을 하게 되었다.

 

 

 

오늘 배윤민정 작가님의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를 읽었다. (아직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책 내용 중에( p125~) '새아가'에 대한 의견이 실려 있다. 충격이었다.

'내가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니? 내가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 아둔한 인간이었어?'

순간 자책감에 젖어 잠시 책을 덮었다.

 

 

이런 글이었다.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을까

 

     두현 아버지의 메일에서 '새아가'라는 낯선 호칭을 보고, 나는 한국 사회가 원하는 며느리상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두현은 내 부모님에게 '새아가'로 불리지 않는데, 왜 나는 시가에서 '새아가'가 되는 걸까? 이 말에는 며느리는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어른이 가르치고 품어줘야 한다는 정서가 깔려 있었다. 며느리는 아이가 부모를 따르듯 시어른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도 엿보였다. 자애로운 시어른과 순종하는 며느리. 이것은 한국 사회에 강력한 규범으로 존재하는 고부 관계의 모델이었다. 나 역시도 이 규범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나도 젊은 마인드를 갖기 위해 애쓰며, 그리고 사회적 평등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애써 페미니즘에 관련된 책들도 열심히 읽고 있다 (사실 재미는 별로 없는). 아직까지 머리로는 이해 되지만 가슴으로는 잘 안 되는 사회적 소수자인 동성 간의 결혼(레즈비언 & 게이)이나 다자간의 결혼(폴리아모리), 결혼 없이 동거만 하는 생활(비혼 동거), 비건(채식:비육식) 주의자, 특정 종교 등과 같이 사회적 소수자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그분들이 쓴 책들도 꾸준히 읽고 있다. (읽기만 한다고 다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은 한다.)

 

     또 오랜 유교 사상으로 가정이나 가족 간 잘못 인식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관습에 대해서 고쳐나가고자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편이다. 오늘은 그런 노력들이 괜히 허망하기도 하다.

 '그냥 하던 대로 살아' 라며  또 다른 내가 자꾸만 나를 구박을 한다.

 

     나는 큰 아들 결혼식을 작은 결혼식으로 했다. 친구나 회사, 동창들, 거래처 등에 전혀 알리지 않고, 결혼 당사자와 사촌 이내의 가족들만 모시고 치뤘다. 작은 아들 결혼식에도 큰아들 결혼식 기준에서 추가로 나와 가장 친한 최소한의 친구만 초대했다. 결혼식이라면 당연했던 혼수와 예물을 일체 없애고, 폐백도 없앴다. 30여년이 지난 아버님 장례식 땐 기억이 나지 않지만 결혼초기에 직장동료와 친구들에게 연락을 한 것으로 기억되나, 10여 년전 어머님 장례식 때도 모두들 연락하는 회사 거래처와 초, , , 대학교 동창회, 향우회 등등에 일절 연락하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연락 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오셨다.)

이제 남은 나의 노후와 장례식도 웰다잉을 생각하고 있다. 이건 아직 지나간 일이 아니고 다가올 일이라서 자신있게 말할 수 없지만 연명치료거부와 시신기증, 간소하고 슬프지 않은 장례식을 소망하고 있다.

 

내 변명이 너무 길어진 것 같아 어색하다.

 

그렇다.

나는 작가의 이 주장에 대해서 만큼은 동의 할 수가 없다. '새아가'란 단어를 결코 그런 의미로 쓰고 싶지 않았고 쓰지도 않았다.

 

     작가의 주장대로 '시어른이 가르치고 품어줘야 한다'는 정서가 나쁜 것도 아닐뿐더러 시부모와 며느리 관계 외에도 사회경험이 많은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조금은 연륜이 부족한 며느리에게 가르치고 품어줘야지. 매사에 잘 잘못을 따지고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 부모가 볼 때 자식은 평생 어린애 같고, 걱정스러운 존재라는 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아흔의 노모가 칠순의 아들에게 차 조심하고, 밥 잘 먹고 다니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도 잘못되었다고 해야 하는가?

 

 

 

     내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사용했던 새아가라는 단어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니 가슴이 답답하다.

     사실 나는 새아가라는 호칭에 대해 며느리에게 먼저 물어봤었다.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단어가 새아가라는 단어였고, 남들이 하는 그 호칭이 부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결혼 상견례 때 결혼당사자와 양가 부모님이 마주한 자리에서 그렇게 불러보고 싶다고 했었다. 그때 예비며느리가 예비시아버지 앞에서 안 된다고 말하기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흔쾌히 "저도 그 말이 좋아요 아버님!" 하던 며느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이후로 새아가라는 단어를 적당히 쓸 기회가 없어서 써보지 못했지만 지금도 그 단어가 참 좋고 써보고 싶다. 작가가 이야기한 며느리는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도 아니다. 특별히 너는 내 아래것 이라는 생각을 해서 사용한 호칭이 아니라 귀엽고 사랑스워서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난 딸이 없다. 그러나 딸이라고 말하기는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사돈 내외분이 계시는 그곳에서 내 딸이라니.)

이젠 새아가란 단어도 어색해서 쓸 일이 있을까 모르겠다.

 

 

요즘 며느리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른다.  처음 며느리에게 이름을 부르는 큰형수님을 이해를 하지 못했었다. 다큰 남의 집 자식을 데려다 이름을 막 부르다니!!! 선비의 고장 출신 나에겐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 처럼 비춰졌었다. 그런데 이젠 나도 이름을 부른다. 다른 적당한 말보다 쉬워서일까? 다른 적당한 말이 없어서 일까?

아직은 손자 이름을 앞에 붙이고'ㅅㅇ엄마' 라고는 어색해서 불러보지 못했다.

 

결혼식 이후 더 이상 새아가라는 호칭을 사용해 보지 못하고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작가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는 못 붙이겠다.

 

혹시 '님'자를 붙이지 않고 이름 부르는 것도 '며느리는 미숙한 존재이고 함부로 해도 되기 때문 이라는  정서가 깔려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불안하다.

 

왜 이렇게 억울하지? 

 

! 나는 보수 꼴통인가......

 

 

 

큰 며느리가 친구를 만나러 가라고 하루 종일 손자 봐주러 가는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글을 맺는다. 

 

두 달 전

"아버님!  저녁에 목공 교육 끝나고 둘이서 맥주 한 잔 해요. 제가 쏠께요" 하던 며느리 생각도 난다. 

그 날 둘이서 한 잔 하며 두어 시간 동안 한없이 행복하고, 서로를 자랑했던 시간들이 같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