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취미생활과 일상사/독서 메모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김현경, 푸른사상, 2021

그루 터기 2022. 2. 10. 06:50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김현경, 푸른사상, 2021

 

설날을 앞두고 7권의 책을 빌려왔다. 설 휴무 때 쉬엄쉬엄 볼 생각으로 빌린 책들이다. 아침에 도서관을 다녀온 후 하루 종일 붓글씨 연습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서야 책을 폈다. 일단 에필로그부터 한 권씩 읽다가 자석에 끌리듯 이 책을 선택했다. 잠을 일찍 자기로 한 약속 때문에 조금만 읽고 내일 보려고 했던 책을 결국 놓지 못하고 12시를 넘겨 버렸다.

해방 전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격은 세대의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애달프다. 그 시대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던 죽음의 공포와 생존의 문제가 글을 읽으면서 아려오고, 쉽지 않았던 생활에 연민의 정을 느낀다. 지금은 이렇게 담담하게 글로 옮길 수 있었겠지만 그 시절에는 어땠을까? 생각하기가 겁이 날 정도다. 나는 다행히 한국전쟁이 끝나고 태어난 전후 세대이기 때문에 배고픔에 대한 기억 외에는 생존이 공포는 잘 모르고 자랐다고 할 수 있을 거다.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작가. 나는 김수영 시인을 잘 모른다. 옛날에는 시집만 옆에 끼고 다녔었는데 언젠가 부터는 수필집만 줄기차게 읽기 때문에 더더욱 김수영 시인의 책을 만나기가 어려웠으리라.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 시를 써서 생활을 하기에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려운 살림에 불같은(작가는 그렇게 표현했다.) 성격의 남편과의 생활이 결코 녹녹하지 않았을 것 같아 안타깝다. 더군다나 젊은 나이에 갑자기 먼저 떠난 시인을 대신해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을지. 상상이 간다.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렸지만 큰 울림이 남는 책이다. 김수영 시인께서 책상 앞에 붙여 두었다는 <상주사심>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라. 이런 뜻이지 늘 죽는다고 생각을 하면, 지금 살아 있는 목숨을 고맙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다. 인생 2막을 시작하면서 나의 좌우명으로 삼고 싶다.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게 되길 기도하면서...

참 귀하고 귀한 책이 고맙다. 아름다운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다.

 

 

 

 

저자 소개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가 있다.

 

 

독서 메모

 

 

이태 전 김수영 시인 50주기를 맞이해서 문학 단체, 연구자, 시인, 언론인,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당신을 기리는 책들이 발간되었고, 학술대회 및 강연회가 열렸고, 시민들과 함께하는 기념행사가 이어졌습니다. ()당신의 시 나의 가족에 나오는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라는 구절을 몇 번이나 읽었습니다. 함께한 시간이 아무리 낡아간다고 해도 우리의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 국기가 어느 나라의 국기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일본 국기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일본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순간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당장 교과서를 덮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칠판에 한반도와 중국과 일본 지도를 그렸다. 나는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일본 말이 아니라 우리마로가 한자이며, 세 나라의 땅이 각각 다르고 국기가 다르듯 그곳에 사는 사람도 다르다고 가르쳤다. 그 순간 아이들의 눈이 번쩍했다.

 

갑자기 바위 위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나탄 총구를 들이댔다. ‘소리, 화약 냄새 ……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몸을 저미게 하는 싸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지만 너무나 돌발적인 상황이라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격발된 두 발 중 한발은 배인철의 두개골을 관통했고, 또 한 발은 본능적으로 모을 튼 내 옆구리를 관통했다. 그 총격으로 배인철을 즉사했다.

 

훗날 수영은 그 일을 두고두고 회상하며 내게 아방가르드한 여자라며, 어디서 그런 실험 정신이 나왔느냐며 농담 섞인 말을 건네곤 했다.

 

1968년에는 신문로로 의상실을 옮겼다. 계약할 때에는 김 시인과 함께 갔지만 이사는 김 시인이 타계한 이후에나 할 수 있었다.

 

마치 어떤 설화적인 분위기에 감싸인 탄생을 추억하듯 나는 내 삶의 최초의 장면처럼 김 시인이 지금도 나를 이끌고 있음을 안다. 구름이 달에 스쳐 가는 길을 따라 나는 시인의 아내로서 살았고, 시인의 아내로서 눈을 감을 것이다.

 

나는 이 시를 김 시인의 시 중에 제일로 꼽는다. 서정의 가락이 유창하게 늘어서 있는 문장들이 특히 좋았다. 하지만 명확한 의미는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해서 언제인가 김 시인에게 무엇을 생각하고 이 시를 썼냐고 물었다. 김 시인은 사회주의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말했다. 그는 늘 자유에 대해 목말라 했다. 헌법 조항에 명시되어 있는 언론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가 구현되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 주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두 자유에 대해 정부는 구속을 그만두고 사회주의를 부흥시켜야 한다고도 했다. 술을 마시고 돌아온 날이면 학자와 예술가가 왜 국가를 초월한 분가침의 존재이어야 하는지 나를 앞에 두고 일장 연설을 펼쳤다. 특히 자유로운 비판을 할 수 있고 간혹 사회주의 국가의 초빙을 받아 유학을 다녀오신 일본의 문인들을 부러워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김 시인에게 그 백의에 대해 물어보았다. 김 시인은 그것이 밀가루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했다. 밀가루도 그냥 밀가루가 아닌 미국의 원조로 들어온 밀가루. 결국 수영에게 백의는 사회·경제·문화,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미국에 종속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염두에 둔 상징이었다. 1967년 가을, 어느 지면에서 영화평을 청탁받은 김 시인은 나와 함께 극장에 갔다. 김 시인은 영화를 반도 채 보지 않고 극장에서 뛰쳐나갔다. 영화 속 배우들의 말투며 표정, 포즈 하나하나까지 미국의 영화배우들을 모방한 것이 너무도 불쾌하다고 했다. 물건이나 상품은 그렇다 쳐도 당시 예술과 예술가들이 갖고 있는 사대주의적 태도를 김 시인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들만의 새로운 옷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4.19 직후 동아일보에서 부정 선거에 대한 칼럼 청탁이 왔다. 원고가 실린 신문을 구해 왔더니 칼럼이 실려야 할 난에 김수영 이름 세 글자만 있고 휑하니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검은 활자로 득실 거리는 신문 중심의 공란은 마치 무인도와 같았다. 잠시 우두망찰해 있다가 김 시인에게 보여주며 불쾌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신이 나 했다. “멋있잖아, 이런 게 저항이지.” 김 시인의 말이었다.

 

어느 날 김 시인과 나는 양계장의 계란이 조금씩 없어지는 것을 눈치 챘다. () 김 시인은 점잖은 목소리로 남의 집 일하는 사람이 그런 재미도 없으면 어떻게 일을 하냐며 그냥 모른 척하라고 했다. 김시인의 그 태연함에 나는 화가 더 치밀어 올랐지만 한편으로는 김 시인의 말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만용을 잘 기른 것은 양계 일의 유일한 보람이었다. 10년을 꼬박 채워 양계를 했지만 이렇다 할 재미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양계를 그만두면서 나는 김 시인과 닭을 10년 키울 바에는 사람을 10년 키우는 게 낫다는 말을 흐뭇하게 나누었다.

 

역시 수식 없이 그의 온몸에서 울려 나온 듯한 소리로 꽉 차 있다. 풀이 척박한 땅을 탓하지 않듯 김 시인의 시는 과잉도 부족도 없이 그의 몸 안으로 안으로 흐르고 있는 것 같다. 탈고를 하고는 김 시인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시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자세와 김 시인의 시정신의 끝은 존재에 대한 사랑에 꽂혀 있었다. 개인으로서 시인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안일과 무위(無爲)를 극도로 거부한 그였다. 오직 존재의 참되고 아름다운 정신의 지표를 바랐다. 자학까지 하면서 그는 그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가에서 자라나던 무성한 풀잎들, 내 가슴 속에는 언제나 그의 싱싱한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김 시인은 새까맣게 탄 얼굴로 산소 호흡기를 통해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배가 불룩 부풀어 오르고, 내쉬면 가라앉는 기계적인 동작을 되풀이 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생과 사를 오락가락하면서 죽음 혹은 삶과 싸우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새벽 5시가 넘자 그 가느다란 싸움도 포기한 듯 그는 얼굴이 풀리고 고요해졌습니다. 저는 흐느끼면서 그의 두 눈을 감겨주었습니다. 48년의 생애를 마치고 김 시인은 조각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로 무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상주사심常住死心그는 어느 날 자신의 책상 한 구석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궁금해 여쭈어 보았더니, 이는 어느 불경책에 쓰여 있는 말로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라. 이런 뜻이지 늘 죽는다고 생각을 하면, 지금 살아 있는 목숨을 고맙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어.” 그는 온몸으로 시를 쓰는 참다운 시인이었기에, 하루하루가 새로움에 대한 비약이요, 몸부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진실에 대한 투쟁이야말로 그의 삶,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그의 시는 살아 있습니다. 그이의 시는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진실은 아름답고 착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진실밖에 없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가치 기준을 아름다움에 두었습니다.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저는 그이의 초고를 봅니다. 깨알같이 쓴 장문의 시. 그의 시를 정리해서 원고지에 깨끗이 옮기는 작업이 저의 과업입니다. 몇 줄 안 되는 짧은 시일 때는 옮겨 쓰는데 몇 분 걸리지 않아 아이들 시장기에 별 지장이 없었지만, 장시나 산문은 몇 시간이 걸릴 때도 있어서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기도 했습니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그 가 입버릇처럼 만한 산고를 온 식구가 다 겪은 셈입니다. 1년이면 평균 10편에서 13편 정도의 시를 썼습니다. 그이의 불같은 성미와 신경질적인 언사를 그이는 늘산고였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

 

고독과 절망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고독이나 절망이 용납되지 않는 생활이라도 그것이 오늘의 내가 처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순수하고 남자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위도에서 나는 나의 생활을 향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여학교에 다닐 때 동경에 있던 수영이 처음 보내온 편지엔 책이 한 권 선물로 동봉되어 있었다. 러스킨의 깨와 백합. 책을 읽은 뒤 감상문을 써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내 감상 글을 읽은 그에게서 다시 편지가 왔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 받아본 최상의 칭찬이었을 것이다.

 

술에 취하면 애교가 대단해질 때도 있지만 울분과 불만의 분화구로 변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공포로 나는 성난 사자 앞에 생쥐 꼴이 된다. 그것이 산고였을까. 그 뒤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시들이 태어났다.